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5주차에 접어든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570만 관객을 돌파(5월 30일 기준)하며 절찬 상영 중이다. 멀티버스를 전무후무한 비주얼로 구현한 감독 샘 레이미가 지금까지 지나온 자취들을 정리했다.


<위드인 더 우즈> 촬영 당시

어릴 적 아버지가 사준 카메라로 영화 찍기에 푹 빠졌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 브루스 캠벨을 배우로 세워 수많은 슈퍼8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두 친형제와 브루스 캠벨 등이 출연한 첫 장편영화 <잇츠 머더!>(1977)를 만든 데 이어, 형의 룸메이트였던 로버트 테이퍼트가 프로듀서를 맡아 32분짜리 공포영화 <위드인 더 우즈>(1978)를 만들었다.

로버트 테이퍼트, 샘 레이미, 브루스 캠벨

미시건 주립 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다가 3학기 째에 두 번째 장편을 만들기 위해 자퇴했다. 주연 배우 브루스 캠벨, 프로듀서 로버트 테이퍼트는 제작사 르네상스 픽처스를 열어 <위드인 더 우즈>를 포트폴리오 삼아 제작비 9만 달러를 마련해 테네시주 모리스타운의 외딴 오두막에서 촬영에 착수했다. 예산이 초과돼 결국 37.5만 달러가 들었는데, 이는 브루스 캠벨이 가족과 친척에게서 조달해서 완성할 수 있었다. 샘 레이미는 북 오드 더 데드를 제목으로 삼고 싶어 했지만, 영화업자 어빈 샤피로는 문학적으로 보이는 제목이 아이들의 흥미를 끌지 못할 테니 이블 데드를 제안했다. 198110월 개봉한 <이블 데드>는 어빈 샤피로의 도움으로 이듬해 칸 영화제에서 상영됐고, 공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의 극찬에 힘입어 뉴 라인 시네마의 배급망을 타고 보다 폭넓게 상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80년대 중반 샘 레이미는 초기작들의 배우 브루스 캠벨, 코엔 형제와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 홀리 헌터, 캐시 베이츠 등과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이블 데드>를 잇는 세 번째 장편 <크라임웨이브>(1985)<이블 데드>의 편집 조수로 일했던 코엔 형제와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필름 누아르, 블랙 코미디, B급 영화가 뒤섞인 영화는 제작비의 20%밖에 회수하지 못하는 흥행 실패를 낳았다. 샘 레이미는 9년 후 코엔 형제 작품 <허드서커 대리인>(1994)의 시나리오를 함께 썼다.

<이블 데드 2>

<크라임웨이브>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서둘러 <이블 데드 2>(1987)를 만들기 시작했다. 배우 브루스 캠벨, 프로듀서 로버트 테이퍼트, 그리고 어빈 샤피로의 서포트까지 <이블 데드>의 주역들이 고스란히 뭉쳤다. 그리고 습작 시절을 함께 한 스캇 스피겔이 샘 레이미와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이블 데드>에도 도움을 줬던 스티븐 킹이 영화감독 데뷔작 <맥시멈 오버드라이브>(1985)의 제작자였던 디노 드 로렌티스에게 <이블 데드 2> 프로젝트를 소개해 전작보다 훨씬 큰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상영관이 적었던 탓에 개봉 첫 주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미국에서만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수익을 거뒀다.

<쉐도우>

평소 코믹스의 열렬한 팬인 샘 레이미는 <쉐도우>를 각색한 영화를 연출하고 싶어 했으나 결국 판권을 구하지 못하고, 30년대 호러 영화에 존경을 바치며 직접 창작한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한 슈퍼히어로 영화 <다크맨>(1990)을 만들었다. 샘 레이미는 브루스 캠벨이 주연을 맡길 원했으나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를 원한 제작자들의 반대로 리암 니슨이 다크맨에 캐스팅 됐고, 레이미는 캠벨을 마지막 장면에 아주 짧지만 강렬하게 카메오로 등장시켰다.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를 통해 처음 작업해 (<이블 데드> 제작비의 40배에 달하는) 1400만 달러 규모로 제작돼 3배가 넘는 488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여자 주인공을 맡은 영화는 (크레딧엔 오르지 않았지만) 코엔 형제가 시나리오를 매만지기도 했다. 샘 레이미는 2006배트맨시리즈의 프로듀서 마이클 E. 유슬란과 함께 다시 한번 <쉐도우> 영화화를 계획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다크맨>

이블 데드의 세 번째 시리즈 <아미 오브 다크니스>(1992)<다크맨> 제작 이전부터 계획됐다. 2편의 각본을 쓴 스캇 스피겔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후계자>(1990) 작업하게 돼 샘 레이미는 <다크맨>에도 참여한 친형 이반 레이미와 함께 주인공 애쉬(브루스 캠벨)가 오두막을 벗어나 14세기 중세를 배경으로 고군분투 하는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2편의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샘 레이미와 스탭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도록 준 데 반해 유니버설은 여러모로 통제를 가했다. 첫 편집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편집을 다시 해야 했고, 샘 레이미는 미디벌(중세의) 데드라는 제목을 원했지만 유니버설 픽처스가 거절해 영화가 만들어지기 2년 전 세상을 떠난 어빈 샤피로가 지은 아미 오브 다크니스가 제목이 됐다. 1,2편을 제작하지 않은 유니버설은 독자적인 영화로 보이게 하고자 이블 데드 3’라는 타이틀조차 붙이지 않았다. 1992년 여름 개봉 예정이었던 영화는 이듬해 2월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아미 오브 다크니스>

