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현실이 되고,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 또 한 편의 재난 영화가 스크린에 찾아왔다. 지하 500m 싱크홀 속으로 떨어진 이들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 <싱크홀>이 바로 그것. 도심 속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어내는 싱크홀은 최근 몇 년 우리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재난으로 떠올랐다. 국토교통부에서는 밝힌 바에 따르면 국내에서 연평균 무려 900건의 크고 작은 싱크홀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국내에서 이를 다룬 작품은 처음인지라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영화 <싱크홀>은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천재지변 또는 사건·사고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낸 한국형 재난 영화의 연장에 있는 작품이다. 영화 개봉을 맞아, 미래를 내다본 듯 현재와 꼭 닮은 모습을 그린 작품부터 언젠가 현실이 될까 두려운 작품까지 극 현실주의 재난을 다룬 영화들을 모아보았다.

싱크홀

<싱크홀>

서울에 내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온 동원(김성균)과 같은 빌라 거주민 만수(차승원), 그리고 동원의 집들이에 온 김대리(이광수)와 인턴사원 은주(김혜준). 평소와 다름없던 하루 네 사람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린다. 순식간에 빌라 전체가 땅속으로 꺼지며 지하 500m 싱크홀 속으로 떨어지게 된 것. 한순간에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 놓이게 된 네 사람은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분투한다.

싱크홀은 비단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현재진행형인 재난이다. <싱크홀>은 이를 소재로 삼아 생활 밀착형 재난의 얼굴을 보여주는데, 재난 영화라고 해서 시종 어둡고 심각한 면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차승원, 김성균, 이광수 등 코믹 연기 내공이 탄탄한 배우들을 통해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유쾌한 케미를 제대로 살려내 웃음을 자아내기 때문. 여기에 초대형 싱크홀을 시각적으로 실감나게 구현해내며 관람이 아닌 체험의 경지를 선사한다.

화산 폭발

<백두산>

약 천 년간 잠들어있던 백두산이 폭발하고, 남과 북을 모두 덮칠 추가 폭발이 예측되며 한반도는 아비규환에 빠진다. 백두산 폭발을 연구해 온 지질학 교수 강봉래(마동석)의 이론에 따라 마지막 폭발을 막기 위한 작전이 수립되고, 특전사 EOD 대위 조인창(하정우)과 북한 무력부 소속 일급 자원 리준평(이병헌)은 이 비밀 작전에 투입된다.

<백두산>은 재난 하나만을 앞세우는 영화가 아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백두산 폭발이라는 재난 상황을 소재로 남북 관계를 다루며, 그 안에서 협력하고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얼굴을 담는다. 스토리 자체는 쉽게 예측이 가능해 진부하다는 평이 많았으나, 백두산 폭발을 스크린에 구현해낸 특수효과 하나만큼은 호평을 받았다.

유독 가스 누출

<엑시트>

대학 졸업 후 몇 년째 취준생으로 지내던 용남(조정석)은 어머니 칠순 잔치에서 연회장 직원으로 취업한 산악 동아리 후배 의주(윤아)를 만난다. 시간이 지나 파티가 무르익었을 즈음 의문의 연기가 빌딩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순식간에 도심 전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유독가스로 뒤덮이게 된다. 용남과 의주는 가족들과 빌딩에서 탈출하기 위해 산악 동아리 시절 스킬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엑시트>는 기존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재난 영화들과 확연히 다르다. 코미디와 풍자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 유쾌하게 즐기도록 했고, 평범한 소시민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해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형 쓰레기봉투, 지하철 비치 방독면, 고무장갑 등의 소품을 활용하는 기발함을 보이며 볼거리를 선사하기도. 여담으로 영화를 연출한 이상근 감독이 국내에서는 생소한 가스 테러 재난을 소재로 택한 데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과 마주한 젊은이들이 역경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관객들이 함께 체험하고 응원하길 바라서였다고.

원자력 발전소 폭발

<판도라>

시골 마을 월촌리의 어느 하루, 역대 최대 규모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고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다. 정부는 언론과 시민에게 이 사태를 감추기에 급급하고, 이에 주민들의 대피가 늦어지며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 방사능이 유출되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원자력발전소장 평섭(정진영)과 직원 재혁(김남길), 길섭(김대명)을 비롯한 직원들은 2차 폭발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한다.

