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지도 벌써 77년이 지났다. 광복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민중들의 심정을 결코 헤아릴 수 없겠지만, “그날이 오면”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다는 당시 문인들의 목소리로 비추어보며 그날의 기쁨을 더듬더듬 추측해본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했다는 그들의 마음, 한, 정신은 2022년 대한민국에 여전히 남아있을까. 광복절이 그저 빨간날이 되어버린 지금이지만,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할 이야기는 분명 존재한다. 오늘은 광복절을 기념하여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큰 따옴표 안에 있는 구절들은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에서 따온 문구다)
<항거:유관순 이야기>(2019)
감독 조민호
출연 고아성,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 류경수
3.1 운동이 일어난 지, 103년이 지났다. 인간이 되어서 총칼 앞에서 어찌 두려움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두려움 앞에서 목놓아 외쳤다. 유관순은 그 중심에서 시대에 항거했다. 1919년 3개월간 전국적으로 진행된 만세 항거는 일제 강점기 내내 항일운동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다. 유관순이 몸소 실천한 ‘자유’에 대한 열망은 고문으로 꺾이지 않았다. “자유? 하나뿐인 목숨을 내가 바라는 대로 쓰는 거”라는 대사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를 빼앗긴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가 고통과 두려움 앞에 맞서 내놓은 자유란 그런 것이었다. 그의 나이는 고작 17살이었다.
영화는 고문으로 고통받다 18살 나이로 순국하기 전 유관순의 1년여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갖은 고문 끝에 옥중 사망했다”는 한 줄 짜리 내용 뒤에 숨겨졌던 그의 시간들을 105분이라는 러닝타임으로 풀어냈는데, 그 과정이 무척이나 담담하고 또 강인하다. 흑백 처리 된 화면은 유관순(고아성)의 형형한 눈빛을 더욱 깊이 있게 담아내는 역할을 했다.

- 항거:유관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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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민호
출연 고아성,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 류경수
개봉 2019.02.27.
<동주>(2015)
감독 이준익
출연 강하늘, 박정민, 김인우
언어를 빼앗긴다는 건 단순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 그 이상이다. 언어에는 민족의 문화와 정신이 담겨 있고 이를 빼앗는 건 나라의 문화 자체를 말살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한민족이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고자 했다. 역사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그들은 언어에 깃든 정신을 말살하고자 했으나, 숨쉬듯 살아있는 언어를 폭력으로 누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주>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꾼 윤동주(강하늘)의 삶을 정직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시인 윤동주의 청년 시절과 그의 사촌이자 벗 송몽규(박정민)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며 윤동주의 고뇌를 들여다본다. 두 사람 모두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걸었던 길은 달랐다. 송몽규는 독립 운동에 매진하고, 윤동주는 어떠한 순간에도 부끄러워하며 시를 써내려갔다. 강하늘과 박정민의 열연이 돋보인 작품으로, 이준익 감독의 시대극 필모그래피에 방점을 찍기도 했다.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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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준익
출연 강하늘, 박정민, 김인우
개봉 2016.02.17.
<아이 캔 스피크>(2017)
감독 김현석
출연 나문희, 이제훈
<아이 캔 스피크>는 민원을 너무 많이 넣어 도깨비 할매라 불리는 옥분(나문희)이 원칙주의를 앞세우는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줄거리만 봐서는 도무지 광복절에 볼만한 영화가 아닌 듯하다. 고집불통 할머니와 인간미 없는 공무원이 티격태격하다가 정을 쌓는 영화가 아닐까, 싶지만 영화는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위 ‘위안부’라 불리는 일본군 성노예제를 독특하고 발랄하게 비틀어낸 작품으로 상극인 두 캐릭터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지만 동시에 옥분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분위기는 전환된다.
<아이 캔 스피크>는 2007년 미 하원 청문회에서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에 대해 증언했던 이용수 할머니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역사적 증언의 시작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내가 증거예요”라고 말하는 이의 심정은 어떠할까. 일본의 공격과 비난 속에서 “예스, 아이 캔 스피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아이 캔 스피크>는 지금까지 단순히 분노해왔던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문제를 증언과 역사적 책임이라는 당연하지만 지금까지 다뤄지지 않은 부분을 조명한다.

- 아이 캔 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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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현석
출연 나문희, 이제훈
개봉 2017.09.21.
<눈길>(2017)
감독 이나정
출연 김영옥, 김향기, 김새론, 조수향
1944년 일제강점기 말, 두 소녀가 있다. 가난하지만 씩씩한 소녀 종분(김향기)과 똑똑한 부잣집 아가씨 영애(김새론)는 한날 한시에 일본행 열차에 오른다. 유학길인줄로만 알았던 그 기차는 지옥행 열차였고, 두 소녀는 만주 위안부 수용소에서 지옥을 마주하게 된다. 일본군 성노예제인 위안부를 다룬 영화는 몇 편 있지만 <눈길>은 이들과 중요한 지점에서 다른 선택을 한다. 역사적 아픔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이를 직시하기 위해 ‘성폭력’ 장면을 넣은 <귀향>과 여타 영화들과는 달리 <눈길>에서는 성폭력 장면이 담기지 않았다. 이나정 감독은 이에 대해 “성폭력 관련 영화이기 때문에 미성년자 배우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작품을 그리길 바랐다. 일본군과 피해자 역할을 분리해서 촬영하도록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눈길>은 두 소녀의 시선을 통해 비극을 단순히 자극적인 요소로 사용하는 걸 방지했다. 그들에게도 일상은 존재했음을 알려줌으로써 소녀들이 실제로 살아있는 인물임을 강조했다. 또한 소녀가 할머니가 되었어도 상처는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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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나정
출연 김영옥, 김향기, 김새론, 조수향
개봉 2017.03.01.
<말모이>(2019)
감독 엄유나
출연 유해진, 윤계상
<말모이>는 창씨개명을 강요 당했던 1940년대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판수(유해진)는 글을 읽고 쓸줄 몰랐지만,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을 만나 국어사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민족의 언어를 집대성한 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우리말을 모으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고루하게만 느껴졌던 국어사전에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어려있는지 짐작케 한다.
툭 터놓고 얘기하자면 <말모이>의 영화적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엔 어렵다. 신파적인 요소가 적잖게 들어가 있고 투쟁의 모습 역시 어디서 본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관객들이 익히 보아왔던 클리셰적인 면모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내놓은 비극이 단순히 짜내는 슬픔이 아닌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일제의 탄압에 의해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그중 일부는 갖은 고문 끝에 사망하기도 했다. <말모이>의 뜻은 ‘말을 모은다’는 뜻을 갖고 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민족의 정신을 한데 모으는 작업은 신파보다는 민족 정신에 가깝다.

- 말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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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엄유나
출연 유해진, 윤계상
개봉 2019.01.09.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