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선, 깊은 눈 그림자,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 악역 전문배우라는 이미지엔 유오성의 깊이를 모르는 인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유오성은 자신의 인상을 무기 삼아 때로는 주인공의 반대편에 서서, 때로는 주인공의 곁에서, 또 때로는 주인공이 되어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이 무려 30년째 걷고 있는 그이지만 여전히 그를 <친구>의 준석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본립도생, 근본이 굳건하게 서 있으면 살아갈 방법이 생긴다는 말이다. 배우는 연기를,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굳건히 자신의 길을 가는 유오성의 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황남기 

(왼쪽부터) 최진실, 임성민, 유오성
(왼쪽부터) 원작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1년 <러브 러브>에서 단역 달식 역을 맡으며 스크린에 데뷔한 그는 1994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비중 있는 조연 황남기 역을 맡으며 단숨에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다. 양귀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젠더 폭력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에도 굉장히 파격적이었던 작품이다. 여성폭력을 경험한 주인공 강민주(최진실)는 상징적인 복수를 하기로 결심하고, 심복과 같은 황남기(유오성)에게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였던 백승하(임성민)의 납치를 지시한다. 여성폭력의 전복을 위해 남성폭력을 선택한 민주를 받들며 수족처럼 움직이는 황남기 역을 맡은 유오성은 이 영화를 통해 제32회 대종상 신인남우상 후보에 올랐다. 데뷔 3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감독 장길수

출연 최진실, 임성민, 유오성

개봉 199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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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트> 태수 

(왼쪽부터) 유오성, 정우성
<비트>(1997)

21세기에도 <비트>는 남성들의 바이블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지포 라이터, 말보로 레드가 ‘남성미’의 상징이 된 것도 <비트>부터다. 유오성은 주인공 민(정우성)의 친구 태수로 거리를 헤매며 패싸움을 일삼는, 방황하는 청년들이었다. 태수는 어차피 공부로 성공할 순 없다며, 조직폭력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민은 다른 학교에서 학생의 신분을 이어가길 택한다. 그렇게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선택한 두 사람이지만, 결국엔 냉담한 현실 앞에서 익숙했던 폭력의 굴레로 돌아가게 된다. 청소년 관람불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방황하는 청년의 멋(!)을 알려준 영화였다. 실제로 민이 두 손을 놓고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레전드 장면을 따라 하려다가 사고가 나는 청년들도 있었다고. 

비트

감독 김성수

출연 정우성, 고소영

개봉 199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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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내일을 향해 쏴라> 강대호 

드라마 <내일을 향해 쏴라>(1998)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비트>로 눈도장을 찍은 유오성은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MBC 드라마 <내일을 향해 쏴라>에 주연으로 캐스팅 되었다. 당시 경쟁작이 <여명의 눈동자>(1991)와 <모래시계>(1995)를 제작한 김종학 감독과 송지나 작가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내일을 향해 쏴라>가 성공할 거라 예측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당초에는 당대 스타인 안재욱이 물망에 올랐으나 고사하여 신인이었던 유오성에게 넘어갔다고.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청년, 강대호가 밑바닥에서 성공하기까지, 그리고 좌절을 겪기까지의 과정을 가감 없이 연출한 <내일을 향해 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흥행에 성공했다. 신인 배우던 유오성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것도 바로 이 작품. 

내일을 향해 쏴라

연출 정인

출연 유오성, 박선영, 오연수, 홍기훈, 서유정, 강석우, 윤용현, 이종수

방송 1998,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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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무대포 

<주유소 습격사건>(1999)
저 표정으로 각목을 들었는데 안 무서울리가

드라마 <내일을 향해 쏴라>로 주연급 스타가 된 유오성은 <주유소 습격사건>으로 소위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도 다지게 된다. <주유소 습격사건>은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파격적인 웃음 코드로 국내 코미디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코미디 영화라면 어쭙잖은 감동 코드 말고, 진짜 ‘웃겨야 한다’는 장르의 정신을 제대로 실현했는데, 줄거리부터 남다르다. 어딘가 모자란 듯한 주인공들이 야심한 시각, 갑자기 편의점에서 라면 먹다 말고 주유소를 습격한다. 이유는 없다. 구태여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영화는 일단 움직이고 본다. 유오성은 험상궂은 얼굴로 매번 오해받는 단순무식한 인간, 무대포 역을 맡았는데, “전부 대가리 박아”, “난 한 놈만 패”라는 그 유명한 대사가 여기서 나왔다. 

