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즌>에서는 이 사진의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는 한석규를 볼 수 없다. (사진 제공 쇼박스)
<프리즌> 촬영현장.

‘클래스는 영원하다.’ 흔히 축구 선수에게 붙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도 그 실력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알고 있다. 이 표현을 배우에게 붙여도 문제될 건 없어 보인다. 3월 23일 개봉하는 <프리즌>에 출연한 배우 한석규에게도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을 쓸 수 있다. 

‘클래스’라는 표현을 쓴 김에 한석규의 ‘클래스’에 대해 알아보자. 한석규는 ‘199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배우, ‘흥행 보증 수표’라고 불렸다. 충무로의 시나리오 99%가 한석규에게 가장 먼저 간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정도 사실일 거다.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황정민, 정우성, 이병헌 이전에 한석규가 있었다. 참고로 그 이전에는 박중훈, 문성근, 그 이전에는 안성기가 있다.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1997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시기에 한석규가 출연한 작품을 찾아보면 새삼 놀라게 된다. <초록물고기>가 1997년 2월, <넘버 3>가 8월, <접속>이 9월 개봉했다. 2월, 8월, 9월이라는 개봉 날짜가 의미심장하다. 2월은 설날, 8월은 여름 휴가철, 9월은 추석이기 때문이다. 1997년 관객들은 극장가의 주요 성수기마다 한석규의 얼굴을 봤다. 1998년에는 한석규 스스로 자신이 출연한 영화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80점)를 준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했다. 1999년에는 <쉬리>가 한국영화계의 새 흥행 역사를 썼다. 배우 한석규의 클래스가 이 정도다. 이때가 그의 최고 전성기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대략 20년이 지난 지금 한석규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씨네플레이 회의 시간에 “지금은 예전 같지 않죠”라는 얘기가 나왔다. (팬이라고 주장한) 에디터는 순간 발끈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1997년과 2017년의 한석규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그에게 찾아온 슬럼프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1999년 <텔 미 썸딩> 이후 2002년 <이중간첩>까지 약 3년 동안 한석규의 출연작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인 3년 사이 그에 대한 평가는 예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검토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가 고르고 고른 영화 <이중간첩>의 실패가 달라진 평가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유지태가 연기한 <올드보이> 우진 역을 한석규가 수락했다면 어땠을까.

<이중간첩>
<주홍글씨>
<그때 그사람들>

슬럼프는 길어졌다. 고 이은주와 함께 출연한 <주홍글씨>와 백윤식과 함께한 <그때 그사람들>을 거쳐 2005년 <미스터 주부퀴즈왕>에 이르면 ‘한석규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한석규가 출연한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구타유발자들> <음란서생>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이층의 악당>까지에 과거 같은 영광은 없었다.

<미스터 주부퀴즈왕>
<구타유발자들>
<음란서생>

<이중간첩>을 준비하던 2002년 한석규는 <씨네21>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흥행이든 작품성에서든 분명 실패는 있을 거예요. 저도 잘 알아요. 실패가 있는 거죠. 하지만 개별 작품이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전체적인 그래프가 상승하는지, 하락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영화는 성공해도 연기자로서 전체적인 그래프는 계속 내려가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몇십년이나 배우를 할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그래프가 중요한 거 아닐까요. 언젠가 배우생활을 마감할 때 ‘그 친구 괜찮았다’, 그런 말 듣는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뿌리깊은 나무>

