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염정아 전성시대다. 530만 관객에 육박하는 성적을 거둔 영화 <완벽한 타인>, 회를 거듭할수록 비지상파 채널 최고 시청률을 갈아치운 드라마 <SKY 캐슬>에 이어 최근 세 달 사이 <뺑반>과 <미성년>까지 내놓았다. 염정아가 지난 27년간 거쳐온 영화 속 캐릭터를 망라했다.

째즈빠 히로시마 (1992)

염정아의 첫 영화. 미스코리아 선에 당선되고, 인기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 참여하고, 스크린 데뷔작으로 바로 주연에 발탁됐다. 히로시마 피폭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유리 역으로, 당시 최고 멜로배우였던 강석우의 파트너로 활약했다. 일본인 캐릭터라 대사는 일본어 더빙 처리됐다. 한일 양국의 갈등과 사랑 이야기를 잇겠다는 나름 야심찬 기획이었지만, 중년 남성의 판타지만 남았다.

텔 미 썸딩 (1999)

고어와 스릴러를 결합한 <텔 미 썸딩>은 1999년 말 개봉해 쏠쏠한 흥행을 기록했다. 염정아는 연쇄살인의 의혹을 받고 있는 수연(심은하)의 의사 친구 승민을 연기했다. 90년대 말엔 더더욱 드물었던 레즈비언 캐릭터. 수연을 사랑해서 그의 살인에 공조하고, 혼자 그 죄를 뒤집어쓰려 한다. 수연과 승민 사이의 가시적인 로맨스는 드러나지 않지만, 승민의 보이시한 외모를 비롯한 꽤나 명징한 징후들이 영화 전반에 산재해 있다.

H (2002)

<텔 미 썸딩> 이후 3년 만에 작업한 영화. 동료였던 약혼자를 자살로 몬 연쇄살인범을 수사하는 형사 역이다. 지진희와 짝패를 이루지만, 로맨스는 일절 배제돼 있다. 시종 건조한 태도로 수사에 매진한다. 강인한 이미지는 비단 외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련 신 하나를 찍기 위해 몇 개월간 킥복싱을 배웠고, 총 잡는 자세부터 제대로 잡아야겠다는 각오로 남자 배우들과 함께 경찰특공대 훈련에 임했다.

장화, 홍련 (2003)

2003년은 배우 염정아에게 전환점이 된 시기다. 김지운 감독의 호러 <장화, 홍련>은 그 기폭제였다. 염정아 스스로도 <장화, 홍련> 촬영 당시 “자신을 배재한 채 캐릭터에 매진하는 연기의 방법을 터득했다”고 밝혔다. 의붓자식을 죽자사자 괴롭히는 전통적인 계모의 폭력성에 더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신경질적인 태도는, 염정아의 마르고 날카로운 외모에 맞물려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김지운 감독은 “촬영 전 만난 염정아가 소리와 냄새에 예민해 하는 태도에 영감을 얻어 계모의 캐릭터를 확실히 구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범죄의 재구성 (2004)

구로동 샤론스톤. <범죄의 재구성> 속 인경의 닉네임이다. 사기꾼 영화의 필수요소라 할 만한 팜므파탈 캐릭터에 해당하지만, 고혹적인 매력보다는 얕은 수가 빤히 드러나는 순수함이 더 돋보인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 결국 사랑을 믿어버리는 모습조차 그저 귀여워 보인다. 장르적으로 느슨한 캐릭터를 스스로 채우겠다고 생각해 편하게 인경을 만들어갔다. 이전 캐릭터처럼 긴장이 느껴지지 않아 보기에도 한결 가볍다. 염정아는 <장화, 홍련>과 <범죄의 재구성>의 성공으로 다양한 여성 캐릭터에 도전할 수 있었다.

