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권리, 인종적 권리 그리고 최근에는 동성애자의 권리까지. 그동안 약자의 권리 보호를 주장하는 많은 영화가 쏟아져 나왔고, 우리 사회는 이 영화들이 던지는 메시지를 점진적으로, 하지만 분명히 수용해왔다. 그에 반해 장애인에 대한 영화적 수용은 상대적으로 훨씬 조용한 가운데 더디게 진행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장애인 배우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 비중이 낮은 조연이나 단역을 아주 가끔 맡을 뿐이다. 장애인 역할은 '장애를 연기하는 비장애인 배우'가 맡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주요 영화제에서 장애인 배우의 수상도 아직이다. 그렇다고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올 초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정은혜, 이소별 배우가 전면에 나서며 시청자들의 환호를 샀다. 장애를 가진 배우가 TV 드라마에 주·조연급으로 등장한 첫 케이스였다.
우리는 '보통'과 다르게 보이는 존재를 회피하도록 학습되었다. <우리들의 블루스> 정준(김우빈)의 고백처럼 영희(정은혜)를 대하는 법을 학교, 집, 회사 그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기에 그를 맞닥뜨리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쳐다보지 않는 것이 '예의'라며 외면한다. 외면된 시선이 당도한 곳에 똬리를 트는 것이 영화다. 영화는 습관적 회피의 전복을 위한 탁월한 매체다. 영화는 편견과 관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장을 만들고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서 대중에게 직접적이고 친밀한 대화를 시도한다.
한국 영화 속 장애는 몇몇 탁월한 배우들로 인해 '연기되는 것'이었고, 그 나름의 찬사와 성과도 획득했다. 하지만 Nothing about us without us(우리 없이 우리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라는 유명 장애인권 운동의 모토가 말하는 것처럼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말해줄 적임자는 다름 아닌 장애를 가진 당사자이다. 그들이 연기할 때, 비장애인들을 위해, 비장애인들에 의해 창조된 대중문화가 빚어낸 편견과 단편적 이해의 편협성이 비로소 소거될 수 있다.
국내 등록장애인 수는 지난해 기준 264만 명에 달하며 대략 전 국민의 4% 수준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미국 성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으로 추정한다. 장애 혐오 발언이 당연시되던 시대를 관통하고, 우생학의 창시자인 '골턴', 장애인을 가스실로 내몬 '히틀러'를 고통스레 겪어내며 오늘에 당도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응당 보여야 할 만큼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
한국 영화에서 더 많은 장애인 연기자를 볼 수 있길 희망하며 오늘은 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선 영화를 모아봤다.
<런>(2020), 클로이 역 키에라 엘런
한정된 공간, 단순한 인물 구성으로 스릴러를 구성한다면 영화 <런>이 최대치를 구현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 아닐까? <런>의 공간 배경은 '집'이며 영화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도 모녀로 단출하다. 하지만 익숙한 인물이 낯설어지고 안전한 공간이 위험해질 때 그 긴장감은 극한을 향해 치닫고 서스펜스는 배가 된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외딴 집에서 엄마와 함께 사는 '클로이'(키에라 앨런). 그런 딸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엄마 '다이앤'(사라 폴슨). 남들과 떨어진 호젓한 곳에서 살아가는 모녀는 언뜻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모녀의 아름다운 관계는 클로이가 식탁에 놓인 장바구니 속에서 수상한 약을 발견하면서 금이 간다. 클로이에게 다이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이앤에게 클로이가 필요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다이앤이 클로이의 장애를 유지시켜 왔음이 드러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비장애인에게는 휠체어가 제한적 이동 수단에 불과하겠지만 다리가 불편한 이에겐 세상과 참여하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특히나 배우가 실제 휠체어 사용자라면 그 의미는 배가 될 터. 클로이역의 키에라 엘렌은 실제 장애로 휠체어를 타는데, 장애가 있는 배우가 스릴러에 출연한 것은 Susan Peters 이후 70년 만이다.
