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 플레져’는 영어 길티(guilty)에 플레져(pleasure)를 더한 단어로, 보통 남에게 밝히기 부끄럽고 민망한, 또는 스스로 생각해도 오글거리는 상황을 즐기는 취향과 태도를 자조하는 경우 사용한다. 비슷한 단어로는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 변주된 형태로는 '헬시 플레져(건강관리의 패러다임을 ‘절제’가 아닌 즐거움으로 바꾼 신조어)'가 있다. 

'길티'라곤 하지만 그 종류는 대부분 소소한 것들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욕하면서 뒤에서는 '투 핫' 같은 리얼리티쇼를 찾아보고, 멜론 TOP 10만 듣는 '대중적인 귀'를 장착했으면서 클래식 애호가인 척하는 식의. 최근에는 '길티 플레져'가 기존 질서의 강박에서 벗어난 B급 영화나 가요를 즐기는 문화로도 설명된다.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길티 플레져가 뭐가 대수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것은 숨겨진 취향에 관한 이야기이며, 취향은 계급의 얼굴을 하기에, 여전히 대놓고 고백하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향수 뿌리지 마'를 당당하게 들을 수 있는가?
"나를 따라다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환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엉망진창이니까....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접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이런 여자로 남고 싶을 뿐이다." 나쁜 페미니스트 p14 by 록산 게이

하지만 치열한 하루의 끝, 오른손엔 맥주를, 왼손엔 리모컨을 든 손이 가 닿는 곳은 어쩌면 타르코프스키의 심각한 주절거림보다 클리셰 범벅의 심플한 액션 영화일지 모른다. 도덕과 체면의 경계를 넘는 원초적 민낯을 마주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 즉각적인 만족을 주기도 하는 법. 록산 게이의 용감한 고백에 힘입어 나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결점과 모순으로 뭉친, 가끔은 단순한 끌림에 굴복하는 보통 인간임을 고백하며 나의 최근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한다. 


마동석 VS 제이슨 스타뎀

엄연한 사법 체계가 구축된 사회에서도 권력을 가진 집단은 사사로운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승승장구한다.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자들과 아동 학대범들은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며 우리를 조롱한다. 뉴스를 볼수록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존재가 절실해진다. 이때 우리의 영웅이자 '사적 복수'의 화신 마동석과 제이슨 스타뎀이 등장한다. K-싸대기를 장착한 마동석, 카드 한 장으로 치명타를 입히는 제이슨 스타뎀 앞에선 극악무도 사이코패스도 종잇장처럼 나뒹군다. 

마동석이 곧 장르! 마동석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시초격 <이웃 사람> (2012)
<이웃 사람>에서 마동석은 악질 사채업자 안혁모로 분한다. 영화의 배경은 열흘 간격으로 연쇄살인이 발생하는 '강산맨션'.  한 명의 사이코패스와 그를 의심하는 이웃 주민들은 추가 살인을 막기 위해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 중 단연 돋보이는 이웃은 '아파트 일진' 마동석. 화려한 문신을 휘감은 혁모는 사촌형에게까지 사채 빚 상환을 독촉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공공의 적이지만, 연쇄살인마 류승현(김성균)을 자신의 장기인 폭력으로 제압하며 일약 시민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영화는 악당에 가해진 폭력의 쾌감을 선사하는 것을 넘어
'살인자가 불쌍해 보이긴 처음이다'라는 웃픈 탄식을 자아내기도. <이웃 사람>은 사회악을 맨손으로 응징하는 '돌격하는 마동석'의 상징적 이미지를 구축한 마동석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시초격 작품이라 그의 싸다구, 유독 통쾌했다.

“어이? 어이가 없네”를 외치며 류승혁(김성균)에게 다가가는 분노조절 치료제 안혁모(마동석). 10년 전 마동석, 지금 보다 왜소하지만, 여전히 무섭다.


영국에는 제이슨 스타뎀 있다! <메카닉: 리크루트>(2016) <캐시트럭>(2021)

메카닉: 리크루트(2016), 메카닉(2011), 캐시트럭(2021)순 이었나? 아니 그 반대였나? 시종일관 유지하는 짧은 머리와 눈썹 하나 흔들림 없는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H와 비숍이 같은 우주를 공유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며 이내 세 영화가 겹쳐 보인다.
<메카닉: 리크루트>(2016)에서 '비숍'(제이슨 스타뎀)은 과거를 청산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곧 의문의 세력이 여자친구 '지나'(제시카 알바)를 납치하고, 지나를 구하기 위해 비숍은 3개의 극한 미션을 수행한다.

