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할리우드에서 ‘한국’이란 ‘북한’을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다. 미디어가 묘사하는 특정 나라의 이미지를 보면 다수의 대중들이 그 나라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불과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치는 한국의 모습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았다. 

요즘도 그런가? 당연히 아니다. BTS를 위시한 K-POP은 말할 것도 없고, '오징어게임'과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에까지 이르면 한국의 위상은 10여 년 새 크게 달라졌다. 최근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는 <브로커>의 송강호가 남우주연상을,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이 감독상을 수상했다.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한꺼번에 수상자 2명을 배출한 건 처음이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한국의 이미지도 크게 달라졌다.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이 미미하던 1990년대 전부터 문화 주역으로 우뚝 선 2020년대까지,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의 이미지 변화를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눈에 띄는 한국어 대사 모음은 덤이다.


1990년대 전후

이 시기에는 전 세계에서 한국을 올바로 인지하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 일본이나 중국, 홍콩 등 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꽤 있었지만, 아시아의 작은 나라, 그 작은 것도 둘로 쪼개어진 나라에는 큰 관심이 없던 실정. 이 시기 존 랜디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컬트 코미디 영화 <켄터키 프라이드 무비>에 한국어 대사가 나온다. 

<켄터키 프라이드 무비>

1977 <켄터키 프라이드 무비>(Kentucky Fried Movie)
“한국말로 무조건 말하라니 한심하군”

당대 미국 대중문화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딱히 줄거리라고 할 것도 없고 토막극이나 가짜 광고 등을 모은 것이 전부다. 시간이 한참 지나 화제가 되었던 장면은 ‘미국 합기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화배우 한봉수가 출연한 에피소드 <Fistful of Yen>인데, 극중 최종 보스 역할을 맡았던 한봉수가 급작스럽게 한국말을 줄줄 내뱉는 장면이 있다. 감독이 해당 장면에서 ‘한국어로 아무 말이나 하라’고 주문한 모양. “한국말로 무조건 말하라니 한심하군. 우리 한국 사람이 들으면 정신 나갔다고 말할 게 아니야. 아무튼 하라니 할 수밖엔. 결과는 어떻든 간에 말이야. 이런, 미국에서 영화 생활하려니 한심하군그래. 한심한 처지가 한두 번이 아니야. 아무튼 한국 팬들에겐 실례가 되겠습니다.”라고 주절주절 하소연을 하는 배우의 목소리에 웃음을 참을 재간이 없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

1990년대 중후반 외환위기가 온 아시아를 덮쳤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던 한국도 비켜갈 수는 없었다. 온 국민들이 금을 모으며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부단히 노력하던 즈음,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은 황금만능주의로 점철된 민족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불안정한 정세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주를 이루었다. 1993년 개봉한 영화 <폴링다운>에 등장한 한국인 슈퍼 주인은 공짜로는 잔돈도 바꿔줄 생각이 없는 돈에 혈안이 된 인물로 나왔다. 1998년 영화 <택시>에서 한국인 두 명이 택시에서 먹고 자며 24시간 영업하는 것으로 나온 것, 최대 빌런이 북한군으로 나온 2002년 영화 <007 어나더 데이>에서 어설픈 것을 넘어 왜곡된 한국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미 너무 유명하다.

<데블스 에드버킷>

1997 <데블스 어드버킷>(The Devil's Advocate)
“집으로 갈 거야? 기다려.”

키아누 리브스와 알 파치노, 샤를리즈 테론 등 할리우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모인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에도 한국어 대사가 잠깐 나온다. 영화는 플로리다의 유명 변호사 케빈 로막스(키아누 리브스)가 존 밀튼 투자회사의 회장 존 밀튼(알 파치노)에게 스카우트되어 밀튼사의 중요 고객들을 위해 변호하는 내용을 그리는 작품이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존 밀튼은 영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 한국어 등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인물이다. 케빈이 존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누군가와 전화 통화 중이었는데, 상대편 대사에서 익숙한 단어가 귀에 꽂힌다. 누군가 “밀튼, 나는 유리를 못 믿어! 옛날부터 그랬어. 약속을 지키지를 않았어” 하고 말하자 알 파치노는 “알았어. 집으로 갈 거야? 기다려” 등 능숙한 한국어로 대꾸하는데, 억양이 생각보다 자연스럽다. 극중 사업 얘기를 하는 듯한 분위기로 그려졌지만, 어떤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인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2000년대 중후반~2010년대 초반

앞선 10년의 경제 위기는 국내 대중문화산업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K-POP 산업은 어려운 경제로 굳게 닫힌 국내 팬들의 지갑을 여는 대신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고, 이즈음 이병헌과 비, 전지현 등 국내에서 톱스타로 꼽히던 배우들은 할리우드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2009년 영화 <더 문>에 한글이 등장하고, 2012년 영화 <본 레거시>가 강남역 일대에서 촬영을 하는 등 한국 자체에 대한 관심은 지대해졌지만, 2000년대를 넘어 2010년대가 시작될 때까지도 미디어에서 그리는 한국의 모습은 여전히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워쇼스키 자매가 연출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는 2144년 미래의 서울을 그린 ‘네오 서울’이 등장하는데 일본식 다다미방과 벚꽃 등 한국보다는 일본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예스맨>

2008 <예스맨>
“아가씨,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짐 캐리가 <예스맨>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장면은 몹시 유명하다. 극중 짐 캐리가 연기한 대출회사 상담 직원 칼은 ‘인생역전 자립 프로그램’에 가입하며, 생각지도 않았던 한국어 학원을 다니게 된다. 학원에서 다른 수강생들과 입을 맞춰 “청주 날씨는 어때요?” 하고 선생님의 말을 따라 하는 장면과 한 매장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계 직원 수미와 유창하게 대화하는 장면은 개봉 당시에도 그랬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회자된다.


2010년대 중반~현재

2010년대 중반부터는 K-POP을 필두로 한 한국 문화와 한국 영화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지며, 한국은 아시아를 넘어 북남미와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점점 친숙한 나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한국 배우 수현이 캐스팅되어 더욱 화제를 모았던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서울에서 촬영하고, 2018년엔 <블랙 팬서>가 부산에서 촬영을 하고, 주연배우 루피타 뇽오가 한국어 대사를 하며  블록버스터 영화 속에서 진짜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도 했다. 물론 어설픈 한국어 발음은 늘 도마 위에 올랐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블랙핑크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 정도는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엄마>

2022 <엄마>
“이 가방 속에 있는 한 엄마 한은 더 커질 거다”

얼마 전 한국계 미국인 배우 산드라 오가 주연을 맡은 공포영화 <엄마>가 개봉했다. 영화는 한국 고유의 정서 ‘한’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구축해 나가는데, 이 때문에 한국의 정서를 찾아볼 수 있는 아이템들이 영화 곳곳에 담겨있다. 아만다(산드라 오)가 그녀의 엄마가 돌아가신 후 받은 가방에 들어있는 유골함과 한복, 탈, 자개로 만든 오르골 등이 그것. 또 영화의 제목 자체도 한국어에서 따온 만큼 극중 한국어 대사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배우들의 다소 어눌한 발음이 아쉽긴 하지만, 그간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준 적 없었던 한국의 새로운 모습, 샤머니즘 문화를 다루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나우무비 에디터 박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