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지난 3년간 필모그래피가 멈춰 있었던 박해일에게 최고의 해가 될 전망이다. 지난 6월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박해일은 한 달 텀을 두고 개봉한 대작 <한산: 용의 출현>을 선보이며 연달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 20여년 간 박해일이 거쳐온 영화들을 한데 모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임순례 감독은 연극 <청춘예찬>에서 고등학교 2학년을 연기하는 박해일을 발견하고,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의 주인공 밴드맨 성우(이얼)의 고등학생 시절 역에 캐스팅 했다. 어설픈 실력으로 목청껏 노래하는 것만큼이나 첫사랑 인희(문혜원)를 흠모하는 박해일의 순한 얼굴은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해일은 송골매의 '세상만사', 옥슨80의 '불놀이야', 제이 가일스 밴드의 'Come Back'을 직접 노래 했다.

<국화꽃 향기>

박해일의 첫 주연작은 장진영과 호흡을 맞춘 로맨스 <국화꽃 향기>(2003)다. (개봉 당시) 100만 부 판매고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인하(박해일)는 대학 신입생 시절 짝사랑 했던 희재(장진영)를 잊지 못하다 세월이 흐른 후 사랑을 이루지만 머잖아 그녀는 암에 걸린다. 불치병을 소재로 삼은 전형적인 최루성 신파 속에서 박해일은 맑은 얼굴로 인하의 순애보를 보여줘 여성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질투는 나의 힘>

<청춘예찬> 무대에서 박해일을 발견한 이가 임순례 감독만은 아니었다. 박찬옥 감독 역시 장편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2003)에 문성근, 배종옥과 함께 박해일을 주연에 캐스팅 했다. 대학원생 원상(박해일)은 애인(배종옥)을 유부남 윤식(문성근)에게 뺏기고 그가 운영하는 잡지사에 출근하지만, 새롭게 사랑에 빠진 성연(배종옥)마저 윤식과 연인이 된다. 매력적인 중년에게 질투와 호감을 느끼는 젊은 남자의 복잡한 심경을 구현해, 그해 신인남우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살인의 추억>

2월 <국화꽃 향기>와 4월 <질투는 나의 힘>에 이어 5월 <살인의 추억>까지, 2003년 상반기 3달 사이에 박해일의 신작 3편이 개봉했다. 봉준호의 걸작 <살인의 추억>에선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박현규 역을 맡았다. 공장노동자로 일하며 조용히 책을 읽고 라디오 프로그램에 신청곡을 보내며 지내는 현규는 박두만의 강압적인 수사에 무미건조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서늘한 용의자와 야만적인 공권력에 유린 당한 청춘의 얼굴을 동시에 어필 했다.

<인어공주>

전도연과 고두심의 명연기가 돋보이는 <인어공주>(2004)는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를 답답해 하는 나영이 부모의 고향인 섬마을에서 젊은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판타지다. 나영과 스무 살의 엄마 연순을 전도연이 1인2역으로 소화했고, 젊은 시절 아버지인 우체부 진국을 박해일이 연기했다. 무해함이라곤 없는 진국은 20대 시절 박해일의 청초한 이미지가 가장 빛나는 캐릭터.

<연애의 목적>

<인어공주>의 진국이 순수라면, 한재림 감독의 데뷔작 <연애의 목적>(2005)의 유림은 능구렁이 그 자체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인 유림(박해일)은 한 살 많은 미술교생 홍(강혜정)에게 노골적으로 치근덕댄다. 박해일이 틈만 나면 수작 걸 준비가 돼 있는 얼굴을 하고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섹스토크를 내뱉는다. 이전까지 박해일을 대표하던 과묵하고 순박한 인상과는 완전 딴판이라 이미지의 터닝포인트를 노린 것 같기도.

<소년, 천국에 가다>

박찬욱 감독이 제 영화에 박해일을 캐스팅 한 건 <헤어질 결심>이 처음이지만, 박해일은 박찬욱이 (최동훈과 함께) 각본으로 참여한 <소년, 천국에 가다>(2005)의 주인공 네모 역을 맡은 바 있다. 미혼모의 아들로 자라 미혼모와 결혼하는 게 꿈인 13살 네모는 엄마를 여읜 후 마을에 온 미혼모 부자(염정아)에게 사랑에 빠지고, 부자의 아들을 구하다 천국에 온 네모는 저승사자와 거래를 해 33살 어른이 된다. 아이가 어른의 몸을 가진다는 설정과 영화 내내 감도는 서글픈 정서가 만난 독특한 작품이다.

