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성일(사진 씨네21)

2018년 11월 4일 오전 2시 30분경, 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이 폐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한 시대가 저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60년 데뷔해 한국영화계의 아이콘이었던 배우 신성일, 지금까지도 영화계에 남겨진 그의 잔상을 정리해본다.



본명 강신영. 예명 신성일(申星一). 예명은 영화사 신필림과의 계약 때 신상옥 감독(<성춘향>·<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벙어리 삼룡이> 등 연출)이 지어준 것이다. 그야말로 영화계의 신성(新星)이 되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뤄졌으니 신상옥 감독의 식견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신성일이란 이름은 예명으로 지어졌으나 본명이 된 특이한 케이스다. 신성일은 영화법 개정을 위해 1981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반드시 본명을 사용해야 하는 선거 규정상 ‘강신영’으로 나서야 했다. 예명에 비해 인지도가 현저히 낮은 본명이라 선거에서 낙선했고, 이후 2000년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본명을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실제로 개명 후 출마한 그해 선거에서 당선돼 16대 국회의원(대구 동구갑)으로 활동한 바 있다.

<로맨스 빠빠> 속 강신성일(맨 왼쪽)

1960년, 영화사 신필림은 신인배우 오디션을 열었다. 당시 오디션엔 2640명이 지원했다. 신성일은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공모에 떨어질까 겁이 나 차마 지원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신필림 건물을 서성이던 중 이형표 감독을 통해 신상옥 감독과 만났다. 신상옥 감독은 그를 보자마자 계약을 제의했고, 신성일은 사무실과 현장에서 영화 일을 배우다 <로맨스 빠빠>의 막내아들 역으로 데뷔하게 됐다.

그가 평생 출연한 영화는 최소 500여 편. 네이버 영화 DB는 516편,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는 524편으로 등록돼있다. 1966년 한 해에만 68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어마어마한 영화 출연은 1962년 개정된 영화법과도 맞물렸다.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영화사들은 연간 최소 15편을 제작해야 했다. 영화사들은 외화 수입을 위해 다작을 적합한 시스템을 갖춰야 했으며, 60년대 스타로 떠오른 신성일은 발 빠르게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스타성을 입증했다. 물론 단순히 다작을 넘어 매번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택한 안목이 그의 특별한 위치를 만들어줬다.

<아낌없이 주련다> 강신성일(왼쪽)과 이민자

배우 신성일을 발굴한 건 신상옥 감독이었으나 그를 세상에 알린 건 유현목 감독이었다. 신성일은 <오발탄>으로 유명한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에서 술집 주인 여성을 사랑하는 청년 역을 제의받았다. 신필림과의 3년 계약이 끝난 시기, 주변에서 배신자라는 비난까지 감수하며 유현목 감독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리고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맨발의 청춘>

이후 <맨발의 청춘>에서 부잣집 따님 요안나(엄앵란)를 사랑하는 폭력배 서두수 역으로 정점을 찍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결국 비극적인 선택으로 영원한 사랑을 완성시킨 이 멜로드라마는 신성일에게 ‘한국의 제임스 딘’이란 별명을 안겨줬다. 이 영화는 ‘청춘의 반항아’라는 캐릭터를 유행시켰고, 청춘 남녀인 두 주연 배우 엄앵란과 신성일이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왼쪽부터) <초우>, <만추> 문정숙과 강신성일

1960년대 후반의 필모그래피는 한국 영화사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독일 표현주의를 재현하려는 유현목 감독의 실험작 <춘몽>, 한국 모더니즘의 대표작 김수용 감독의 <안개>, 원본 유실에도 여전히 이만희 감독의 최고작으로 언급되는 <만추>, 사랑을 빌미로 신분 상승을 꿈꾼 남녀의 비극 <초우> 등 신성일이 ‘스타’가 아닌 ‘배우’로 남게 한 영화들은 이 시기에 포진해있다.

