이지혜 영화 저널리스트
지금 가장 단단한 배우의 얼굴
★★★★
비정하고 견고한 영화 안에서 가장 단단한 존재는 밀드레드다. 딸을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사는 그에게 눈물 흘릴 여유는 없다. 대신 무능한 경찰을 공격하는 광고판을 세우고 분풀이를 위해 화염병을 던진다.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목수가 집을 짓듯 차곡차곡 밀드레드의 분노와 죄책감, 좌절을 쌓아올렸다. 덕분에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혼전이 거듭되는 와중에도 밀드레드는 흔들리지 않는다. 가히 장인의 솜씨다.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분노하는 자를 위한 나라는 있다
★★★★
대상과 형식이 다를 뿐 모두가 무언가를 증오하고 혐오한다.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각자의 분노는 엉뚱한 곳에 날아가 꽂힌다. <쓰리 빌보드>는 잠들 수 없는 분노의 밤을 서성이는 자들의 펄펄 끓는 마음에 손쉽게 동조하는 대신, 그들의 모습을 침착하고 차갑게 바라본다. 공감과 냉소를 오가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보면 이 모든 소동은 부조리와 성급한 판단으로 탄생한, 마냥 웃지만은 못 할 거대한 농담처럼 보인다. 그 안에서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각자 몸부림치는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저돌적이고 강렬한 태도의 각본, 곱씹을수록 놀라운 연기가 긴 여운을 남긴다.
송경원 <씨네21> 기자
오늘의 미국, 미국영화에 대한 바로미터
★★★★
딸을 잃은 엄마가 세 개의 광고판을 통해 행동을 촉구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무능력한 공권력을 향한 도발처럼 보이지만 이후 전혀 예상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광고판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척했던 갈등과 차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촉매에 불과하다. 차별과 편견과 분노라는 미국사회의 민낯에서 출발하는 영화. 행동하는 여성의 걸음을 빌려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각본, 주제, 연기 뭐 하나 빠지는 데 없이 쫀쫀하다. 유머 사이 배어나오는 인간의 품격. 씁쓸하지만 쓸쓸하진 않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예측한 모든 것을 비껴간다
★★★★
‘딸을 잃은 엄마의 복수’라는 한 줄로 표현하기엔 영화가 담고 있는 함의가 복합적이고도 크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규격화된 선 안에 갇혀 있는 법이 없다. ‘저 캐릭터는 저런 사람이구나’ 판단하기 무섭게, 영화는 관객이 짐작했던 반대 방향으로 인물을 냅다 끌고 가 버린다.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있는 인물도 쉬이 보이지 않는데, 영화가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막힌 인연과 가혹한 오해들이 겹치면서, 정답이라 생각했던 믿음과 편견에 연신 파문을 일으킨다. 강한 ‘한 방, 한 방’이 줄지어 터지는 후반부 서사는 그야말로 후덜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