<괴물>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에 이어 야심차게 준비한 SF영화 <괴물>(2006)에 또 한번 박해일을 기용했다. <살인의 추억>의 박현규와 <괴물>의 박남일은 성씨 빼고 모든 게 다르다. 박희봉(변희봉)의 둘째 아들인 남일은 한때 운동권이었고, 지금은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백수. 언제나 맹한 형 강두(송강호)를 못마땅해 해 늘 각을 세운다. 툴툴대기나 할 줄 알았던 그는 소주병으로 화염병을 만들어 조카 현서(고아성)를 잡아간 괴물에게 던지며 (그리고 기어코 삑사리까지 내고 마는) 활약한다.

<좋지 아니한가>

<말아톤>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 정윤철 감독의 <좋지 아니한가>(2007)엔 우정출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역할명은 '미스터리한 선생 경호'. 주인공 가족의 딸 용선(황보라)의 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친다. 미스터리 서클의 지도교사이기도 그는 아이템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차림새로 시시한 어른들이 하지 않을 법한 의미심장한 말과 행동으로 용선의 흥미를 자극한다.

<극락도 살인사건>

김한민 감독은 박해일을 편애하는 감독들 중 하나다. 그 시작은 2007년 개봉한 입봉작 <극락도 살인사건>였다. 1986년을 배경으로, 조용한 섬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그린 추리극을 표방했다. 명석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마을 보건소장 제우성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미지로 잘 알려진 박해일의 장점이 제대로 기능한 캐릭터다. 

<모던 보이>

<해피 엔드>와 <사랑니>로 남다른 연출력을 선보인 정지우 감독의 <모던 보이>(2008)의 배경은 1937년 일제강점기의 경성이다. 일본의 통치를 받던 시절을 그리지만 핍박 받는 사람들의 생활상이 아닌 전통과 신문물이 쏟아지던 도시의 휘황찬란한 분위기를 그리는 데에 집중했다.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박해일)은 경성의 풍요를 실컷 누리다가 정체불명의 댄서 난실(김혜수)과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가 준 도시락 때문에 테러범으로 몰려 모든 걸 잃고 사랑을 찾아나선다.

<이끼>

윤태호 작가의 웹툰 <이끼>를 바탕으로 한 작품. 웹툰이 영화화 되는 경우가 드물었던 2010년에 제작돼 시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주인공 류해국은 오랫동안 연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골로 향하고, 마을 사람들의 석연찮은 반응을 보고 거기에 정착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파헤친다. 애초에 윤태호 작가가 원작 속 해국의 외모를 박해일을 모델로 두고 그렸기에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했다.

<짐승의 끝>

<늑대소년> <승리호>의 감독 조성희의 첫 장편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이다. 이른바 학생 영화에 박해일 같은 유명배우가 참여해 화제가 됐다. 아이를 낳으러 고향으로 가는 순영(이민지)은 택시에서 야구모자를 쓴 남자(박해일)를 만나고, 그가 곧 종말이라고 말하자 정말 세상은 종말을 맞는다. 도통 이상한 계시를 내리는 듯한 야구모자는 초반 이후엔 (현재로서) 등장하지 않지만, 박해일의 목소리는 러닝타임 내내 영화를 맴돈다. 

<최종병기 활>

김한민 감독은 박용우 엄태웅 주연의 <핸드폰>을 거쳐 병자호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최종병기 활>(2011)에 다시 한번 박해일을 캐스팅 했다. 역적의 누명을 쓴 부모를 잃고 여동생 자인(문채원)과 성장한 명궁 남이(박해일)는 혼례날 자인이 청나라군에게 납치 당하자 그들을 추적한다. <최종병기 활>은 747만 관객을 동원해 현재까지도 박해일의 최고 흥행작 중 하나로 남아 있고, 그는 남이 역으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은교>

박범신의 소설 <은교>를 영화로 옮겼다. <모던보이>와 (시나리오를 쓴) <이끼>의 정지우 감독은 17살 소녀 은교(김고은)를 흠모하게 된 70대 시인 이적요 역에 박해일을 기용해 편애를 이어갔다. 촬영 때마다 8시간의 특수분장을 감행하면서 30대 중반의 박해일을 캐스팅 한 건, 노년의 육체에 여전히 사랑을 감각하고 그것이 질투와 증오까지 번지는 생생한 마음을 아우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령화 가족>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을 각색한 작품. 데뷔작이 망하고 아내에게 이혼 당할 위기에 처해 영화감독 오인모는 제목 속 그 가족의 둘째아들이다. 실패를 직면한 처지와 냉소적인 태도의 둘째아들이라는 점에서 <괴물>의 박현규를 떠오르기도. 따로 보면 인모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지만, 형 한모(윤제문)와 동생 미연(공효진)에 비하면 그나마 이성적인 편이다.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고령화 가족>(2013)은 무엇보다 윤여정, 공효진, 윤제문과의 앙상블을 보는 맛이 있다.

