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도 단계가 있다면 7월의 여름이 가장 높지 않을까. 장마가 가시고 난 후, 맑게 개인 하늘과 뜨겁지만 목을 죄듯 후덥지근하지는 않은 날씨. 해상도 높은 카메라로 보듯이 선명하고 쨍한 세상의 색감들. 사랑하는 이의 손이 닿은 것처럼 뜨거워지는 살갗. 장마가 지난 후 7월의 여름은 그야말로 싱그럽다. 오늘은 한 여름 밤에 보기 좋은 여름 같은 영화들을 준비했다. 뻔한 건 재미 없으니까. 일부러 <맘마미아!>(2008)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처럼 여름 하면 떠오르는 영화들을 배제했다. 그래도 재미는 보장하는 영화들이니, 이 밤을 지새울 때 챙겨 놓기 바란다.
<하와이언 레시피>
감독 사나다 아츠시
출연 오카다 마사키, 아오이 유우, 바이쇼 치에코
잔잔하고 아기자기한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을 좋아한다면 빼놓지 말아야 할 <하와이언 레시피>다. 하와이섬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호노카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특히 노인들이 많은 동네로 무척 잔잔하고 평화롭다. 일본에서 여행 온 대학생 레오는 우유부단함 때문에 여자친구에게 차인 뒤, 이 소박한 마을에 방문하게 된다. 소심한 레오에게 노인이 많은 이 동네는 더없이 편안한 장소다.
매일 같은 사람과 마주치고 같은 길을 걷는다. 자신을 돌봐주는 할머니도 있고 농담을 주고 받을 할아버지도 있다. 레오는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지만 자신감을 갖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가 필요한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듬성듬성 비어있는 것처럼 여백이 많은 일상이었지만, 그 안에서 레오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성장해 나간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비 할머니의 음식 솜씨. 고비가 있을 때마다 요리를 만들어 주는 비 할머니와의 인연은 레오에게 인간과 사랑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와이언 레시피>는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느릿느릿 진행되기 때문에 다소 밋밋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재료 본연의 맛이 나는 요리가 가장 맛있는 만큼, 이 영화는 천천히 음미할 때 가장 훌륭한 맛을 보여준다. 이 영화 자체가 <하와이언 레시피>로의 여행이다. 별 기대 없이 찾아간 마을에서 인생의 조각 하나를 발견한 레오처럼 이 영화에서 소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 하와이언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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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사나다 아츠시
출연 오카다 마사키, 바이쇼 치에코, 아오이 유우
개봉 2012.07.19.
<호우시절>
감독 허진호
출연 정우성, 고원원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을 연출한 허진호 감독의 또다른 수작, <호우시절>이다. <호우시절>은 중국 문인 두보의 시에서 가져온 구절로 ‘때마침 알맞게 내리는 비’를 일컫는다. 그 제목처럼, 영화는 ‘다시 그 시절의 사랑이 찾아 온다면’을 가정하고 있다.
영화는 2008년 쓰촨성 청두를 강타한 대지진 여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 유학 시절 만나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박동하(정우성)와 메이(고원원)가 우연히 청두에서 다시 만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정을 확인하는 이야기로, 그시절 한국 특유의 멜로 영화처럼 잔잔하고 섬세하게 감정선을 포착해내고 있다. 과거의 사랑을 증명하려는 동하와 대지진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메이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사랑하고 싶지만 두려움과 죄책감이 브레이크를 거는 메이에게 동하는 자전거를 선물한다. 과거에도 노란 자전거를 선물했던 동하는 다시 한 번 메이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면서 그가 앞으로 나아가길 기원한다. 굳이 다시 배우지 않아도 메이는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결국, 몸에 익은 감정과 행동들은 다시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다시 사랑해도 될까’라는 머릿속의 물음표는 감정 앞에서 무용해지기 마련이다.

- 호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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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허진호
출연 정우성, 고원원
개봉 2009.10.08.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
출연 카호, 오카다 마사키, 나츠카와 유이, 사토 코이치
유기농 식물 같은 영화들이 있다.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자란 듯한 색감에 투박하지만 풋풋함이 살아 있는 모양새, 그 안에 담겨 있는 순수한 감정과 퍼지는 웃음소리. 도시에 살면서 찌든 때를 벗겨내고 싶을 때 꺼내 보는 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이다.
