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찐 인생 영화 ‘비포’ 시리즈와 유럽 여행

※스포일러 주의!

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로 향하는 기차 안, 한 독일 부부가 큰 소리로 싸우고 있다. 옆자리에서 책을 읽던 소르본 대학의 재학생 셀린느(줄리 델피)는 계속되는 둘의 언쟁에 자리를 뜨고, 옮긴 자리에서 미국인 제시(에단 호크)를 만난다. 다음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제시는 떠나기 전 하루 동안 비엔나에 머물기로 하는데, 셀린느에게 같이 내리자고 제안한다. 잠시 고민하던 셀린느는 제시의 설득에 못 이겨 내리고, 둘은 역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자에게 관광지를 몇 군데 추천받는다.

두 사람의 첫 목적지는 한 레코드 샵(Teuchtler Schallplattenhandlung u. Antiquariat).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에 보는 사람이 다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여담으로 그 부스는 영화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촬영이 끝난 후 철거되었다고. 이후 두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은 무명용사의 묘(Friedhof der Namenlosen)이다. 셀린느가 10대 때 와 본 적 있다는 이곳은 보트 사고나 강에 투신한 사람들 등 이름 그대로 무명의 죽은 사람들이 묻힌 곳으로, 셀린느의 어릴 적 경험을 제시와 공유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해가 지자 둘은 앞에서 만난 남자들이 말해준 프라터(Prater)에 간다. 프라터는 비엔나 시내에 위치한 놀이공원으로, 두 사람은 대관람차에 타 도시에 내려앉은 아름다운 노을을 내려다보며 키스를 나눈다. 공원에서 나와 다뉴브 강변을 걷던 두 사람은 손금을 봐주는 할머니, 랜덤한 단어로 시를 써주는 시인, 출산 춤을 추는 여인 등 비엔나 밤거리를 가득 채우는 다양한 예술인들을 만난다.

제시와 셀린느는 거리를 배회하다 카페(Café Sperl)에 들어간다. 자리에 앉은 둘은 각각 프랑스와 미국에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 전화하는 척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다. '꿈속에 들어와 있는 듯'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와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Wiener Staatsoper)로 향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야경을 뒤로하고, 와인 한 병과 함께 한 공원에서의 첫날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6개월 후를 약속하고 헤어진다.

“6개월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며 헤어진 비엔나 기차역. 두 사람의 재회가 이루어진 건 6개월 후도, 비엔나도 아니었다.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파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떨어져 있는 동안 제시는 셀린느와의 이야기를 책으로 썼고, 그 책의 낭독회가 열린 파리의 한 서점에서 만나게 된다. 감독에 말에 따르면 “셀린느가 사는 곳이 파리인 만큼 영화의 배경은 파리가 되어야 했다”고. 하지만 여행객들이 바라보는 관광지 파리가 아닌 일상 속의 파리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 감독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감독의 생각 때문에 영화 속에는 파리의 유명 관광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공간이자 중요한 장소는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Shakespeare and Co.)이다. 제시가 셀린느와의 만남을 써낸 책의 낭독회가 열린 곳임과 동시에 두 사람이 9년 만에 마주하게 된 곳이다. 제시는 셀린느를 찾기 위해 책을 썼고 셀린느는 제시의 낭독회가 있을 걸 알고 그 서점을 찾아갔으니, 어쩌면 두 사람의 재회는 필연적이었던 것.

둘은 9년 전 어긋나버린 약속에 대해 이야기하고 회포를 풀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비엔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시한부 만남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느가 기차를 타고 파리로 떠났다면 이번엔 제시의 차례. 뉴욕행 비행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85분. 두 사람은 프롬나드 플랑테 공원(Promenade plantée)을 거닐고, 셀린느가 잘 가는 곳이 있다며 데려간 르 퓨르 카페(Le Pure Cafe Paris)에 가 커피를 마시고, 유람선을 타고 센 강을 가로지르며 9년의 시간을 메워간다. 

유람선 위에서 셀린느는 파리가 얼마나 근사했는지 새삼 깨달았다며 이야기하고, 제시는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해 털어놓는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다시 만날 방법이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다시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만큼 제시의 비행시간도 코앞에 다가온다. 또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파리의 골목골목을 지나 제시는 셀린느의 집에 가고, 그곳에서 그녀의 진심이 담긴 노래를 듣는다.

<비포 선셋>으로부터 또 정확히 9년이 흘러 이젠 40대가 된 제시와 셀린느. 제시는 이혼 후 셀린느와 재혼을 했고 둘 사이에는 쌍둥이 딸 니나와 엘라가 있다. 두 사람은 여전히 현실 고증 완벽히 된 중년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3부작의 마지막 <비포 미드나잇>의 배경은 바로 그리스의 아름다운 해변 마을 카르다밀리다. 낭만의 도시 비엔나와 사랑의 도시 파리를 거쳐, 이젠 안정된 그들의 관계처럼 평온하고 잔잔한 작은 마을이다. 

<비포 선셋>에서 책을 낸 이후 이젠 유명 작가가 된 제시. 그와 가족들은 그리스 남부의 도시 펠로폰네소스에 머물고 있다. 영화는 그리스에서 보내는 6주 동안의 시간 중 마지막 하루를 조명한다. 제시와 셀린느는 아이들과 함께 고대 유적지들과 지중해에 둘러싸인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메시니아 카르다밀리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지난 시리즈가 그러했듯 딱히 관광 명소가 등장하진 않는데, <비포 미드나잇>은 더욱 그렇다. 러닝타임 내내 나오는 장소는 공항, 레지던시, 산책로, 호텔, 식당이 전부다. 

지난 18년간 찰나의 일출과 일몰을 겪은 둘에게 남은 것은 길고 긴 밤이다. 바닷가의 한 식당 테이블에 앉아 산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던 제시와 셀린느. 영원히 타오를 것 같던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서로에 대한 사랑만을 말하기도 바빴던 전과 달리 이젠 대화의 절반 이상이 언쟁이다. 덕분에 더욱 현실감 있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다투고, 화해하고, 하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는 두 사람의 얼굴이 꼭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리스의 모습과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