컷 (2004)

<쓰리, 몬스터>에 속한 박찬욱 감독의 <컷>에서는 뱀파이어를 연기했다. 염정아의 파리한 모습이 뱀파이어와 더없이 어울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지만, 아쉽게도 40분 웃도는 중편에 딱 2분 동안 출연하는 카메오다. 감독(이병헌)이 찍고 있는 영화 속 캐릭터로서 인트로를 장식한다. ‘저녁’을 먹던 중 이빨에 낀 장치를 빼고 누군가와 통화하다가 피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바닥에 흥건히 토해낸다. 염정아의 능청스런 몸짓과 박찬욱의 기괴한 유머 코드가 만난 소품이다.

여선생 VS 여제자 (2004)

염정아의 첫 코미디 연기. 서울로 전근 갈 궁리만 하는 미옥은 미술 선생(이지훈)을 두고 전학생 미남(이세영)과 신경전을 벌인다. 꿈 속에서도 5학년 짜리와 싸우고, 이기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쓰는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다. 평소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코미디를 권해왔고, 드디어 시도한 코믹 캐릭터를 만나 일상생활에서 하던 손짓발짓까지 동원해 미옥의 푼수 같은 면모를 그렸다. 미옥이 집에서 추는 오도방정 댄스도 평소 염정아가 십수 년간 갈고 닦은 꼬마가수 조르디 흉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년, 천국에 가다 (2005)

밤무대에서 노래하는 스물아홉 부자는 아들과 단둘이 살며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린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미혼모와 결혼하는 게 꿈인 13살 네모(박해일)는 부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여생을 바쳐 어른의 몸을 택한다. 염정아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담긴 시나리오를 받은 그날 세 번이나 정독해서 읽었다. 고단한 삶을 견디는 가운데서도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 부자는 염정아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 유독 빛나는 캐릭터다.

새드 무비 (2005)

<새드 무비>는 당시 소속사였던 싸이더스의 배우들이 한데 모인 작품이다. 염정아는 바쁜 업무로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다가 덜컥 암에 걸리는 엄마 주영 역을 맡았다. 엄마가 입원해서 자주 볼 수 있어 좋다는 아들과 천천히 관계를 회복한다. 엄마보다는 아들에 더 무게가 더 실린 이야기여서 당시 8살에 데뷔한 여진구와의 모자 ‘케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래된 정원 (2007)

황석영의 소설을 임상수 감독이 영화화 한 <오래된 정원>은, 80년대 군부독재에 저항하다가 도주 생활을 하는 현우(지진희)와 그를 숨겨주는 화가 윤희의 사랑을 그린다. 야만의 시대를 그리려는 의지가 분명하지만, 염정아는 온전히 제대로 된 멜로 연기를 선보이겠다는 일념으로 윤희가 됐다. 화가라면 으레 떠올릴 만한 물감에 더렵혀진 모습 같은 건 끼어들 틈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사랑에 마음을 쏟고 훗날 그 기억을 품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대쪽같은 여성상이 만들어졌다. 김윤석 감독은 <오래된 정원>의 윤희를 보고 <미성년>에 염정아를 캐스팅 했다.

내 생애 최악의 남자 (2007)

전작 <오래된 정원>을 촬영하며 배어 있던 우울에서 빠져나오고 싶던 차, 캐스팅 제안이 들어온 로맨틱 코미디였다. <여선생 VS 여제자>처럼 평소대로 몸과 표정을 적극 활용해 코미디에 집중했다. “어정쩡한 결혼 직후에 이상형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자극적인 유머를 늘어놓는 데 바쁘지만, 염정아의 슬랩스틱 연기만큼은 놓치면 아쉬울 것이다.

전우치 (2009)

<범죄의 재구성>에 이어 최동훈 감독 영화에 다시 한번 이름을 올렸다. 특별출연이지만 존재감은 단연 으뜸이다. <전우치>의 중심을 차지한 배우들은 사극과 판타지가 혼합된 장르에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겉돈다는 인상이 강했다. 반면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캐릭터를 맡은 염정아는 전작들보다 능숙하게 얄미움과 찌질함을 시전하면서 코미디 영화의 정체성을 가까스로 확인시켰다. 후시녹음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간첩 (2012)

(카메오로 참여한 <전우치>를 제외하면) 결혼 이후 5년 만에 작업한 영화. 간첩 소재 영화 특유의 비장한 캐릭터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간첩들의 생활상을 그려낸 작품에서 살림하랴 일하랴 하루가 모자른 부동산 중개인 강대리 역을 맡았다. 복비 10만원에 목숨 거는 생활력 강한 캐릭터를 보며,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아이들과 살아가는 평범한 아줌마의 모습을 발견하곤 캐스팅을 수락했다. 드라마 <로열 패밀리>에서 보여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간만의 영화에서 다시 한번 기대한 이들에겐 다소 심심한 작품이었을지도.