2011년 한석규는 드라마로 연기자 그래프의 반전을 이뤘다.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자신의 연기 클래스를 대중에게 다시 각인시켰다. TV 앞에 있던 사람들은 과거의 한석규를 떠올리며 ‘한석규라는 배우가 정말 연기를 잘했었지’라고 생각했다. 한석규는 2016년 11월부터 방송된 <낭만닥터 김사부>를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연기력을 보여줬다. 두 드라마를 통해 한석규는 두 번의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사실 알고 보면 한석규는 늘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다만 그가 출연한 작품이 흥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시 축구에 비교하자면 한석규는 경기에 패한 팀의 평점 7점 이상의 선수라는 말이다. 축구처럼 영화도 팀플레이가 중요하다. 실력 있는 선수도 중요하지만 좋은 감독, 좋은 구단주가 있어야 우승할 수 있다. 실력 있는 선수 한석규는 좋은 감독, 구단주에 목매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가 아니라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갓 부임한 약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선택했다고 할까.) 한석규는 신인 감독들의 영화에 유독 많이 출연했다. 신인 감독들에겐 좋은 시나리오가 유일한 무기였다.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한석규는 영화 데뷔작 <닥터 봉>(이광훈 감독)부터 <은행나무 침대>(강제규 감독), <접속>(장윤현 감독), <넘버 3>(송능한 감독), <초록물고기>(이창동 감독), <8월의 크리마스>(허진호 감독), <이중간첩>(김현정 감독), <미스터 주부퀴즈왕>(유선동 감독),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변승욱 감독), <음란서생>(김대우 감독),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박신우 감독), <프리즌>(나현 감독)까지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에 출연해왔다. 모두 12편이다. 그가 출연한 영화 23편의 절반 이상이다.

2007년 제9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 공고.

신인 감독을 믿고 출연한 한석규의 시나리오 사랑은 각별하다. 1999년부터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을 주최했다. 명칭은 <초록물고기>에서 한석규가 연기한 캐릭터 이름에서 따왔다. <씨네21>이 후원하는 이 공모전은 12회까지 개최됐다. 황정민이 출연한 <그림자 살인>(2009)과 권상우, 성동일 주연의 <탐정: 더 비기닝>(2015) 등이 당선작이었다.

 “시나리오 작가의 애환을 아세요?” 한석규가 <프리즌> 미디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최근 몇 년간 언론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은 한석규는 기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 <프리즌>의 나현 감독 등이 시나리오 작가 출신 감독들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신인 감독의 첫 영화를 위해 한석규가 할 수 있는 건 연기에 충실하는 것뿐이다. 2008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개봉을 앞두고 한석규와 만난 <씨네21>의 기자는 이렇게 썼다.

“그는 <닥터봉> 이후로는 영화 미완성본을 보지 않고, <초록물고기> 이후로는 편집실을 가지 않는다. <그때 그사람들> 이후로는 캐릭터와 영화에 관해 감독과 그리 잦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제가 알아서 잘해보겠습니다'라는 말로 거의 모든 준비를 혼자서 한다. 새 작품 촬영을 시작하면 5회차 안에 그 인물에게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고 원칙을 세우고 있다. 15년여의 프로 연기 생활에서 얻어진 그의 몇 가지 내규들은 마치 누군가의 아침 조깅 습관처럼 일상적으로 들린다.” 이 글에서 느껴지는 한석규는 감독의 부름을 기다리며 매일 같이 체력을 단련하는 베테랑 선수의 모습이다.

<베를린>
<파파로티>
<상의원>

2008년 프로 15년차였던 한석규는 지금 경력 30년에 가깝다. 최근 <프리즌>으로 기자들과 만난 그는 “계속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되든 안 되든 무대에 계속 서며 진짜를 얘기하고 싶다”고도 했다. “아직 한국영화에서 못 해본 게 더 많다”는 얘기는 특히 반가웠다.

<프리즌>

배우는 축구 선수와는 달라서 어쩌면 죽기 직전까지도 현역으로 뛸 수 있다. 한석규라면 거장 감독이든 신인 감독이든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경기에 투입되면 믿음직한 선수처럼 그는 앞으로도 연기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다음 작품이 늘 궁금하다. 연기자 한석규의 그래프는 전체적인 상승 곡선을 그릴 것으로 믿는다. 한석규의 ‘클래스는 영원하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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