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순간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4일 밤 경북 봉화산 광산 갱도 매몰 사고로 고립됐던 두 명의 광부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고립된 지 221시간, 약 9일 만이었다. 조장 박씨는 막장에 미리 준비해둔 물품들이 생환에 밑거름이 됐다며 “우리를 도와주려고 신이 막장에 미리 필요물품을 가져다 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라고 했지만, 저체온증을 염려해 막장에 준비된 나무판자와 톱, 비닐을 이용해 움막을 만든 것은 그들의 판단이었고, 산소용접기의 화력을 이용해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인 것은 그들의 기지였다. 살기 위해 괭이를 들고 막혀 있는 암석을 10m가량 파내려 간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손과 발과 온몸이었다. 우연이 작동한 순간, 그 우연을 놓치지 않고 움켜쥔 건 인간의 의지였으며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수많은 억울한 죽음 앞, 상실감과 무력감이 심장이 뿜어내는 피를 따라 전신을 휘감는다. 하지만 일상은 계속되기에, 우리는 회복되지 않는 빈자리를 어떻게든 끌어안고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절망 앞에서도 찌그러진 생수병을 신발 삼아 밭을 일구는 <김씨 표류기>의 '김씨'처럼,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다음 문제를 해결하며 그렇게 화성의 하루를 또 살아낸 <마션>의 '마크 와트니'처럼.
생환 광부들이 10·29 참사로 무력해진 우리들에게 “인간은 쉬 꺾이지 않는다. 계속 살아가야 한다.”라는 위로와 희망의 말을 전하는 듯해 울컥한 하루하루다. 칠흑 같은 절망 앞에서도 불굴의 의지 불태우는 영화를 보며 오늘을 견뎌보자.
<33> (2016)
감독: 패트리시아 리건
출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호드리구 산토루, 줄리엣 비노쉬, 나오미 스콧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2010년 8월 5일, 칠레 산호세 광산이 붕괴해 매몰된 광부 33인이 69일 만에 전원 구조된 사건, 기억하는 이 있을 것이다. 영화 <33>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사상 최고 깊이에서 누구보다 오래 생존한 광부 33인의 희망과 기적을 그린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산호세 광산에서는 100년 넘게 금과 구리를 채굴 해왔다. 작업 전 반장 루이스는 갱도가 불안정하다는 우려를 보고했지만 광산 소유주 카스티요는 이를 묵살한다. 그렇게 작업자들은 트럭에 올라타 광산의 유일한 입구이자 출구인 좁은 터널을 통해 광산으로 들어가 작업을 시작하고 갱도는 곧 무너진다.
섭씨 32도, 습도 95%의 700M 지하에 매몰된 33인의 광부들. 대피소에는 사흘 치의 식수와 식량만이 남아있다. 지하에서는 남은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고, 마실 물을 확보하는 등 생존을 위해 사투가 벌어지고, 지상에서는 구조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지며 목숨에 가격붙이기가 한창이다. 대다수 광부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됐으나 매몰 17일 만에 ‘피신처에 33명이 모두 생존해 있다’고 적힌 쪽지가 탐침봉에서 발견되면서 광부들의 생존 사실이 처음 알려졌고, 전 세계의 이목이 이들에게 집중된다.
흥행이나 영화의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꺾이지 않는 인간 생명력을 보여주는 실화가 주는 힘은 크다. 재난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과 책임, 무책임한 기업, 산업 재해 등 영화를 둘러싼 배경 또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며 깊은 공감을 선사한다.
씁쓸하지만, 사고를 방조한 산호세 광산회사는 형사 과실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지 않았으며 광부들은 손해를 보상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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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패트리시아 리건
출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로드리고 산토로, 줄리엣 비노쉬
개봉 2016.04.07.
<127시간> (2010)
감독: 대니 보일
출연: 제임스 프랭코, 케이트 마라
그는 여전히 산악을 즐긴다. 하지만 그는 이제 항상 목적지를 알리고 떠난다.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년에서 홀로 등반을 하던 아론(제임스 프랭코)은 좁은 절벽 사이를 타고 내려가다 육중한 바위에 오른팔이 끼인 채 절벽 사이에 갇히게 된다. 닷새간 홀로 사투를 벌이다 결국 자신의 팔을 직접 절단할 결심을 하는 아론. 영화는 탈출을 위해 무딘 중국산 칼로 짓눌린 팔을 절단하기 위해 뼈를 부러 뜨리고 살을 자르는 장면을 리얼하게 묘사해 화제가 됐다. 압도적 배우의 연기나 팔을 절단시키는 리얼한 사운드 등의 조화가 신묘히 어우러져 보고 있는 것만으로 목이 타고, 손톱을 물어 뜯게 된다. 참고로 실존 인물이 팔을 절단하는 데에는 40분 이상이 걸렸지만, 영화에서는 3분 정도로 압축했다고.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아론의 심리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과정에 좀 더 초점이 맞춰진 중후반 이야기는 환각적이기도 하다. 실존 인물 ‘아론 랠스턴’의 생존기를 바탕으로 각색된 이 처절한 영화는 2008년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쓴 대니 보일 감독이 만들었다. ‘아론 랠스턴’으로 분해 원맨쇼를 펼친 제임스 프랭코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산악을 즐긴다. 하지만 그는 이제 항상 목적지를 알리고 떠난다."라는 영화의 마지막 문구에서 불의의 사고로 팔은 잃었어도 삶의 의지는 한층 탱천한 경이로운 한 인간이 읽힌다.