카트 (2014)

친근한 캐릭터들을 여럿 거쳐왔음에도 염정아에겐 늘 도회적인 이미지가 어른거렸다. 캐릭터보다는 현실이 먼저 보였던 <카트>에선 분명 달랐다. 5년 꼬박 성실히 근무한 끝에 정규직을 목전에 두고 하루아침에 해고를 통지 받는 마트 노동자 선희. 유니폼에 가려진 껑충한 육체는 꼿꼿해보이긴커녕 아슬아슬 위태로움만 배가 시킬 뿐이었다. 그럼에도 염정아는 감정을 절제하는 걸 최우선에 두고, 매서운 현실에 베이고베이는 선희의 투쟁을 따라갔다.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 배우들과 함께 한 경험 역시 큰 힘이 됐다. 영화를 홍보하는 인터뷰 중에 ‘도전’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돋보였던 적은 <카트>가 유일했던 것 같다.

장산범 (2017)

<장화, 홍련>의 은주 역으로 배우 커리어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지만, 염정아의 새 공포영화를 만나기까지 14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고 싶은 작품이 없었을 뿐, 같은 장르를 부러 꺼린 건 아니었다. <장산범>은 섬뜩한 이미지나 파격적인 반전보다는 평범한 여성의 심리에 집중한 영화다. 두 자녀를 둔 엄마로서 아이를 잃어버린 주인공 희연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인물이었던 게 사실이었지만, 염정아는 공포와 모성애 사이를 버티고 선 <장산범>의 길잡이를 톡톡히 소화했다.

완벽한 타인 (2018)

퇴근길에 달을 보고 시 구절을 읊는 수현은 순종적인 아내다. 극중 부부 가운데 유일하게 남편 태수(유해진)에게 존대를 쓰고, 그의 가부장적인 태도에도 평화로운 성정을 놓지 않는다. 물론 영화 속 모든 인물들처럼 수현 역시 서서히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남편이 게이일지 모른다는 정황을 알게 되자 마시던 와인잔이 깨져 손에 피가 흘러도 아랑곳 않고 성을 낸다. 자기가 품은 비밀이 드러날 땐 별 흔들림이 없다. 부끄럽지 않아서. 가족에게 해가 되지 않을 만큼 자신을 돌봤을 뿐이라서. 그래서 더 큰 비밀도 스스로 고백할 수 있었다.

뺑반 (2019)

오랜만에 만난다. 숏컷의 염정아를.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가 아닌 염정아를. <뺑반> 속 윤지현은 뺑소니반을 이끄는 듬직한 수장이지만,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려 든다. 싸늘한 낯빛과 말투를 유지하면서도 들끓는 의지가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SKY 캐슬>의 미향에 이어, 나쁜 것을 향해 돌진해버리는 이의 얼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미성년 (2019)

영주는 남편(김윤석)의 외도를 알고 있다. 윤아(박세진)가 주리(김혜준)의 휴대폰으로 말하기 전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촉이 좋은 사람이니까. 다만 평정을 유지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주리에게 도시락을 건네줄 때 신발을 신는 것조차 잊고, 알면서 빤히 속을 긁는 미희(김소진)의 도발에 결국 폭력을 행사하고 만다. 17살 여자 애들이 품는 생명에 대한 예의조차 챙기지 못하는 영주 또한 미성년일 따름이다. 염정아는 어른의 성숙과 미숙을 서로 다르지 않은 표정과 제스처로 완벽하게 포착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된 새로운 전성기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명연이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