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 베일은 팔색조다. 출연하는 작품에 따라 몸무게는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분장을 하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뛰어난 메소드(Method) 연기의 장인으로 만들었을까. 지난해 4월 <아메리칸 사이코>(네이버 영화에는 <아메리칸 싸이코>로 표기하고 있으나 개봉 당시 <아메리칸 사이코>였기에 이에 따른다.) 개봉 20주년에 맞춰 ‘벌처’(Vulture)가 보도한 기사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그가 출연한 37편의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에 대한 순위를 매긴 기사다. 이 가운데 베스트 10만 추려봤다. 당신이 생각하는 작품이 몇 위인지 확인해보자. 전체 리스트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위 <샤프트>(2000)
<샤프트>는 리메이크 영화다. 1971년 고든 파크스 감독의 <샤프트>가 5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제작됐다. 흑인 형사를 내세운 이 영화의 장르를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이라고 부른다. <샤프트>는 13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내면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대표작이 됐다. 그래서, <샤프트>의 주인공은 사무엘 L. 잭슨이다. 그가 흑인 형사 샤프트를 연기했다. 크리스찬 베일은 영웅의 반쪽, 악당을 연기했다. 부유한 부동산 사업가 집안의 인종차별주의자 월터 웨이드 주니어가 그가 연기한 캐릭터다. ‘벌처’는 평단과 대중이 외면한 이 영화 속 베일의 캐릭터에서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만과 <다크나이트> 3부작의 브루스 웨인의 흔적을 발견했다.

- 샤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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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팀 스토리
출연 사무엘 L. 잭슨, 제시 어셔, 레지나 홀
개봉 미개봉
9위 <프레스티지>(2006)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연출의 <프레스티지>는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나이트> 사이에 개봉한 영화다. <배트맨 비긴즈>는 성공했고, <다크나이트>는 영화 역사에 남을 걸작이 됐다. 그렇다면 <프레스티지>는? 1900년대 말 런던, 휴 잭맨이 연기한 로버트 앤지어와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알프레드 보든은 경쟁 관계에 있는 마술사다. 앤지어는 보든의 순간 이동 마술의 비밀을 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 비밀이 풀리는 순간,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는 크게 빛난다. 그런 의미에서 놀란 감독과 베일의 합작품 <프레스티지>를 결코 가볍게 볼 작품이 아니다.

- 프레스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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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휴 잭맨, 크리스찬 베일, 마이클 케인, 스칼릿 조핸슨
개봉 2006.11.02.
8위 <머시니스트>(2004)
약 28kg의 감량. <머시니스트>는 위에 소개한 스틸 사진만으로 크리스찬 베일의 놀라운 연기 변신을 짐작하게 만드는 영화다. 베일은 좀 더 체중을 줄이려고 했지만 제작진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베일이 연기한 기계공 트레버 레즈닉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점점 체중이 줄어드는 캐릭터다. 줄어든 자신의 몸무게를 종이에 써서 냉장고에 붙여 놓는다. <머시니스트>의 레즈닉은 베일의 집념이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머시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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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브래드 앤더슨
출연 크리스찬 베일, 제니퍼 제이슨 리, 아이타나 산체스 지욘, 존 샤리언
개봉 2005.04.09.
7위 <태양의 제국>(1987)
아역 배우 크리스찬 베일을 볼 수 있는 <태양의 제국>. SF 작가 제임스 G. 발라드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12살의 베일을 캐스팅했다. 12살의 베일이라니. 지금 보면 꽤나 낯선 모습이지만 <태양의 제국>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베일의 거의 모든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태양의 제국>은 베일의 필모그래피에 중요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베일은 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수용소에 머물게 되는 영국인 소년 짐을 연기했다. 관객은 전투기 파일럿을 동경하는 어린 짐의 눈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경험한다.

