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영화에는 ‘연출’이 존재한다. 장소 이동 신도 단순하게 드라이브로만 넘어가지 않는다. 가장 재미없고 단순한 장면을, 재미있게 연출할 줄 안다. 그의 연출은 기민하고, 재빠르다. 빠르고 스타일리시한 연출은 패러디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렸고, 카 액션의 새로운 저변을 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최초로 호러 영화에 도전했다. 매번 새롭지만, 매번 에드가 라이트다운 영화를 선보이는 아이러니한 감독. 오늘은 그의 이상하고 매력적인 필모그래피를 살펴보고자 한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출연 사이먼 페그, 케이트 애쉬필드, 닉 프로스트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영화광이던 에드가 라이트는 14살 때부터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스무 살에 처음으로 장편 영화 <손가락 한 줌>(1995)을 완성한다. 하지만 굉장히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인 데다가 웨스턴 스타일의 풍자 영화였기 때문에 극장에서는 거의 상영하지 않고 위성 TV 채널 스카이 무비에서 잠시 방영된 것이 전부였다. 정식 개봉도 하지 않은 작품이기에 영화는 소리소문없이 묻혔지만 이를 눈여겨본 코미디언 맷 루카스와 데이비드 윌리암스는 그를 파라마운트 코미디 채널의 감독으로 지목했다. 그는 방송사에서 일을 하면서 당시 작가이자 연기자였던 사이먼 페그를 만나게 되고, 그는 곧 에드가 라이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가 연출한 코미디 시트콤 <스페이스드>가 호평을 받자, 그는 다시 영화판에 입성하게 된다. 영화감독으로서 제대로 된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만들었는데, 제작비 4백만 파운드로 3천만 파운드 이상의 수익을 거둬들이며 대성공을 하게 된다. 성공적인 스타트로, 그는 코르네토 3부작, 국내에선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이라 불리는 시리즈를 완성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라 하지만) 호러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는 이 작품은 코르네토 아이스크림 중 딸기맛에 해당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딸기의 빨간색은 피와 좀비를 상징하며 이게 영화의 핵심이라 설명했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과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조합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감독 에드가 라이트

출연 사이먼 페그, 케이트 애쉬필드, 닉 프로스트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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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녀석들(2007)
출연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뜨거운 녀석들(2007)

코르네토 아이스크림 중 바닐라 맛을 맡고 있는 <뜨거운 녀석들>은 파란색이 대표 컬러인데, 이는 바닐라 맛 포장지 컬러와 같다. 감독 말에 의하면 경찰하면 파란색이기 때문에 고른 거라고. 버디 캅 패러디 무비인 만큼 영화는 친절하게 원본을 보여주기도 한다. 버디 캅 무비의 대표격인 <나쁜 녀석들>은 물론, 1991년 작 <폭풍 속으로> 속 영화 장면을 실제로 보여주며 패러디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정체성과는 별개로, 에드가 라이트는 실제 경찰관들을 인터뷰하며 미디어에서 비추는 경찰의 환상이 아닌, 진짜 경찰의 모습을 다루고자 했다. 그 결과, 생각보다 경찰은 현장보다 서류 작업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 영화에 이를 삽입한다. 

영화는 너무 잘난 나머지 동료들의 미움을 산 엔젤(사이먼 페그)와 어딘지 좀 모자라 보이는 경찰 대니(닉 프로스트)가 합작하여 샌드포드 마을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지나칠 정도로 이상적인 샌드포드의 평화 뒤엔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이 설정에는 당시 미국에서 발표된 테러대책법에 대한 비판이 녹아있다. 테러대책법은 전화와 이메일 등을 사법집행기관에서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법으로, 개인정보 침해는 물론 자유와 인권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 “공공선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태도가 위험한 것임을 그는 버디 캅 무비 패러디를 통해 세련되게 보여준다. 사회비판 메시지를 던지는 코미디 영화의 가장 좋은 예시. 

뜨거운 녀석들

감독 에드가 라이트

출연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개봉 200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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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필그림(2010)
출연 마이클 세라,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키에라 컬킨, 크리스 에반스, 안나 켄드릭, 브리 라슨, 알리슨 필, 오브리 플라자, 브랜든 루스, 제이슨 슈왈츠먼, 조니 시몬스, 마크 웨버, 메이 휘트먼, 엘렌 웡

스콧 필그림(2010)

<스콧 필그림>은 만화가 브라이언 리 오말리가 그린 그래픽 노블 시리즈 <스콧 필그림>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코믹스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놓은 연출이 인상적이다. CG가 전작들에 비해 굉장히 많이 들어간 만큼 제작비 역시 <뜨거운 녀석들>에 비해 10배 가까운 8500만 달러가 투입되었는데, 그에 반 정도인 4770만 달러만을 벌어들이며 흥행에는 대실패했다. 아직 인류에겐 너무 이른 연출이었던 걸까, 만화적인 액션 연출과 설정에 에드가 라이트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영화는 토론토에 살고 있는 스콧(마이클 세라)가 이상형인 라모나(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를 차지하기 위해 그의 전 애인 7명과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다. 첫 번째 남친부터 마법을 쓰는 인도인으로 발리우드 스타일의 액션을 선보인다. 이에 더해, 감독이 좋아하는 고전 닌텐도 게임의 이름이나 이미지, 음악 등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소위 말하는 ‘요즘 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 코드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어 흥행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의 실험적인 연출에 쿠엔틴 타란티노나 케빈 스미스와 같은 동료 감독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스콧 필그림