<경주>

중국 조선족 출신 감독 장률은 <경주>(2014)를 시작으로 <필름시대사랑>(2015),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등 박해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세 작품을 연출했다. <경주>의 주인공인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은 7년 전 경주의 찻집에서 본 춘화를 다시 보기 위해 경주로 와서 두 여자를 만난다. 지금껏 박해일이 거쳐온 캐릭터 중 가장 완만한데, 그래서 후반부의 최현과 공윤희(신민아) 사이의 관능이 터질 듯이 부푼다. 

<제보자>

박해일을 처음 영화계에 소개한 임순례 감독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13년 만에 박해일을 기용해 황우석의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을 소재로 한 <제보자>(2014)를 만들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한 후 교류를 한 건 아니었지만, 박해일은 임순례 작품이라는 점만 믿고 시나리오도 읽지 않은 채 출연을 결정했다. 그는 MBC 프로듀서 한학수를 모델로 한 윤민철 역을 맡아, 조작의 증거를 찾아낸 일등공신이 언론인이라 설정한 영화를 이끌어간다.

<나의 독재자>

<나의 독재자>(2014)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의 대역 배우로 합격했지만 출연이 무산되고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믿는 성근(설경구)과 그의 아들 태식(박해일)의 이야기다. 아버지 때문에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못 본 태식은 다단계로 건강보조기구를 팔면서 빚더미에도 강남에 거주하며 외제차를 끌고 다닌다. 실제로 20대 초에 다단계에서 잠시 일했던 박해일은 태식의 만만치 않은 삶에 깊이 집중할 수 있었다고. 

<덕혜옹주>

허진호 감독이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를 각색한 영화. 실존인물을 내세웠지만, 박해일이 연기한 김장한은 특히 영화적인 설정이 많이 더해진 인물이다. 역사 속 김장한은 덕혜옹주가 일본인과 결혼하는 걸 막기 위해 정략결혼 했던 인물로만 알려져 있는데, 영화 <덕혜옹주>(2016)의 김장한은 (로맨스 장인 허진호의 영화답게) 사랑하는 덕혜옹주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면모가 강조됐다. 박찬욱 감독은 <덕혜옹주> 속 올곧고 충직한 김장한을 보고 <헤어질 결심>의 해준 역에 박해일을 정했다. 

<남한산성>

<최종병기 활>에서 박해일이 병자호란 시기의 명궁을 연기했다면, 김훈의 소설을 영화화 한 <남한산성>(2017)에서는 같은 시기 조선의 왕 인조 역을 맡았다. 각본을 쓸 때부터 인조에 박해일을 정해뒀던 황동혁 감독은 스케줄 문제로 여러 차례 섭외를 고사한 박해일을 삼고초려 끝에 캐스팅 했다. 박해일을 비롯한 김윤석 이병헌 등 <남한산성>의 배우들은 위기에 봉착한 실존인물이 감당했던 고뇌를 끄집어내 영화 속 음울한 공기를 만들어갔다. 액션을 덜고 '말'에 집중한 작품이라 배우들의 진면목을 만나는 쾌감이 대단하다.

<나랏말싸미>

괴랄한 부조리극 <상류사회>(2018) 다음으로 작업한 한글 창제를 소재로 한 시대극 <나랏말싸미>(2019)에선 승려 신미를 연기했다. 송강호와 박해일이 오랜만에 협업해 신미가 세종과 함께 한글을 만드는 과정을 담았지만, 역사 왜곡 논란으로 어마어마한 혹평이 쏟아져, 조선을 소재로 한 전작 <덕혜옹주> <남한산성>과 달리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2022)의 주인공 장해준은 기존의 경찰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용의자에게 젠틀하고, 한시의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살인사건의 용의자 서래(탕웨이)가 "같은 종족"임을 직감하고 그녀를 사랑하면서 "품위 있는" 경찰로서 서서히 '붕괴'된다. <헤어질 결심> 속 해준이 절절한 건 그가 경찰로서 무너지고 깨어졌을지언정 서래를 향한 사랑만큼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한산: 용의 출현>

최민식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이순신 장군 역에 기용한 <명량>으로 전무후무할 흥행 기록을 세운 김한민 감독은 각자 다른 배우를 내세운 이순신 3부작을 기획했다. <명량>의 5년 전 시점을 그린 프리퀄 <한산: 용의 출현>(2022)에선 박해일이 이순신을 연기했다. 신파에 기대는 바가 컸던 최민식의 이순신 '장군'과 달리 박해일의 이순신은 '선비'적인 면모가 강조돼 시리즈의 별격을 줬다. 이미 촬영을 마친 속편 <노량: 죽음의 바다>에선 김윤석이 이순신을 연기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