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일본 영화라면 믿고 보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의 여러 영화들은 국내에서 심심치 않게 리메이크되었고, 여름마다 찾아오던 공포영화는 일본발이 가장 소구력이 강했다. 지브리 스튜디오를 필두로 한 작품들을 비롯해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인기가 높지만, 더 이상 일본 영화는 크게 매력적인 구석이 없다. 문제는 국내 영화시장에서의 일본 영화뿐만이 아니라 일본 영화 시장 자체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아시아 대표 영화 강국으로 불리며 흥했던 일본의 영화, 언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 원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일본 영화의 태동과 황금기
일본이 잊을 수 없는, 가장 빛났던 그 시절
(왼쪽부터) <라쇼묭>, <러브레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1890년대 후반 일본에 영화가 처음 들어오고 1898년 최초의 일본 자국 영화가 제작되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신문물의 상징과도 같았고, 지식인들의 관심을 크게 받았다. 1920년대에는 영화가 대중예술로 자리를 잡고 발전하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로도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며 1958년경 정점을 찍는다. 당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덕분에 일본 영화는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게 된다. 그 기세를 이어 1950~60년대 일본은 아카데미 시상식, 칸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등 유수의 국제적인 시상식 및 영화제를 휩쓸며 크게 활약한다.
 
이러한 황금기를 거쳐 텔레비전이 보급되며 주춤한 시기가 있었으나 야쿠자 영화, 핑크 영화, 오락 영화 등을 통해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또한 일본만의 독자적인 애니메이션인 재패니메이션을 양산해 마니아층을 두텁게 만들며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발돋움한다. 국내 영화 시장 주류의 중심에도 역시 일본 영화가 있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러브레터>, <기쿠지로의 여름>, <공각기동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한 장르에 국한된 것이 아닌 다양한 장르의 일본 영화들이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이는 2000년대 중반까지의 이야기다.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한 일본은 아직 그 시절에 멈춰있다.

라쇼몽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출연 미후네 도시로, 쿄 마치코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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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레터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나카야마 미호

개봉 1999.11.20. / 2020.12.23.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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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지로의 여름

감독 기타노 다케시

출연 기타노 다케시, 세키구치 유스케

개봉 200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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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감독 이누도 잇신

출연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아라이 히로후미, 우에노 주리

개봉 2004.10.29. / 2016.03.17.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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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영화 시장
빛을 잃은 지 오래된 일본 영화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바람의 검심 최종장 더 파이널>

오늘날 일본 영화 시장에는 두드러지는 특징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실사 영화보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강세라는 것. 역대 일본 영화 흥행 기록을 보면 더 놀랍다. 지난해 말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치고 역대 흥행 영화 1위로 올라섰고, 이 두 편을 포함해 역대 일본 흥행수입이 가장 높은 10개의 작품 중 6편이 애니메이션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오리지널 각본의 영화 비중이 높지 않다는 것인데, 역대 일본 흥행 영화 리스트에서 위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 남은 4편 중 3편이 외화, 나머지 한 편은 TV 드라마의 극장판이다. 일본에서 역대 흥행한 10개의 영화들 중 오리지널 각본의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최근 일본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만 봐도, 1위가 만화를 원작으로 한 <바람의 검심 최종장 더 파이널>이며 개봉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명탐정 코난: 비색의 탄환>이 여전히 순위권에 있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감독 소토자키 하루오

출연 하나에 나츠키, 키토 아카리

개봉 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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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준비중
바람의 검심 최종장 더 파이널

감독 오오토모 케이시

출연 타케이 에미, 아라타 마켄유, 아오키 무네타카, 아오이 유우, 사토 타케루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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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엔드게임>

또 하나 일본 영화 시장만이 가진 독특한 지점은 슈퍼 히어로 영화가 살아남기 힘든 시장이라는 것이다. MCUDC 등을 필두로 미국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슈퍼 히어로 영화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점, 일본은 슈퍼 히어로 영화의 무덤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슈퍼 히어로 영화의 흥행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는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개봉 당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으나, 유일하게 일본에서만 <명탐정 코난: 감청의 권>1위를 지키고 있었다. 슈퍼히어로 영화 참패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본 영화계에 팽배한 갈라파고스 신드롬이 한몫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표준만 고집하며 세계 시장에서 스스로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감독 안소니 루소, 조 루소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에반스, 크리스 헴스워스, 마크 러팔로, 스칼릿 조핸슨, 제레미 레너, 돈 치들, 폴 러드, 브리 라슨, 카렌 길런, 브래들리 쿠퍼, 조슈 브롤린

개봉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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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점 하나,
상식 밖의 독과점 행태

일본에는 3대 영화 제작사가 있다. 도에이, 쇼치쿠, 도호가 바로 그것. 그중 특히 도호는 일본 최대의 영화 그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배급 시장뿐 아니라 수입, 투자, 제작, 상영까지 독식하며 자사가 제작한 영화들을 자사가 배급하고 자사의 영화관에 상영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투자자들, 즉 제작위원회 또한 큰 문제다. 영화 제작에 큰 관여를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제작위원회는 안정적인 기대 수익을 바라며 흥행 가능성이 있는 영화에만 투자하는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유명 소설 혹은 TV 시리즈, 인기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나 애니메이션 원작의 실사 영화 등 검증된 작품들만을 제작한다. 이러한 체계는 새로운 시도를 가로막는 큰 벽이 되어 일본 영화 시장의 발전을 방해한다

문제점 둘,
영화인이 살아남기 어려운 생태계

일본은 영화 수입의 절반이 극장에게, 남은 절반의 40%는 제작위원회, 10%는 배급사에게 돌아간다. 감독, 배우, 스태프 등 영화에 참여한 이들에게 나눠지는 수익은 없는 것이다. 흥행에 대한 책임은 감독에게 묻고 감독을 홀대하는 데 비해 수익은 모두 극장과 투자자, 배급사가 가져가는 구조에 환멸을 느껴 감독직을 내려놓거나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영화인들도 많은 추세라고. 비단 감독뿐 아니라 배우의 상황도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다. 영화 출연만으로는 생계유지가 힘들어 겸업을 하고 있는 배우들이 왕왕 있는 이유도 불평등한 수익 분배에서 온다. 이러한 구조이다 보니 신진 감독 배출은 물론 좋은 질의 작품 제작 자체가 힘든 상황이다.

문제점 셋,
일반 관객들의 외면

어쩌면 자국 영화에 대한 일본 관객들의 외면은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황금기의 영광을 잊지 못한 채 그 안에서 고립되어 버린 일본 영화는 발전은 고사하고 점차 퇴보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오리지널 각본을 가진 작품들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며, 관객들 또한 재미가 보장된 확실한 작품들만 보고 싶어 하고, 제작위원회는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만든다. 이러한 굴레를 벗어던지지 않는다면 일본 영화 시장은 지금보다도 더 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지도 모를 일. 2018년 개봉해 이례적으로 흥행몰이를 한 독립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와 같은 작품이 더 많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제작위원회와 관객 모두의 달라진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감독 우에다 신이치로

출연 하마츠 타카유키, 슈하마 하루미, 마오, 아키야마 유즈키, 나가야 카즈아키

개봉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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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기자 B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