- 127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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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니 보일
출연 제임스 프랭코
개봉 2011.02.17.
<마션> (2015)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맷 데이먼, 제시카 채스테인, 제프 다니엘스
우주에선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어느 순간 모든 게 틀어지고
‘이제 끝이구나’하는 순간이 올 거야
‘이렇게 끝나는구나’
포기하고 죽을 게 아니라면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그게 전부다
무작정 시작하는 거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문제를 해결하고
그다음 문제도..
그러다 보면 살아서 돌아오게 된다.
<마션>은 <캐스트 어웨이>의 우주적 스케일이다. <마션>과 <127시간> 모두 영화의 상당 부분을 조난당한 주인공 1인이 채우지만, <127시간>이 살을 찢고, 뼈를 가르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주인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을 가리고 내 팔을 꼬집게 되는 영화라면, 마션은 화성판 <나 혼자 산다>를 보는 것처럼 편하기만 하다. 평화롭고 낙관적인 주인공의 태도는 조난당한 자의 그것이 아니다.
NASA 아레스3탐사대는 화성을 탐사하던 중 모래 폭풍을 만나고 팀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사망했다고 판단, 그를 남기고 떠난다. 극적으로 생존한 마크 와트니는 남은 식량과 기발한 재치로 화성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으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려 노력한다. 마침내,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지구에 알리게 된 마크 와트니 NASA는 총력을 기울여 마크 와트니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아레스 3 탐사대 또한 그를 구출하기 위해 그들만의 방법을 찾게 된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은 '내일 죽어도 오늘 감자를 기르겠다.'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화성에 비닐하우스를 짓겠다.' 등의 발랄한 평가를 남겼다. 화성에 도달한 인류의 미래에도 희망이 있을 거라는 거장 리들리 스콧의 범우주적 낙관론이 감자와 비닐하우스 위로 넘실댄다.

- 마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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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크리스틴 위그, 제시카 차스테인, 맷 데이먼, 케이트 마라, 제프 다니엘스, 세바스찬 스탠
개봉 2015.10.08.
<김씨표류기> (2009)
감독: 이해준
출연: 정재영, 정려원
팔을 자르는 잔인한 장면도, 극한의 절해고도 우주에 낙오되는 극적 설정도 없지만, 영화 <김씨표류기>는 앞서 언급한 영화 통틀어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가 가장 절절히 느껴지는 영화다. 그것은 아마도 채무, 구조조정, 사회적 고립 등 한국적 설정이 주는 공감 때문일 것이다.
남자 김씨(정재영)는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잘리고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도 모자라 빚까지 져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린 남자는 밤섬에서 눈을 뜬다. 밤섬 위로는 서강대교가 가로지르고 63빌딩이 위용을 과시하지만 이곳은 생태계 보존지역. 즉 사람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핸드폰 배터리는 없고, 목청껏 내지른 구조 요청도 무시당한다. 그렇게 물에 쓸려온 각종 쓰레기며 망가진 오리배를 거처 삼아 밤섬 생활에 적응해가던 어느 날, 김씨는 짜장라면 수프를 손에 넣게 된다. 수프의 사용을 고민하던 그는 면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소화되지 않은 곡물 씨앗을 찾아 새똥을 열심히 긁어모으고, 밭도 만든다. 천신만고 끝 마침내 옥수수가 열린다. 씨를 뿌리고 결실을 맺고 옥수수 낟알을 빻아 반죽을 만들고 면을 뽑아 한 그릇의 짜장면을 만드는데 걸린 시간 6개월. 마침내 역사적인 짜장면 먹방이 탄생한다.
러시아에는 “잠에서 깨었을 때 아무 고통이 없다면 죽은 줄 알라”는 말이 있다. 생의 의지가 없으면 격한 고통도 없다. 그렇기에 죽기로 결심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남자 김씨에게는 제일 살고 싶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까지 죽고 싶어 자살을 시도했던 이 남자는 무인도에서 사루비아의 달콤함에 빠지고 땀이 지닌 짠맛에 심취한다. 짜장면 만들기에 돌입하며 삶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 커진다. 오늘이 권태롭고 무력하다면, 생의 의지에 불 붙여줄 자신만의 "짜장면" 한번 만들어 보자. "짜장면은 희망"이니까.

- 김씨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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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해준
출연 정재영, 정려원
개봉 2009.05.14.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