한반도에 강진이 자주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인 것도 아니다. 마침 영화가 개봉하던 당시 경주와 포항 등지에는 여러 차례 강한 지진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영화는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판도라>는 국내에서 최초로 원전을 소재로 한 재난 영화로, CG 작업을 통해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사실적으로 구현해내며 꽤 괜찮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대형 터널 붕괴

<터널>

자동차 영업대리점의 과장 정수(하정우)는 집으로 가기 위해 터널을 지나던 중 예고없이 터널이 무너져 내리며 그 안에 홀로 갇혀 버리게 된다. 가진 것은 배터리 78%의 휴대폰과 생수 두 병, 딸의 생일 케이크뿐. 대형 터널 붕괴 사고 소식에 정부는 사고 대책반을 꾸리지만 구조에는 진전이 없고, 정수는 터널 안에 고립되어 기약 없는 구조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터널>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던 이유는 두 가지다. 영화의 주인공이 보통의 직장인이자 평범한 가장이었다는 점, 그리고 출퇴근 길 매일 지나다니며 무너질 것이라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던 터널의 붕괴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터널 붕괴 재난이 우리가 일상에서 언제든지 맞닥뜨릴 수 있는 현실임을 상기시켰다. 또 비단 재난 상황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터널 밖의 이야기를 그리며 더욱 리얼한 현실을 꼬집기까지 했다.

호흡기 바이러스

<감기>

유례없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덮쳤다. 호흡기로 감염되는 이 바이러스의 감염속도는 초당 3.4, 치사율은 무려 100%. 정부는 전 세계적인 확산을 막기 위해 국가 재난 사태를 선포하고, 도시를 폐쇄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다. 조치를 취할 틈도 없이 일 순간 격리되어버린 사람들은 일대 혼돈에 휩싸이고, 구조대원 지구(장혁)와 감염내과 전문의 인해(수애), 그녀의 딸 미르(박민하)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개봉 당시엔 크게 흥행하지 않았던 이 영화는 2020년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듯 지난해 발생한 코로나19와 영화 속 호흡기 바이러스의 양상이 몹시 비슷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일상에 우리와 늘 공존하는 감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해, 치명적 재난 상황 안에서 공포에 맞서며 변모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초고층 빌딩 화재

<타워>

주상복합빌딩 타워스카이의 시설관리 팀장 대호(김상경)와 타워스카이 푸드몰의 매니저 윤희(손예진), 그리고 여의도 소방서의 소방대장 영기(설경구)는 각기 자신들만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꿈꾸며 계획한다. 모두가 희망에 부풀어 있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파티가 열리고 있던 타워스카이에서 갑작스러운 화재가 발생하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화마와 사투를 벌인다.

<타워><싱크홀>을 연출한 김지훈 감독의 전작이다. 영화는 108층 초고층 주상복합빌딩 화재 사고와 이를 진압하려는 소방대원들의 분투를 담았는데, 화재뿐 아니라 2차적 재난인 붕괴와 폭렬 현상, 수조탱크 폭발까지 화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재난 상황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해냈다.

초대형 쓰나미

<해운대>

대한민국의 대표 휴양지인 부산 해운대에 쓰나미가 몰려온다. 국제해양연구소의 지질학자 김휘(박중훈) 박사는 한국도 쓰나미에 안전하지 않다고 수차례 강조하지만, 재난 방재청은 그의 경고를 무시해버린다. 그 시각 일본 대마도가 내려앉으며 초대형 쓰나미가 생성되고, 시속 800km의 무서운 속도로 해운대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한다.

2009년 개봉한 <해운대>는 당시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공식을 가져와 한국화시킨, ‘힌국형 재난 영화의 시작이 되는 작품이다. 기존 할리우드 재난 영화가 외적인 볼거리를 내세웠다면 <해운대>는 메가 쓰나미로 인해 극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드라마를 부각시키며, 재난 그 자체보다 사람들 사이의 스토리를 더 강조했다. 하지만 쓰나미를 표현한 CG부터 컨테이너가 추락하는 장면, 쓰나미가 몰아친 해운대 시장통 거리 등 현실감 넘치는 특수효과를 통해 볼거리 또한 놓치지 않았고, 그 결과 재난과 드라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한다.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B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