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표현이었어도 오랜 세월 반복되서 사용하면 결국 진부해진다. 그것이 바로 클리셰(cliché)다. 클리셰는 영화의 MSG 같은 역할을 한다. 적당히 사용하면 관객들에게 익숙한 재미를 줄 수 있으나 많이 사용하면 MSG 맛밖에 안 나는 영화가 된다. MSG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영화 즉, 줄거리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SBS 드라마 <펀치>의 한 장면. 김응수가 연기한 캐릭터는 검사지만 아래 본문의 교장 선생님 대사에도 어울린다.

스포츠 영화의 클리셰. 평소 꿈 없이 지내던 가난한 학생이 어떤 계기로 운동을 시작하고 사랑하게 되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 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교장이다. 그는 꼭 이렇게 말한다. “이봐요, 김 선생. 학교에 예산이 남아 도나?운동은 개뿔이… 뭐가 중요한지 몰라요?” 이처럼 딱 떠오르는 클리셰들을 정리했다. 단, 당연히 모든 영화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염두에 두자.

*다소 잔인한 사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액션 영화 클리셰

쿨 가이는 폭발 따위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
이 세상 멋짐이 아니다. 거의 저세상 갈 법한 멋짐.

액션영화에서 멋진 남자는 뒤 따위 돌아보지 않는다. 오로지 전진만이 있을 뿐. 그 아무리 거대한 폭발이라 할지라도 쿨 가이들를 붙잡을 수 없다. 그들은 폭발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카메라 쪽을 향해 걸어온다. 슬로우 모션까지 넣었다면? 그야말로 퍼펙트다.

아이언맨도 예외일 수 없다.

자기 순서 기다리는 악당 조무래기들

<비트>

액션영화의 주인공은 말이 많으면 안 된다. 많으면 순식간에 데드풀이 되어 버린다. 일부러 그런 컨셉을 잡은 것이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 과묵하고, 홀로 다닌다. 원래 ‘짱’이란 고독한 늑대와도 같은 것. 싸울 때도 홀로 싸운다. 아무리 적이 많아도 상관없다. 이 적들은 꽤나 매너 있기 때문에 한 명, 많아봤자 두세 명이 덤빈다. 멋없게 우르르 덤비지 않는다. 주인공은 손만 스쳐도 적을 때려눕히고, 아직 멀쩡한 악당들은 스텝을 밟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공조>에서 얌전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악당들.
비트

감독 김성수

출연 정우성, 고소영

개봉 1997.05.10.

상세보기
공조

감독 김성훈

출연 현빈, 유해진, 김주혁

개봉 2017.01.18.

상세보기

갑자기 ‘찬호박’ 빙의해서 투머치토커(TMT)가 되는 악당

<007 네버 다이>

그렇게 냉혹하던 악당들도 갑자기 주인공을 위기에만 몰아 넣으면 말이 많아진다. 안심하고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그들의 모습에 관객들은 그저 답답한 마음. 컨셉이 아닌 이상에야 악당은 과묵해야 멋있다. <007 네버 다이>(1997)에서 엘리어트 카버(조나단 프라이스)는 본드(피어스 브로스넌)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며 주절주절하기 시작한다. 이는 비단 악당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주인공 역시 엑스트라는 잘만 죽이다가 악당 앞에서 멋있는 척을 하며 연설을 하는 경우가 있다. 존 윅(키아누 리브스)을 본받자. 말 할 시간에 존 윅은 세 명은 더 죽였다.

이 글을 볼 시간에도 존 윅은 이미 6명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죽였다면 더 이상 말을 하지 말고 가자. “해치웠나”라는 말은 관에 있던 악당도 벌떡 일으키게 만든다.

존 윅

감독 데이빗 레이치, 채드 스타헬스키

출연 키아누 리브스, 미카엘 니크비스트

개봉 2015.01.21. / 2017.03.30. 재개봉

상세보기
007 네버 다이

감독 로저 스포티스우드

출연 피어스 브로스넌

개봉 1998.01.17.

상세보기

로맨스영화 클리셰

부모는 항상 연인을 못마땅해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로맨스영화의 장애물은 셰익스피어 시대부터 달라진 게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집안의 반대로 이뤄질 수 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약 4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영화, 드라마 속 연인간의 장애물은 서로의 부모님이다.

<노트북>의 ‘고무룩’(라이언 고슬링 시무룩)

“이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란 자녀의 말에 한 방에 ‘오케이’를 외치는 부모님이 없다. 외모든, 돈이든, 학벌이든, 집안이든 뭐 하나는 꼭 마음에 안 든다. 그들에게 “전 이제 성인이라고요!”라고 외치는 자녀들의 말은 그저 어린 아이의 치기처럼만 들릴 뿐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품 안에서 자녀를 보내준다. 