이블 데드’ 3부작을 마친 샘 레이미는 호러와 코미디 외의 타 장르에 도전했다. 서부극 <퀵 앤 데드>(1995), 누아르 <심플 플랜>(1998), 스포츠 드라마 <사랑을 위하여>(1999), 스릴러 <기프트>(2000)가 바로 그것. <아미 오브 다크니스>까지 직접 시나리오를 썼던 샘 레이미는 90년대 중후반의 장르영화들을 사이먼 무어, 스캇 스미스, 데이나 스티븐스, 빌리 밥 손튼 등 다른 이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연출했다. 네 작품 모두 각자 다른 촬영감독, 음악감독과 작업했다는 점 역시 특기할 만하다. 브루스 캠벨, 로버트 테이퍼트와 함께 운영하는 르네상스 픽처스가 이 시기에 TV 시리즈 헤라클레스’, ‘여전사 지나’, ‘아메리칸 고딕등을 제작하면서 성공을 거뒀다는 점도 당시 샘 레이미의 행보와 연관 있을 터.

<퀵 앤 데드>
<사랑을 위하여>

마블 코믹스 스파이더 맨영화화 프로젝트는 80년대부터 시작됐다. 제임스 카메론, 토브 후퍼 등 감독 물망에 올랐으나 번번이 무산됐고, 1999년 컬럼비아 픽처스가 판권을 사 <쥬라기 공원><미션 임파서블>의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켑에게 각본을 맡겼다. 롤랜드 에머리히, 이안, 크리스 콜럼버스, 팀 버튼, 마이클 베이, M. 나이트 샤말란, 토니 스콧, 데이비드 핀처 등 명감독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샘 레이미가 연출을 맡게 됐다. 그는 25천 권이 넘는 코믹스를 보유한 컬렉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점 역시 그가 감독으로 기용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샘 레이미는 <사이더 하우스>(1999)의 연기를 보고 토비 맥과이어를 피터 파커 역에 캐스팅 했다. 20025월 개봉한 <스파이더 맨><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 이어 그해 흥행 3위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스파이더 맨>

<스파이더 맨>이 개봉하기 한 달 전에 이미 <스파이더 맨 2>(2004) 연출을 맡기로 계약했다. 전편처럼 1.85:1 화면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스파이더 맨과 길다란 기계 팔을 가진 닥터 옥토퍼스가 한 장면에 놓이려면 더 넓은 화면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2.39:1 시네마스코프 비율로 촬영했다. <스파이더 맨 2>는 전작을 살짝 밑도는 수익을 냈지만 <슈렉 2><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 이어 2004년 흥행 3위를 차지했고 감독 샘 레이미 본인은 물론 팬들 대부분이 2편을 시리즈 최고작으로 손꼽는다.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 맨 3>(2007) 감독까지 맡아 슈퍼히어로 시리즈를 3편 연출한 최초의 감독이 됐고, ‘다크 나이트의 크리스토퍼 놀란과 ‘X의 브라이언 싱어가 그 뒤를 따랐다. 시리즈 최고 수치인 9억 달러에 육박하는 수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3편 역시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 밀려 2007년에도 흥행 3위를 기록했다.

<스파이더 맨 2> / <스파이더 맨 3>

샘 레이미가 십수 년 만에 호러/코미디 장르로 돌아온 <드래그 미 투 헬>(2009)은 사실 <아미 오브 다크니스>를 만들던 시기에 차기작으로서 형 이반 레이미와 시나리오를 써놓았던 작품이다. 당시 제목은 저주’(The Curse)였다. 초창기 이블 데드시리즈의 느낌을 내고자 오프닝에 유니버설 스튜디오 로고까지 80년대의 것을 사용했다. 너무나 샘 레이미스러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의 에드가 라이트에게 연출을 맡기려고 했었다. 샘 레이미의 호러 영화 최초로 PG-13 등급을 받은 <드래그 미 투 헬><스파이더 맨 3>10%에도 못 미치는 자본으로 만들어졌지만 제작비 대비 3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드래그 미 투 헬>

싸이키델릭한 비주얼이 인상적인 디즈니 영화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2013) 이후 샘 레이미의 연출 필모그래피는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그가 9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스파이더 맨 3> 당시에 받았던 비평과 관객의 비판에 히어로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스스로 믿음을 잃었던 터라 처음엔 연출직을 고사했으나 원작 코믹스의 팬인데다 <닥터 스트레인지>(2016) 역시 아주 재미있게 보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교롭게도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스파이더 맨> 개봉 20주년 이틀 후에 전 세계에 공개됐다.

샘 레이미 영화의 시그니처 아이템. 바로 1973년 제작된 노란색 올즈모빌 델타 88 자동차다. 레이미가 14살 때 아버지가 구입한 이 차는 <이블 데드>에서 애쉬가 친구들을 데리고 오두막으로 가는 신에서 처음 등장해 그가 연출한 (19세기가 배경인 <킥 앤 더 데드>를 제외한) 모든 영화에 크고 작은 비중으로 등장했다. 피터 파커가 처음 추격전을 벌이는 차로 나오기도 하고, 그냥 동네에 가만히 주차된 채로 비춰지기도 했다. 물론 이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도 나왔으니 두 눈 크게 뜨고 찾아보시라!
 

<이블 데드>
<스파이더 맨>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