주유소 습격사건

감독 김상진

출연 이성재, 유오성, 강성진, 유지태, 박영규

개봉 199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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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구> 준석 

<친구>(2001)
자동재생 되는 그 대사

<친구>는 ‘유오성 = 누아르’의 공식을 세운 대표적인 영화로,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던 유오성의 인기에 기름을 부은 작품이다. 유오성은 <친구>에서 조폭 두목 아들이자 친구 4인방의 실질적 리더인 준석 역을 맡았다. 의리파 상남자 캐릭터의 전형으로 으레 그렇듯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조직폭력배의 세계로 들어간다. 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 만큼, 유오성 역시 사투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원도 영월 출신인 그는 사투리 과외까지 받아 가며 열성적으로 연기에 임했고 그 결과 어색함 없이 부산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후 12년 만의 후속작, <친구 2>로 어른이 된 준석을 연기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고 만다. 마무리가 깔끔했던 <친구>에서 스토리를 억지로 더 늘리다 보니 줄거리가 다소 난잡하다는 게 주요 비판 요소였다. 

<친구2>(2013)
친구

감독 곽경택

출연 유오성, 장동건

개봉 200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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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2

감독 곽경택

출연 유오성, 주진모, 김우빈

개봉 20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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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 최장수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2006)

<친구>로 영화배우로서 자리를 잡은 그는 이후 <챔피언>(2002), <별>(2003), <도마 안중근>(2004)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지만, 모두 흥행에 실패하고 만다. <친구> 이후 영화배우로서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던 그는 정체기를 겪어야만 했고, 드라마로 눈을 돌리게 된다. 지금까지 조폭이나 건달, 깡패 역을 주로 맡으며 강한 인상을 주었던 그는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로 감성적인 연기에 도전하게 된다. 

그가 맡은 최장수는 사명감이 투철한 형사지만, 그만큼 가정에 소홀한 남자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되며 가족의 의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신파적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유오성의 열연은 이를 모두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껏 굵직하고 남성적인 연기만 해온 유오성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투명인간 최장수

연출 정해룡

출연 유오성, 채시라, 최여진, 안미나, 조연우

방송 2006, KB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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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길석 

<강릉>(2021)

<친구> 이후, 영화배우로서는 뚜렷한 성과가 없었던 유오성은 <투명인간 최장수>를 기점으로 드라마 촬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드라마 <장사의 신 - 객주 2015>(2015), <너도 인간이니?>(2018), <검은태양>(2021)에서 악역으로 강한 존재감을 남긴 그는 악역 전문 배우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미지 소비에 대한 불안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영상 작업이라는 게 허구고 픽션이지 않나. 배우는 그 허구와 픽션을 객관화시켜서 소개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이미지 고착에 부담은 없다.” 라고 답하며 뚝심을 보여준 유오성. 이제는 더 이상 영화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즈음, 그가 다시 <비트>, <친구>를 잇는 누아르 영화 <강릉>으로 돌아왔다. 

<강릉>은 강릉 최대 리조트 소유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중 유오성은 강릉 최대 조직의 우두머리 ‘길석’ 역을 맡았는데 조폭이지만 평화와 의리를 중요시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강릉>을 두고 “배우 인생의 기준점이 될 작품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처음 제안을 받았던 역할이 길석이 아니었음에도 감독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길석 역을 잡을 수 있었다. 데뷔 이래, 시나리오를 보고 ‘내가 잘 할 수 있다’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강릉

감독 윤영빈

출연 유오성, 장혁, 박성근, 오대환

개봉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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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