<꽃보다 남자>

다만 한국 드라마라면 위와 같이 생긴 시어머니가 돈 봉투를 내밀 수도 있다. 만약 돈 봉투도 받지 않고, 헤어지지도 않았다면 시어머니는 뒷목을 잡거나 흰 띠로 이마를 감쌀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감독 바즈 루어만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클레어 데인즈

개봉 1996.12.28. / 2014.03.27. 재개봉

상세보기
노트북

감독 닉 카사베츠

출연 라이언 고슬링, 레이첼 맥아담스

개봉 2004.11.26. / 2016.10.19. 재개봉

상세보기
꽃보다 남자

연출 전기상, 이민우

출연 이민호, 김현중, 김범, 김준, 구혜선, 김소은, 김현주, 김기방, 이혜영, 김종진, 박수진, 이민정

방송 2009, KBS2

상세보기

주인공들은 처음에 철천지 원수가 따로 없는 사이다

<라라랜드>. 손가락에 모자이크를 하니 뭔가 더 상스러워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로맨스영화 주인공들의 첫 만남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다. 재수 없고, 생긴 것도 별로다. ‘재수 옴 붙었네’라고 생각하며 다신 엮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지만 어쩐지 자꾸만 마주친다. 그러던 중 의외의 면을 발견하며 서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의 슬픔과 환희를 보여주며 많은 이들의 인생 영화에 등극한 <라라랜드>(2016)의 주인공들 역시 처음엔 이런 사이였다.

라라랜드

감독 데이미언 셔젤

출연 엠마 스톤, 라이언 고슬링

개봉 2016.12.07. / 2017.12.08. 재개봉

상세보기

빗속에서의 키스신

<스파이더맨>

로맨스영화는 빗속에서 나누는 키스신이 빠질 수 없다. 촉촉히 젖은 두 사람, 비를 맞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하며 사랑을 나눈다. 벌써 로맨틱하다. 원래 사랑은 좀 촉촉해야 한다. 건조한 황사 속에서는 로맨스영화의 맛이 안 산다. 단, 현실에서 따라하다가는 환상이 와장창 깨질 수 있으니 주의하자. 공들여 드라이하고 왁스칠한 머리는 다 녹아내리고, 눈도 제대로 못 떠서 찌푸리고 있어야 한다. 만약 화장을 했다면 판다가 될 수도 있다. 비가 그쳐 가는 길에 옷이라도 마르면 물 썩은 냄새까지 날 수 있으니 웬만하면 우산 속에서 하자.

스파이더맨

감독 샘 레이미

출연 토비 맥과이어, 윌렘 대포, 커스틴 던스트, 제임스 프랭코, 클리프 로버트슨, 로즈마리 해리스, J.K. 시몬스

개봉 2002.05.03.

상세보기

전쟁영화 클리셰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 혹은 ‘하고 싶다’고 말하면 죽는다

<포화 속으로>

전쟁 중에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 혹은 하고 싶다고 말하지 말자. 만약 말했다면 당신은 사망 확정. <포화 속으로>(2010)에서 “형아야. 어머니가 끓여준 김치찌개 먹고 싶다”라고 말한 용만(김혜성) 역시 결국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대사는 바로 “어무이가 해주는 김치찌개, 마이 묵으라. 내 몫까지”였다.

포화 속으로

감독 이재한

출연 차승원, 권상우, T.O.P, 김승우

개봉 2010.06.16.

상세보기

가족 사진을 꺼내면 죽는다

<고지전>

전쟁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족사진이다. 가족사진을 꺼내며 그들을 그리워하면 그는 ‘사망 플래그’를 세운 것이다. 만약 그가 사진을 꺼내며 “내 딸이야 혹은 아내야, 예쁘지?”라는 말까지 했다면 그야말로 완벽하다.

사망
<포화 속으로>

자매품 어머니에게의 편지도 있다.

고지전

감독 장훈

출연 신하균, 고수, 이제훈, 류승수, 고창석, 이다윗, 류승룡, 김옥빈, 조진웅, 정인기, 박영서

개봉 2011.07.20.

상세보기

개그를 치면 죽는다

<고지전>

다같이 전쟁통에 모여 있을 때 꼭 하나씩은 있는 분위기 메이커는 아쉽게도 죽는다. 항상 장난만 치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전쟁에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면 그가 죽을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으아아아아아”하면서 총을 난사하거나 칼을 휘두르면 아마 그 캐릭터는 곧 죽을 것이다.

그는 ‘플래그’를 두 가지나 세워 버렸다

만약 두 가지 이상 사망 플래그를 세웠다면 그가 죽을 확률은 점점 높아진다. 이 외에도 어머니의 유품을 꺼내면 사망, “우리 그래도, 사진 한 장은 남겨야지! / 사진 한 방 찍자, 마!” 등을 말하면 사망 등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나간 한 군인.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여담으로 미국 전쟁영화에서는 어느 부대나 하모니카를 불 줄 아는 군인이 한 명씩은 꼭 나타난다. 실제로 미군은 전쟁 중 하모니카를 많이 분다. 남북전쟁 때부터 큰 인기를 끌었으며 정부에서 지급을 하기도 했다.