키에라 앨런은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존재감과 소름 돋는 열연을 펼쳐 보이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로 떠올랐다. 실제 휠체어 사용자가 아니면 표현해낼 수 없는 디테일한 포인트를 살려 가슴 졸이는 장면을 만들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참고로 클로이가 일어나 걷는 마지막 장면은 대역에 배우 얼굴을 CG로 합성한 것이라고.

- 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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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아니쉬 차간티
출연 사라 폴슨, 키에라 앨런
개봉 2020.11.20.
<시라노>(2021), 시라노 역 피터 딘클리지
10명의 남자와 싸울 용기는 있지만 평생을 사랑해 온 한 여자에게 고백할 용기만큼은 없는 작은 시인 시라노(피터 딘클리지)는 진실된 사랑을 찾는 여자 록산(헤일리 베넷)을 남몰래 사랑한다. 그런 록산 앞에 눈부신 남자 크리스티앙(케빈 해리슨 주니어)이 나타나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고 마는데, 록산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크리스티앙은 시라노가 대신 써준 편지로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영화 <시라노>(2021)는 희곡 '시라노'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과의 큰 차이점은 희곡에서 주인공 시라노의 콤플렉스가 '코의 크기'였다면 영화 <시라노>에서 그의 콤플렉스는 '키'라는 점이다. 키 132cm의 배우 피터 딘클리지는 자신이 가진 '왜소증'을 살려 영화적 콤플렉스로 소화한다. <왕좌의 게임>에서 티리온 라니스터 역을 맡아 에미상과 골든글로브를 휩쓴 피터 딘클리지는 영화 <시라노>를 통해 또 한 번 압도적인 연기력을 펼친다.
그가 연기하는 에너지로 폭발하는 시라노, 시로 사랑을 노래하는 지적인 시라노, 순애보적 사랑을 목숨으로 증명하는 록산바보 시라노를 보고 있노라면 놀랄 정도로 그의 키에 시선을 두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 시선이 닿는 곳에는 그저 카리스마 넘치는,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한 배우가 있을 뿐이다.

- 시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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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 라이트
출연 피터 딘클리지, 헤일리 베넷, 켈빈 해리슨 주니어
개봉 2022.02.23.
<코다(CODA)>(2022), 트로이 코처, 다니엘 듀런트, 말리 매트린
미국에선 장애인 배역을 장애인 배우가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트로이 코처가 영화 <코다>에서 농인 아버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러한 인식 전환이 있었다.
영화 <코다(CODA)>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준말로 2014년작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의 영어판 리메이크이다. 원작 <미라클 벨리에>에서 청인들이 수어를 배워 농인 연기를 한 것과 달리, <코다>에서는 이들 캐릭터의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배우들도 실제 농인들을 캐스팅했다.
주인공 루비(에밀리아 존스)는 1인분 이상의 삶을 산다. 루비는 부모와 오빠가 모두 농인, 즉 CODA(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SODA(Sibling Of Deaf Adult, 농인의 비장애형제)로, 정확한 정체성을 따지자면 사실 코다 중에서도 OHCODA(Only Hearing Child of Deaf Adult, 농인 부모의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자녀. 농인 가족 중 유일한 청인)이다. 다양한 카테고리에 속하는 만큼, 3배 더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 뒤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자신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이기에.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악 대학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인다.
스토리가 널리 알려져 있어 자칫 지루해질 수 있음에도 뛰어난 영상미와 음악은 영화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고 장애인을 재현하는 방식은 거침없어 새롭다. 딸의 남자친구에게 콘돔 사용법을 리얼한 수화로 가르치는 장면이나 부부의 섹스 라이프를 딸을 통해 설명하는 장면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더 큰 웃음을 준다.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은연중에 내포하는 수동적 이미지를 깨고 적당히 속물적이고 이기적이며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맞서 자신들의 의사를 확실히 표시하는 모습도 반갑다.
장애를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 그 안에서 즐거운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코다>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각을 가진 가족 구성원들의 반목, 용기, 망설임, 화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삶의 의미를 질문한다. 흔히 '보통'의 가족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 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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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션 헤이더
출연 에밀리아 존스, 퍼디아 월시-필로, 트로이 코처, 다니엘 듀런트, 말리 매트린, 에우헤니오 데르베스, 에이미 포사이스
개봉 2021.08.31.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