(왼쪽부터) <별들의 고향> 강신성일과 안인숙 / <별들의 고향> 개봉 당시 신문 광고

1972년 유신 정권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영화계는 표현의 자유를 빼앗겼다. 관객 수도 줄면서 침체기에 빠졌지만, 신성일의 티켓 파워는 여전했다. 1973년 <이별>로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경신했다. <별들의 고향>은 술집 접대부 여성을 그린 ‘호스티스물’의 시작을 알렸으며, 신성일에겐 지식인이면서 무능력한, 그러면서 매력적인 ‘나쁜 남자’로서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그 파급력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경아’(안인숙이 맡은 여주인공 이름)라고 부르며 느끼하게 신성일의 캐릭터를 패러디하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생전 신성일이 가장 애착을 느끼는 영화도 <별들의 고향>이라고 밝혔다.

<겨울 여자> 강신성일과 장미희

1977년엔 장미희와 만난 <겨울 여자>로 다시 한 번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에 경신했다. 신성일의 이름값은 데뷔한 지 10여 년이 지난 이후에도 건재하단 걸 증명한 셈이다. 신성일은 이화(장미희)가 만나는 남자들 가운데 고등학교 시절 은사 허민 역을 맡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제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허민의 심리는 그동안 신성일이 이어왔던 비극적인 인텔리 이미지와 지고지순한 과거 멜로 속 남성과의 결합이었다.


<길소뜸>
<레테의 연가>

영화 시장이 변화하면서 70년대 중반부터 신성일의 출연작도 현저하게 줄었다. 한 해에 거의 서너 편만 출연했는데, 이혁수 감독의 <협객 시라소니>, 이장호 감독의 <낮은 대로 임하소서>, 김기영 감독의 <반금련>,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등 다채로운 장르를 넘나들며 중견 배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길소뜸>은 한국 영화가 후시 녹음에서 현장 녹음으로 옮겨가던 시기, 신성일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이 시기에 <길소뜸>으로 베니스영화제, <레테의 연가>로 칸영화제에 진출하며 해외에도 이름을 알렸다.

(왼쪽부터) 1991년 개봉한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90년대부터는 영화인 신성일의 도전으로 채워졌다. 1983년 설립한 영화사 성일씨네마트를 통해 <코리안 커넥션>, <남자 시장>, <물 위를 걷는 여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열 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를 제작했다. 앞서 언급했듯 정치 활동을 준비하고, 마침내 성공했다. 2004년,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고는 대한민국 영화사를 총망라할 영화 박물관 설립 의지를 밝혀왔다.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신성일 참석 당시 모습 (사진 씨네21)

2016년 6월, 신성일은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반려자인 엄앵란이 유방암 치료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대중들의 걱정과 달리 신성일은 “원래 체력 관리를 잘했다”고 스스로 자부한 만큼 병마에 쉽게 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회고전이 준비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호전적인 상황임을 몸소 보여줬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한 달 전인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도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나 11월 3일,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로 응급실에 입원했고, 끝내 4일 새벽 2시 30분경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빚쟁이에 쫓겨 친척 집을 전전하던 한 고등학생은 충무로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의 행보가 티끌 하나 없는 위인의 행적은 아니다. 2011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자신의 불륜 사실을 밝혔고, 16대 국회의원이던 2005년 2월 뇌물수수죄로 구속돼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아 2년여간 복역했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를 향한 자신의 뜻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것은 용감한 발자취임에 틀림없다. 2018년 11월 4일, 수백 편의 출연작과 대중들에게 추억을 남긴 강신성일을 ‘별들의 고향’으로 보내줘야 할 때이다.

강신성일(사진 씨네21)
맨발의 청춘

감독 김기덕

출연 강신성일, 엄앵란

개봉 196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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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감독 이장호

출연 안인숙, 강신성일

개봉 197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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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련다

감독 유현목

출연 이민자, 강신성일, 허장강

개봉 196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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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