- 태양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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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크리스찬 베일
개봉 1989.07.08.
6위 <포드 V 페라리>(2019)
집념의 사나이. <포드 V 페라리>의 켄 마일스를 그렇게 불러도 되겠다. 고집 센 자동차 정비사이자 드라이버인 켄 마일스는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했기에 더 집념의 사나이처럼 보인다. 심지어 집념과 베일이 마치 동의어처럼 느껴진다. 고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은 베일이 연기한 마일스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포드 V 페라리>에서 베일은 처음으로 고향인 영국 웨일스의 억양으로 연기를 했다고 한다. 베일이 아버지를 연기한 몇 안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 포드 V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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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제임스 맨골드
출연 크리스찬 베일, 맷 데이먼
개봉 2019.12.04.
5위 <아메리칸 허슬>(2013)
<머시니스트>를 본 뒤 <아메리칸 허슬>을 본다면 극과 극의 크리스찬 베일을 볼 수 있다. <아메리칸 허슬>의 베일은 <머시니스트>의 캐릭터와 정반대의 뚱뚱한 체격을 갖고 있다. 순간 베일이 맞나 의심이 들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와 같은 효과를 관객에게 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아메리칸 허슬>의 첫 장면에서 베일이 연기한 사기꾼 어빙 로젠펠드의 불룩한 배를 공들여서 보여준다. 이어서 듬성듬성한 머리칼을 정성스럽게 빗는 모습도 꼼꼼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은 배트맨을 연기한 익숙한 베일에 대한 이미지를 버리고 1970~80년대에 이뤄진 미국 FBI의 앱스캠(Abscam) 작전이 모티브가 된 <아메리칸 허슬>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 아메리칸 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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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데이비드 O. 러셀
출연 제레미 레너, 에이미 아담스, 브래들리 쿠퍼, 크리스찬 베일, 제니퍼 로렌스
개봉 2014.02.20.
4위 <빅쇼트>(2015)
“드럼 좀 쳐보셨어요?”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지난해부터 뜨거운 주식시장으로 인해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빅쇼트>의 마이클 버리라는 인물도 덩달아 재조명된 듯하다. <빅쇼트>는 2008년 일어난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를 다룬 영화다. 실존 인물인 헤지펀드 매니저 마이클 버리는 부실한 부동산 담보 대출 채권으로 만들어진 온갖 파생 상품이 문제가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부동산 시장이 무너지고 결국 미국 경제 전체가 붕괴할 것을 예측했다. 그렇게 그는 투자자들의 돈을 모두 주가 하락에 베팅했다. 이른바 쇼트(Short, 국내에선 인버스(Inverse)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투자에 ‘몰빵’한 것이다. 기다리는 경제 붕괴는 좀처럼 오지 않고 그동안 버리의 투자자들과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 떠난다. 천재지만 사교성은 전혀 없어 보이는 그는 홀로 남아 메탈록 음악을 듣고, 드럼을 두드리며 자신의 투자 판단을 고수하려고 노력한다. 인버스 투자를 해본 사람이라면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 빅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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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아담 맥케이
출연 브래드 피트, 크리스찬 베일, 라이언 고슬링, 스티브 카렐
개봉 2016.01.21.
3위 <파이터>(2010)
<파이터>의 엔딩 크레딧은 크리스찬 베일은 연기를 평가하기 위해 꼭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여기서 밝히지 않기로 하자. <파이터>는 라이트 웰터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미키 워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베일은 미키(마크 월버그)의 형 디키를 연기했다. 디키 역시 한때는 잘나가던 권투 선수였지만 지금은 마약 중독에 빠진 트러블 메이커다. 디키는 미키의 전담 트레이너지만 관객들은 그가 동생을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마디로 징글징글한 형이다. 베일의 그 징그러운 연기 덕분에 이 영화가 권투 영화인지 아닌지 고민하게 만들 정도다.

-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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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데이비드 O. 러셀
출연 마크 월버그, 크리스찬 베일
개봉 2011.03.10.
2위 <다크 나이트> 3부작(2005, 2008, 2012)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배트맨이 2위? 1위가 아니어서 놀랍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고 반대로 순위가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벌처’의 기사는 순위가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을 늘어놓았다. 순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브루스 웨인을 영국인이 연기할 권리가 없으며, 베일이 연기한 배트맨의 목소리가 이상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히스 레저에 비해 별로 한 거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의견을 달아보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얘들이나 보던 슈퍼히어로 영화를 성인용으로 바꾼 장본인이고 그와 함께 한 베일의 브루스 웨인/배트맨이야말로 진정한 영웅 그 자체였다.

- 배트맨 비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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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마이클 케인, 리암 니슨, 케이티 홈즈, 게리 올드만, 킬리언 머피, 톰 윌킨슨, 룻거 하우어, 와타나베 켄, 마크 분 주니어, 라이너스 로체, 모건 프리먼
개봉 2005.06.24. 2020.06.24. 재개봉

- 다크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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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아론 에크하트
개봉 2008.08.06. 2020.07.01. 재개봉

- 다크 나이트 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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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조셉 고든 레빗, 게리 올드만, 앤 해서웨이, 톰 하디, 마리옹 꼬띠아르, 마이클 케인, 모건 프리먼
개봉 2012.07.19. 2020.07.08. 재개봉
1위 <아메리칸 사이코>(2000)
트럼프 전 대통령의 딸인 트럼프 이방카가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을 보고 이상적인 남자라고 했다는 것이 사실일까. 이것이 사실이라는 전제로, ‘벌처’는 이방카의 발언이야말로 베일의 ‘사이코’ 연기가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아마도 유유상종이라는 의미의 농담일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방카가 옳다고 하는데 그건 베일의 연기가 너무나도 완벽하기 때문이다. 베일이 연기한 베이트만은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미국에서 만들어진 괴물이 어떤 모습인지 똑똑히 보여준다. 성공을 향한 병적인 자기관리와 탐욕의 끝에 베일이 연기한 베이트만이 있다.

- 아메리칸 싸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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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메리 해론
출연 크리스찬 베일, 윌렘 대포, 자레드 레토, 조쉬 루카스, 사만다 마티스, 맷 로스, 빌 세이지, 클로에 세비니, 카라 세이무어, 저스틴 서룩스, 기네비어 터너, 리즈 위더스푼
개봉 2000.11.25.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