감독 에드가 라이트

출연 마이클 세라,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키에란 컬킨, 크리스 에반스, 안나 켄드릭, 브리 라슨, 알리슨 필, 오브리 플라자, 브랜든 루스, 제이슨 슈왈츠먼, 조니 시몬스, 마크 웨버, 메이 휘트먼, 엘렌 웡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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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끝장 나는 날(2013)
출연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로자먼드 파이크, 패디 콘시딘, 마틴 프리먼

지구가 끝장 나는 날(2013)

코르네토 3부작은 <지구가 끝장 나는 날>로 막을 내렸다. <지구가 끝장 나는 날>은 페퍼민트 맛 아이스크림으로 녹색은 공상과학 소설과 외계 요소들을 상징한다. 코르네토 3부작답게 이 작품에서도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유일하게 닉 프로스트가 제대로 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뜨거운 녀석들>에서 철두철미 유능한 경찰이었던 사이먼 페그는 <지구가 끝장 나는 날>에서 한때 잘나갔던 양아치 게리 킹 역을 맡았다. 

고등학교 마지막 날 밤, 게리는 친구들과 함께 그날 돌지 못했던 12개의 술집 중 3군데를 다시 돌자고 제안한다. 철없는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게리와 달리 친구들은 세상에 적응을 한 상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 다시 그 술집 거리, 골든 마일을 돌기 시작한 그들은 마을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몸싸움을 하던 도중, 주민들이 파란 잉크로 찬 로봇들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골든 마일 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코르네토 3부작의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떡밥 회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 각 펍의 이름이나 장식에서 영화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울타리를 타넘는 몸개그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흥행은 본전 정도였으나, 평단에서는 코미디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굉장히 큰 호평을 받았다. 

지구가 끝장 나는 날

감독 에드가 라이트

출연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로자먼드 파이크, 패디 콘시딘, 마틴 프리먼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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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드라이버(2017)
출연 안셀 엘고트, 케빈 스페이시, 릴리 제임스, 에이샤 곤살레스, 존 햄, 제이미 폭스

베이비 드라이버(2017)

<베이비 드라이버>는 액션 코미디 영화로 분류되지만, 카액션 음악 영화에 가깝지 않을까. 특히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존 스펜서 블루스 익스플로전의 노래 ‘Bellbottoms'와 카 액션이 마치 퍼즐처럼 딱 들어맞아 관객들에게 쾌감을 준다. 많은 이들이 최고의 오프닝 신으로 꼽을 만큼 세련된 음악과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 에드가 라이트 감독 역시 ’뮤지컬 영화에 가깝다‘고 할 만큼 음악에 공을 많이 들였고, 이 덕분에 영화는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효과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이명으로 인해 노래를 듣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주인공 베이비(안셀 엘고트)는 빚을 갚기 위해 강도단의 운전사로 일한다. 그러던 중 운명적인 사랑, 데보라(릴리 제임스)를 만나고 그와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조직을 벗어나려 한다. 아픔이 있는 천재 주인공과 그를 보듬어 주는 여주인공 구도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줄거리 역시 새롭지 않고, 오히려 엉성하기까지 한 이 영화는 어떻게 2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벌어들였을까. 답은 ‘연출’이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어쩌면 이렇게 짝짝 달라붙을까”라며 호평했고, 로튼 토마토 신선도 역시 92%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액션 영화가 음악과 음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시. 덕분에 평단은 물론 대중까지 사로잡아 에드가 라이트 필모그래피 중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다. 

베이비 드라이버

감독 에드가 라이트

출연 릴리 제임스, 안셀 엘고트, 제이미 폭스, 존 햄, 케빈 스페이시, 에이사 곤살레스

개봉 2017.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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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
출연 토마신 맥켄지, 안야 테일러 조이, 맷 스미스, 리타 터싱햄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에드가 라이트 감독 최초의 공포 영화로 유일하게 코미디 장르가 빠져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패션 디자이너가 꿈인 엘리가 매일 밤 꿈에서 1960년대 소호에 살고 있는 가수 샌디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자신에게는 없는 자신감과 화려함, 사람을 매혹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샌디를 동경하게 된 엘리는 점차 샌디에게 매료되고 그의 삶에 집중하게 되지만, 꿈속에서 샌디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걸 목격하고 만다.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연출로 인해 다소 난해할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드가 라이트의 연출은 관객들을 기이한 소호의 현장 한 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 영화는 <악마의 씨>(1968)와 <지금 보면 안돼>(1973)에서 영감을 얻어 고전 미스테리 영화의 느낌을 가져오면서도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굉장히 아름답고 독특한 비주얼을 만들어 냈다. 스티븐 킹은 이 영화를 두고, “나는 같은 작품을 다시 보지 않지만, 이 영화는 예외다”라며 호평했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

감독 에드가 라이트

출연 토마신 맥켄지, 안야 테일러 조이, 맷 스미스, 리타 터싱햄

개봉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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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