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 이 표현이 늘 좋은 걸 의미하진 않는다. 영화계에서도 묵은지라고 하면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못하는, 이른바 '창고영화'를 이르는 말처럼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제작과 촬영에 심혈을 기울여서 끝내 완성한 영화라면 깊은 맛이 나니까 묵은지란 표현이 또 어울리는 것 같다. 드디어 13년 만에 개봉하는 <아바타: 물의 길>이나 19년 만에 돌아온 <2차 송환>처럼 오랜 시간에 거쳐 마침내 완성된 영화들을 정리했다.

※ 12년 촬영으로 유명한 <보이후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보이후드>

<바람의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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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저편>
<바람의 저편>

OTT 플랫폼 넷플릭스는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움직이는 사업체 중 하나다. 이용자 유치를 위해 자사 오리지널 콘텐츠로 그저 그런 영화를 양산하기도 하는데, 그런 와중에 의외로 엄청난 성취를 거두는 경우도 있다. <바람의 저편>도 넷플릭스의, 그야말로 영화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성취 중 하나다. <바람의 저편>은 <시민 케인>으로 데뷔한 천재, 오손 웰즈의 유작이다. 영화는 1970년대에 촬영을 마쳤지만, 오손 웰즈가 세상을 떠난 1985년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손 웰즈 작품의 권리는 정부 오야 코다르와 딸 베아트리스 웰즈 두 사람이 나눠갖게 됐고, 양측의 대립으로 <바람의 저편>은 긴 세월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그러다 넷플릭스, 이 영화에 출연한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 그리고 영화의 완성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 <바람의 저편>을 완성하고자 본격적으로 힘을 합친다. 코다르와 웰즈 또한 마침내 화해하면서 세계 각국에 잠들어있던 <바람의 저편> 촬영 필름을 모을 수 있었다. 사운드가 유실된 부분을 복원하고 웰즈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편집한 <바람의 저편>은 최대한 오손 웰즈의 뜻에 가깝게 복원됐다. 

이 영화의 복원이 특히 귀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피터 보그다노비치처럼 감독으로 유명한 존 휴스턴이 출연한 영화이기 때문. <차이나타운>의 노아 크로스를 연기했던 존 휴스턴은 이 영화에서 마지막 걸작을 준비하는 제이크 J. 한나포드 감독을 연기했다. 그러니까 <바람의 저편>은 거장 오손 웰즈가 영화에 바치는 마지막 불꽃이자, 감독을 연기한 감독이 등장하는 특별한 영화이다. 물론 이걸 '완성'이라고 해야 할지 '복원'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바람의 저편>은 넷플릭스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48년 만에 관객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바람의 저편> 촬영장의 오손 웰즈, 피터 보그다노비치, 존 휴스턴
바람의 저편

감독 오손 웰즈

출연 스테판 오드랑, 피터 보그다노비치, 끌로드 샤브롤, 카메론 크로우, 게리 그레이버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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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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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가 알렉산드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아름답게 담아내기 위해 4년간 촬영했다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영화는 굳이 말하면 시간과의 싸움이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나 효율적인 일정으로 만드느냐'는 제작 예산, 제작진의 역량 평가와 직결한다. 그런 영화계에서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하 <더 폴>)은 희귀종이다. 자그마치 4년 반이나 촬영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매일매일 촬영하면서 그만큼 걸린 것은 아니다. 촬영 장소가 전 세계에 퍼져있었기에 일어난 일이다. 

<더 폴>은 부상을 입은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가 같은 병원의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는다. 이 극중극은 오디어스 총독에게 복수하려는 4인방의 모험이 그려지는데, 굉장히 초현실적이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로 모험담을 채웠다. 그래서 로케이션을 찾는 데만 17년이 걸렸고, 전 세계를 돌면서 촬영하는데 4년 반이 걸렸다. 이 4년이란 시간 때문에 생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바로 키탄카 언타루가 성장하는 모습이 영화에 그대로 담긴 것이다. 무슨 영화를 4년이나 걸려 찍어 할 수도 있지만, <더 폴>을 보면 매 컷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웬만하면 CG로 배경을 만드는 세태 속에 <더 폴>의 발로 뛰는 아날로그 촬영이 포착한 풍광은 그야말로 국보급이다.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감독 타셈 싱

출연 리 페이스, 카틴카 언타루

개봉 200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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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티 앤 레드 스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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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티 앤 레드 스트링>
<블러드 티 앤 레드 스트링>
<블러드 티 앤 레드 스트링>