공포영화 클리셰

주인공들은 달릴 때 무조건 넘어진다

<노크 노크>

여자든, 남자든, 건장하든 아니든 공포영화 주인공이라면 살인자로부터 도망치다가 꼭 한 번은 넘어진다. 그리고 이내 발목을 다친다. 거의 유리 발목 수준이다. 한 번 넘어져서 발목은 붓고, 절룩거리며 달리게 된다. 살인자는 뛰지도 않고 꽤 먼 거리를 거의 1초 만에 따라 잡는다. 대부분 소녀들에게 적용되는 클리셰지만 성인 남자라고 방심해선 안 된다. <노크 노크>(2015)에선 키아누 리브스가 여자들에게 쫓겨 ‘와장창!’하고 넘어진다.

노크 노크

감독 일라이 로스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자 이조, 아나 디 아르마스

개봉 2015.10.22.

상세보기

하지 말란 건 전부 한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공포영화 주인공 혹은 그의 친구들은 하지 말란 건 전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절대! 지하실엔 들어가지 마”라고 하면 꼭 들어간다. “그 장난은 위험해”라고 하면 시험 삼아 해본다. “여기 느낌이 이상해. 나가자”라고 하면 “귀신같은 게 어디 있다고, 이 겁쟁아!”라고 말하며 꼭 수상쩍어 보이는 문으로 들어간다. 그때부터 주인공들의 고생길은 활짝 열린다. <파라노말 액티비티>(2010) 속 주인공의 남자친구 미카(미카 슬로앳) 역시 하지 말라고 했던 위저 보드를 사용해 악령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위저 보드는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일종의 오컬트 도구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당연히 위험하다. 금기란 금기는 어기는 주인공들을 보면 관객들은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위저 보드 실행 결과
파라노말 액티비티

감독 오렌 펠리

출연 케이티 피더스턴, 미카 슬로앳, 마크 프레드릭스, 애슐리 팰머, 엠버 암스트롱

개봉 2010.01.13.

상세보기

집에서 괴한을 만나면 위층으로 올라간다

<스크림>

집 안에서 괴한을 만나면 당연히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꼭 탈출구도 없는 위층으로 올라간다. 보는 입장에선 ‘아니, 거기서 왜 올라가’라고 생각하겠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당황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스크림>에서 주인공 시드니(니브 캠벨)는 살인마에게 쫓길 때 위로 올라가는 주인공들이 멍청해 보인다고 했지만 자신 역시 살인마를 만나자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한다. 바깥으로 나가려 했지만 문이 쉽게 열리지 않자 그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간다. 급히 문을 잠그고 전화를 걸려 하지만 당연한 듯 전화는 먹통이다.

스크림

감독 웨스 크레이븐

출연 데이빗 아퀘트, 니브 캠벨, 커트니 콕스, 매튜 릴라드, 스키트 울리치, 제이미 케네디

개봉 1999.01.16.

상세보기

그 외 한국영화의 클리셰가 된 배우들

그 외에 한국영화의 클리셰가 배우들을 짧막하게 준비했다. 재미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다.


걸쭉하게 말하는 운동 코치 성동일

<국가대표>

한때는 열정 넘쳤지만 이제는 한물 간 코치라면 성동일이 딱이다. 출석부로 머리 한 대씩 때리며 “으휴, 으휴!”하는 그의 모습이 벌써 그려진다. 열정도, 의욕도 없이 그저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꾸준히 노력하는 주인공을 보며 점차 의욕을 되찾는다. 그리곤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교장의 말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반발하는 참된 선생님이 된다. 마지막에 팀원들과 함께 파이팅까지 외쳐주면 완벽하다.


가난하고 약간은 찌질하지만 정 많은 아버지 정인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

언제쯤이면 정인기가 건강하고 돈 많은 역으로 나오는 걸 볼 수 있을까. 그가 주인공의 아버지로 나온다면 일단 부유한 집안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미 사망했을 확률도 적지 않다. 주인공의 회상에서 아버지는 ‘○○아, 세상이 그리 차가운 것만은 아니란다. 네 미소를 보렴’이라고 말하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을 구하다가 혹은 의로운 일을 하다가 사망한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말을 가슴 속에 새기며 당차게 살아간다. 드라마 한 편을 완성한 기분이다.

시크릿 가든

연출 신우철, 권혁찬

출연 하지원, 현빈, 윤상현, 김사랑, 이필립, 유인나, 이종석, 장서원, 박준금

방송 2010, SBS

상세보기

진행시키는 이경영

<더 테러 라이브>

이경영의 얼굴만 봐도 “진행 시켜”라는 말이 자동재생이 된다. 특히 정치영화에서 그가 없으면 진행이 안 될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의원(혹은 대표, 사장 등)님, 도심에 ○○이 벌어졌답니다!’라고 말하는 부하 직원에게 ‘○○라, 흥미로운 시나리오군. 일단 대북 일정에 맞춰서 진행 시켜’라고 답하는 이경영. 벌써 영화 속 한 장면이 완성됐다.

더 테러 라이브

감독 김병우

출연 하정우, 이경영, 전혜진

개봉 2013.07.31.

상세보기

씨네플레이 김명재 인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