여기 또 다른 유니버스를 구축한 배우가 있다. <캐시트럭>(2021)의 주인공 H(제이슨 스타뎀)는 전작<메카닉: 리크루트>(2016)에서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름만 바꾼 인물처럼 보인다. 5년 사이 여자친구 '지나'와 결혼해 아들이라도 낳은 걸까? <캐시트럭>에서 그는 무장 강도에 의해 아들을 잃는다. 이내 아들을 죽인 범인을 추적하기 위해 현금 호송 회사에 위장 취업한 후.. 이다음 전개는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그대로다. H는 화려한 과거를 감춘 거물이었으며, 아들의 복수를 위해 아들이 당한 그대로 4발의 총알을 무장 강도의 간, 폐, 비장, 심장에 정확히 꽂아 넣고 유유히 퇴장한다. 옥주현은 '먹어 봤자 내가 아는 맛'이라는 다이어트 명언을 남겼지만, '알기에 거부할 수 없는 맛'이 있다. 개연성도 스토리도 기대할 수 없지만 폭력의 당위성을 등에 업은 제이슨 스타뎀의 영화들은 '알기에 거부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현실 조직폭력배 세계에선 돈도, 로맨스도, 의리도 없다. 뻥이다 뻥"

폭력은 부당하며, 그 통쾌함은 착시 효과에 불과하다. 아무리 사법 정의가 무너진 시대라지만, 일개 폭력 사채업자가 정의를 구현해 줄리 만무하고, 갱단 보스 출신인 '남자의 분노'(<캐시트럭>의 원제 'Wrath Of Man'의 직역)가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으므로. 32년 경력 베테랑 형사 출신 김복준이 말한 것처럼 "현실 조직폭력배 세계에선 돈도, 로맨스도, 의리도 없다. 뻥이다. 뻥". 폭력은 폭력을 낳고, 현실 속 폭력은 날아오는 고소장, 법정 다툼, 벌금 같은 구질구질한 얼굴을 한다는 것을 알지만, 휘두르는 주먹에 나뒹구는 범죄자들의 몸뚱어리를 보며 영화 속 마동석과 제이슨 스타뎀의 주먹을 소망하는 것,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팀장에게 어퍼컷 꽂고 싶은 날, 이들 영화로 대리만족한다.


넷플릭스 <365일>, 유명하지만 본 사람은 없는, 많은 이의 길티 플레져!
"원하는 건 언제든 가질 수 있는 우두머리 수컷이 널 보살펴주고 지켜준다고 상상해 봐. 함께 있으면 소녀가 되는 느낌이 들고 모든 성적 판타지를 실현시켜줘, 게다가 키는 190cm에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신이 빚은 몸매야!!"

여주인공 라우라가 친구 올가에게 하는 대사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판타지를 요약한다. 마피아 보스인 마시모(미켈레 모로네)는 시칠리아로 휴가 온 여성 라우라(안나 마리아 시에클루츠카)를 납치해 ‘365일 후에도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풀어주겠다’는 황당한 말을 한다. 영문도 모르고 감금당한 라우라는 점차 마시모의 매력에 빠져 성적 욕망에 몸을 던지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영화 '365일' 속 여성들은 주체성이 거세된 채 대상화되고, 강간, 납치, 일방적인 스킨십은 로맨스로 포장된다. 이 때문에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영화 시청을 거부하는 '365챌린지(#365days)가 일기도 하고, 필름 폐기를 요구하는 백악관 청원도 등장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영화', '365일'을 봤다고 당당히 고백할 수 없는 이유다. 

가수 화사도 빠졌다! <365일> 남주 미켈레 모로네! 

미켈레 모로네


로튼 토마토 지수 0%, 2021년 미국 골든 라즈베리상 최악의 각본상 수상에 빛나는 개연성 없는 스토리, 수많은 밈을 생성한 "Are you lost, baby girl?"과 같은 오그라드는 대사 라인을 상쇄하는 단 하나의 볼 거리는 남주 미켈레 모로네의 매력이다. 190cm에 달하는 장신에, 포토샵을 한 듯한 몸매, 뇌쇄적 눈빛까지 장착한 모로네의 시각적 화려함과 영화의 장르적 특성은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한다. 가수 화사도 빠졌다는 미켈레 모로네의 매력에 힘입어 '365일'은 2020년 한국 넷플릭스 영화 순위 1위에 오르고, 공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속편 제작이 결정되기도. 세계 각지에서 큰 인기를 끈 것이 분명한데, 주변에 본 사람은 드물다. 과연 많은 이의 길티 플레져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