<블러드 티 앤 레드 스트링>이란 낯선 제목의 이 영화는 2006년 공개됐다. 13년이나 공들여 만들었는데, 별다른 개봉 절차 없이 DVD로 직행한 건 이 영화가 처음부터 감독 혼자 제작한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애니메이션 중 가장 손이 많이 간다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감독 크리스티안 세가프스케는 13년 동안 묵묵히 <블러드 티 앤 레드 스트링>을 제작했고, 음악만 마크 그로든의 힘을 빌렸다. 영화의 스토리는 귀족 계층의 흰쥐들과 떡갈나무 아래 사는 생명체들이 인형 하나를 두고 대립하는 내용이다. 크리스티안 세가프스케는 지금도 모금 후원 사이트를 통해 제작비를 마련하며 <시드 인 더 샌드>(Seed in the Sand)라는 작품을 1인 제작하고 있다. <시드 인 더 샌드>는 2023년 공개 예정이라고.

크리스티안 세가프스케의 차기작 <시드 인 더 샌드>
이미지 준비중
블러드 티 앤 레드 스트링

감독 크리스티안 세가프스케

출연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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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 & <2차 송환>
12년 19년 

<송환>
<2차 송환>. 스틸컷부터 시대의 흐름이 엿보인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끈기' 두 글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기를 다룬 <송환>은 1992년부터 그들이 송환된 2000년까지의 과정을 담아내 전 세계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여전히 휴전 상태이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 중인 한반도의 풍경이 비전향 장기수라는 특수한 위치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정확하게 드러났다.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고 상을 수상하면서 김동원 감독은 송환이 끝나지 않았으니 <송환2>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넌지시 비췄는데, 2022년에 이르러서야 그 결실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 <2차 송환>은 제목처럼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 이후 강제 전향 장기수들의 2차 송환 운동을 담았다. 전작 <송환>과 연결 지으면 김동원 감독은 약 30년간의 세월을 장기수를 조명하는 데 보낸 셈이다.

송환

감독 김동원

출연 조창손, 김선명, 김영식, 류한욱, 김석형, 신인영, 진태윤, 안학섭, 함세환

개봉 200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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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송환

감독 김동원

출연 김영식

개봉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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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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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지구>
<은빛 지구>
<은빛 지구>

영화 한 편의 제작 중단. 그것이 역사적 비극이 될 수 있을까. 안제이 주와프스키의 <은빛 지구>는 그 대답이 될지 모르겠다. 자신의 할아버지 예지 주와프스키의 「달 3부작」을 옮긴 <은빛 지구>는 외계 행성에 도착해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하려는 과학자들을 그린다. (<솔라리스>로 대표되는) 동부 유럽 SF가 그렇듯 <은빛 지구>도 표면적으론 우주와 개척을 말하지만 사변적인 철학과 종교적 상징으로 내면을 파고드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이 당시 정부에게 용인되지 못했던 듯하다. 촬영 전도 아니고, 촬영 후도 아닌 촬영 종료 2주 전, 폴란드 정부는 <은빛 지구> 촬영을 중단하고 모든 자료를 파기하라고 명령한다. 안제이 주와프스키 감독과 제작진은 비밀스럽게 촬영본과 몇몇 자료들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 촬영된 <은빛 지구>는 시간이 한참 지나 1988년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될 수 있었다. 촬영을 모두 끝낸 건 아니니 감독의 비전이 100% 실현된 버전은 당연히 아니었으나 외압에 맞서 탄생한 영화로 그 가치는 충분했다. 훗날 폴란드의 후배 영화인 쿠바 미쿠르다는 이 <은빛 지구>가 어떻게 다시 '부활'했는지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은빛 지구로의 탈출>을 만들었다. 

은빛 지구

감독 안제이 주와프스키

출연 안드레 세베린, 예르지 트렐라, 그라즈나 들락, 발데마르 코우나키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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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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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의 이야기>
유리 노르슈테인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마지막은 현재 40년 넘게 '제작 중'에 머물러있는 애니메이션이다. 니콜라이 고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외투>는 1981년 제작에 착수했다. 컷 아웃 애니메이션의 대가 유리 노르슈테인(Yuri Norstein)의 차기 프로젝트였다. 컷 아웃 애니메이션은 자른 종이로 구성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당연히 시간이나 자본이 많이 드는 분야이긴 한데, 그래도 40년이 넘게 이어지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노르슈테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애니메이션 회사가 망하고, 노르슈테인의 절친이자 <외투> 촬영 감독 알렉산드르 주콥스키가 1999년 세상을 떠났으며, 하필 흑백 필름을 인화하는 곳이 러시아에 없어서 자체적으로 인화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도 노르슈테인은 <외투>를 완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적어도 절반 이상은 작업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40대에 착수한 프로젝트를 80대가 되도록 끝내지 못하고 있으니 팬들 입장에선 부디 그 장인 정신의 끝을 무사히 보기만 바라고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