영화는 산과 밭으로 둘러 쌓인 일본의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교생 모두 합쳐도 6명 뿐인 분교에서 가장 맏언니인 미기타 소요(카호)는 매일같이 아이들을 돌보느라 분주하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에서 갑자기 소요의 마음을 흔드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도쿄로부터 온 멋진 전학생, 오오사와 히로미(오카다 마사키)의 등장이다. 영화는 산골소녀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를 마치 수채화처럼 그려낸다. 원작이 쿠라모치 후사코의 <천연꼬꼬댁> 만화인 만큼, 영화는 소요의 사랑 이야기 외에도 귀여운 에피소드들을 섬세하게 엮어 전개하고 있다. 요즘에도 이런 아이들이 있을까, 싶을정도로 무공해 그 자체다. 핸드폰은 잠시 꺼두고, 무더운 여름 밤 시골로 잠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나 역시 저런 때가 있었더랬지’라며 첫사랑의 추억을 되짚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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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
출연 카호, 오카다 마사키, 나츠카와 유이, 사토 코이치
개봉 2008.07.24.
<킹 오브 썸머>
감독 조던 복트-로버트
출연 닉 로빈슨, 가브리엘 바쏘, 모이세스 아리아스, 닉 오퍼맨
<킹 오브 썸머>는 하루빨리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친구 조(닉 로빈슨)와 패트릭(가브리엘 바쏘), 그리고 그들의 괴짜 친구 비아지오(모이세스 아리아스)가 숲속에 통나무 집을 지어 지내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고 있다. 숲은 도시와 한참 떨어져 있어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고, 이는 곧 가족의 간섭에서도 도피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조와 친구들은 통나무집이 주는 자유를 마움껏 누렸다. 규칙과 규율, 명령과 복종이 없는 세계가 숲속 통나무 집에 존재했다. 조는 “숲에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바깥세상과 완전히 다른 유토피아를 구축해 나가고자 했다.
영화 속 숲은 시종일관 찬란하다. 세 친구의 명랑한 기운이 관객들에게까지 전달되게끔 영화는 자연이 주는 에너지를 최대한 담고자 했다. 특히 포스터로 활용된 맑은 물에 소년들이 뛰어드는 장면은 그 자체 만으로 자유로움을 전달하며 시원함을 선사한다. 작품의 배경이 된 오하이오 주 숲의 풍광은 그 속에 있는 소년들의 일탈마저도 사랑스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영화는 내내 자연을 아름답게 그리지만 그 안에 있는 소년들은 변화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찬란한 청춘의 시간 한가운데를 관통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이 시원해지는 여름 영화로도, 치기 어린 성장 영화로도, <킹 오브 썸머>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 킹 오브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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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던 복트-로버츠
출연 모이세스 아리아스, 닉 오퍼맨, 닉 로빈슨, 가브리엘 바쏘
개봉 미개봉
<핫 썸머 나이츠>
감독 엘리야 바이넘
출연 티모시 샬라메, 마이카 먼로, 알렉스 로
<핫 썸머 나이츠>의 네이버 영화 한줄평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평은 “여름과 티모시가 만나면 그걸로 끝”이다. 동의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이탈리아의 여름과 어울리는 소년미 넘치는 모습을 연기한 그가 <핫 썸머 나이츠>에서는 교통사고처럼 한 여자에게 순식간에 빠지는 남자 다니엘이 되었다.
<핫 썸머 나이츠>는 소심한 아웃사이더지만 위험천만한 비즈니스도 성공하고 싶고, 첫 사랑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다니엘의 아찔한 여름을 그린 작품이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아웃사이더가 점차 대담해지는 일련의 과정을 매혹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티모시 샬라메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이다. 실제로 엘리야 바이넘 감독은 티모시 샬라메가 슛에 들어갈 때마다 다채로운 연기를 선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 제작자로서 이런 배우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라고 그를 극찬한 바 있다. 또한 영화는 레트로한 분위기에 힙한 영상미로 완성도를 높인다. 색채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원색 위주의 연출은 <핫 썸머 나이츠>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힙하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어본 사람이라면 인스타그램 프로필로 추천하는 영화.

- 핫 썸머 나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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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엘리야 바이넘
출연 티모시 샬라메, 마이카 먼로, 알렉스 로
개봉 2018.10.18.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