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서비스(Over-the-top media service) 시장이 더없이 확장되면서 플랫폼의 오리지널 콘텐츠 공세도 점점 거세지고 있다. 이 와중 최근 조용하게 승전고를 울린 플랫폼이 있었으니 아마존에서 서비스하는 프라임 비디오다. 프라임 비디오는 폭넓은 콘텐츠를 제공하는 아마존의 위신과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멋진 징조들>, <더 보이즈> 등 오리지널 작품을 등에 업어 2억 명 이상의 시청자를 보유했지만, 아시아권에선 그렇게까지 힘쓰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8월 13일, 한 작품의 론칭으로 프라임 비디오가 아시아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됐다. 9년 만에 돌아온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최종편 <에반게리온:3.0+1.01>(이하 <다카포>) 덕분이다.
기나긴 공백기 끝에 막을 내린 에반게리온
전작 <에반게리온: Q>가 공개된 2012년(국내는 2013년)만 하더라도, <에반게리온>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수식어는 '설명이 필요 없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2021년엔 이 제목조차 조금 낯선 사람이 더 많아졌을 것 같으니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다.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SF 메카닉물과 아포칼립스적 세계를 결합한 작품으로 1995년 방영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의 설립자 중 한 명이자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가 감독을 맡아 종말을 앞둔 세계 속 자기 파괴적인 소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정의롭거나 우수한 주인공, 둔탁하고 묵직한 느낌의 메카닉, 세계를 구하는 영웅의 일화 등 일반적인 메카닉물을 완전히 반전시켜 심리적으로 불안한 주인공, 기괴하다 못해 심지어 피를 흘리는 메카닉, 매 순간 목숨을 건 치열한 생존담으로 결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5년 TV 애니메이션과 1997년 극장판 두 편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안노 히데아키는 가이낙스에서 독립하고 스튜디오 카라를 설립한 후 '에반게리온 리빌드 프로젝트'로 4편을 더 제작하겠다 밝혔다. 그리고 2007년 <에반게리온: 서>, 2009년 <에반게리온: 파>, 2012년 <에반게리온: Q>를 공개했다. 3편이 막무가내로 끝난 탓에 관객들은 4편을 기다렸지만, 마지막 편을 남기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2020년 6월 개봉을 예고한 마지막 편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무기한 개봉 연기를 선택했었다. 그리고 결국 2021년 3월 8일에야 일본에서만 개봉했다. 마지막 편 <다카포>는 공개 이후 팬덤에서도 평가가 분분했으나, 결과적으로 102억 엔 수익을 기록했다. 역대 일본 박스오피스 100억을 돌파한 12번째 작품이 됐다.
왜 프라임 비디오여야 했을까
그리고 7월, 프라임 비디오는 <다카포>를 8월 13일에 글로벌 론칭한다고 밝혔다. 프라임 비디오에 따르면 <다카포>는 240개국에 동시 공개되며 28개 언어 자막과 10개국어 더빙을 제공한다고. 또한 <다카포>의 론칭과 함께 기존에 개봉한 '신극장판' 시리즈 3편 모두 함께 공개했다.
프라임 비디오는 왜 <다카포> 글로벌 론칭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에반게리온 제작진은 왜 (TV 애니메이션을 서비스 중인 넷플릭스가 아닌) 프라임 비디오를 선택했을까. 안노 히데아키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가능한 한 빨리 해외 팬들에게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프라임 비디오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추측건대 현재 전 세계 서비스 중인 OTT 플랫폼 넷플릭스와 프라임 비디오 중 프라임 비디오가 더 좋은 조건을 내걸었을 가능성이 크다. 보기 드물게 더빙까지 지원하는 현지화 작업 또한 그런 조건에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프라임 비디오는 왜 에반게리온과 손을 잡았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결국 인기 때문일 것이다. 프라임 비디오 주력 지역인 북미 또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오프라인 행사가 거의 없지만 그 직전 행사 사진만 찾아봐도 슈퍼히어로만큼 일본 만화 캐릭터도 자주 눈에 띈다. 북미 도서 판매량을 집계하는 '북스캔'의 통계에도 일본 만화의 판매 순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미 진작에 끝난 애니메이션이지만 현재 일본 만화에 친숙한 독자라면 한 번쯤 관심을 가졌을 수밖에 없다. 그 시절 TV 애니메이션 버전을 본 팬들이야 당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한마디로 <에반게리온>은 주력 시장인 북미에서도 여전히 이목을 끌기엔 충분하단 것이다.
물론 프라임 비디오가 주력 시장만 보고 했을 리는 없다. <다카포>를 가장 기대하고 주목하고 있는 곳은 어디겠는가. 일본, 그리고 아시아다. 90년대 아시아의 문화 아이콘이었던 <에반게리온>을 통해 프라임 비디오는 아시아 시장을 겨냥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프라임 비디오는 일본 서비스 론칭한 2015년 이래 <다카포>가 공개 당일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에서도 공개 직후 신극장판 4편이 나란히 인기 순위에 오르는 등 그동안 낯설기만 한 프라임 비디오를 보다 가깝게 만들었다. 물론 대다수는 무료체험 기간 동안 시리즈를 몰아보고 해지할 테지만, 그래도 '프라임 비디오'라는 낯선 플랫폼이 (아마존이 정식 진출하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이름이라도 알린 것은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프라임 비디오는 사용자만 약 2억 명에 달하는 톱클래스의 OTT 플랫폼이다. 한국에도 SK텔레콤과 손을 잡고 연중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 시점에서 프라임 비디오의 <다카포> 독점 공개는 한국에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수단이자 앞으로도 '더빙' 같은 적극적인 현지화의 맛보기 모두 성공을 거뒀다. 쏟아지는 오리지널 콘텐츠 전쟁 속에서 프라임 비디오의 전략은 단기간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이 관심이 앞으로 선보일 대규모 드라마 <반지의 제왕>까지만 이어진다면, 프라임 비디오는 한국 OTT 시장을 흔들어 새로운 지형을 짜낼지도 모르겠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