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가장 희미하고 옅은 계절을 꼽자면, 단연 가을일 것이다. 조금만 옷을 잘못 입어도 땀을 진탕 흘리거나, 오들오들 떨며 감기에 걸리는 낭패를 보는 날씨. 9월 말까지만 해도 반팔 티셔츠를 걸치고 돌아다니는 이들이 더 많았다면, 11월 중순으로 향하는 지금은 코트보다 패딩이 군데군데 더 눈에 들어온다. 추위가 슬슬 소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요즘 같은 날씨에, 옆구리가 유달리 시린 이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얇게 입은 옷 탓인지, 아니면 순전히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가을은 외로움이라는 감정과 친숙하다. 오죽하면 ‘가을 탄다’라는 표현까지 있겠는가?

영화 <멋진 하루>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도 분명 가을을 심하게 타고 유독 옆구리가 시린 이들이 있을 것이다.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잎이 다 지기 전에, 가을에만 즐길 수 있는 세 편의 한국 영화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 한다. 봄날의 로맨스처럼 화사하진 않지만, 나름의 매력을 가진 가을 영화를 보다 보면 헛헛한 마음을 조금은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개 가득한 시애틀의 늦가을 <만추>
영화 <만추>

가을의 한국 영화를 논할 때,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무조건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현빈과 탕웨이가 미국 시애틀에서 찍은 가을 영화. 두 배우의 조합과 그 배우들이 등장하는 배경까지 고려하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들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설정이다. 게다가 탕웨이가 연기한 <만추>의 애나 역은 올 상반기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서래 앓이’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만추>


7년 간 남편을 살해한 죄로 수감되어있다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단 3일만 외박을 허가받을 모범수 애나의 모습에서, 자기 남편을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는 서래가 겹쳐 보인다. 무기력한 보폭과 경계심으로 가득 찬 표정, 하지만 특유의 묘한 매력을 지닌 눈빛에 <만추> 속 훈 (현빈 역)과 <헤어질 결심>의 해준 (박해일 역)은 모두 그녀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영화 <만추>

짧은 시간 동안 사랑하고 헤어져야 하는 두 남녀를 더 몰입하게 만드는 건 단연 가을날의 시애틀이 주는 습기 가득한 풍광이다. 훈과 애나가 시애틀 투어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버스 기사는 ‘원래 시애틀은 더럽게 춥고 안개가 가득한데, 오늘따라 유달리 맑고 날씨가 좋다’는 말을 꺼낸다. 내가 실제로 경험한 시애틀은 정말 ‘더럽게 춥고 안개로 가득한’ 도시였다. 여름에도 선선해서 아침저녁으로 긴 팔을 꺼내야만 할 정도니. 그런 시애틀의 가을은 앙상한 가지가 도드라지지만, 눈으로 뒤덮인 겨울은 아닌 채로 영화의 제목처럼 늦은 가을의 초상을 하고 있다. 트렌치코트를 옷장에서 꺼낼 수 있는 지금으로부터 2주 정도 보낼 짧은 늦가을은 여러분이 당장 <만추>를 보고 습기 찬 만추를 맞이할 이유가 될 것이다.

만추

감독 김태용

출연 현빈, 탕웨이

개봉 201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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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기엔 너무 멋진 당신 <멋진 하루>
영화 <멋진 하루>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를 만든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정우가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를 꼽았다. 그는 “이윤기와 하정우가 만들어낸 조병운이라는 캐릭터는 한국 영화사에서 기억될만한 남성 캐릭터”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멋진 하루>의 조병운은 마성의 매력을 가진 캐릭터다. 1년 전 350만원을 희수 (전도연 역)에게 빌린 채 헤어진 병운은 딱 1년 만에 경마장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다. 빌린 돈을 지금 당장 돌려 받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그녀를 앞에 두고 병운은 태연하게 자신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차근차근 돈을 꾸기 시작한다. 

영화 <멋진 하루>

대출을 대출로 돌려막는 모습라니. 돈을 꾸기 위해 쉽게 무릎을 내어주는 모습이나, 여자들과 히히덕거리는 모습만 보면 병운은 참 한심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곁에는 그를 도우려고 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넉살 좋게 고기를 굽고, KFC 버거 앞에서 깐깐하게 굴며, 스페인에서 막걸리집을 세우겠다는 그의 철없는 음식에 대한 지론을 듣고 있자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영화 <멋진 하루>

<만추>가 잘 시애틀의 모습을 앞세워 늦가을의 정취를 살려낸 영화라면, <멋진 하루>는 서울 구석구석의 가을을 어루만지는 솜씨가 일품인 영화다. 신사에서 한남대교를 타고 넘어가는 한남 오거리의 두무개다리, 2호선 외선 순환을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신설동에서 용답까지의 노선과 고가역 및 주차장들, 서소문의 곡선형의 아파트와 대흥의 오밀조밀한 저층 상가 건물들까지. 거의 15년 전 모습이라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서울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여전히 익숙한 공간들이 <멋진 하루>의 두 남녀 사이를 가득 채운다. 버티고개에서 약수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에 내겐 서울의 가을처럼 느껴지듯이, 여러분에게도 가을에 생각나는 서울의 어느 한 공간이 있을 테다. 만약 없다면, <멋진 하루>를 다시 보곤 새로운 가을의 서울을 찾아보기를.

멋진 하루

감독 이윤기

출연 전도연, 하정우

개봉 2008.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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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가을 영화의 강자 <조금만 더 가까이>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


앞선 두 영화는 그래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나름의 ‘가을 한국 영화’라는 리스트에 빈번하게 등장했겠지만, 김종관 감독의 <조금만 더 가까이>는 상대적으로 언급이 잘 안된다. 사실 김종관 감독은 <조제>, <아무도 없는 곳>, <더 테이블>처럼 여러 작품에서도 가을을 잘 담아낸, 숨은 가을 영화의 강자다. 윤계상과 정유미, 당시 홍대 인디신의 아이돌이었던 요조가 출연했던 <조금만 더 가까이>는 서로 다른 세 커플 (정확하게는 네 커플)이 가을을 보내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쌍의 커플들이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를 기억하는 관객들의 뇌리에는 당연히 은희 (정유미 역), 현오 (윤계상 역) 커플이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너 때문에 연애 불구가 되었어.

은희는 이미 헤어진 전 애인 현오에게 스토커처럼 달라붙어서 그를 괴롭힌다. 그가 그립거나 보고싶어서라기보단 상처를 주고도 멀쩡히 지내는 그가 너무 밉기 때문이다. 그가 탄 차에 멋대로 올라타곤, 밥을 먹자고 보채다가, 이내 산책하자고 하는 은희의 말을 현오는 툴툴거리며 따른다. 헤어진 둘 간의 관계를 굳이 정의하자면 요즘 말로 ‘혐관’에 가깝다. 밉다고 이야기하는 은희와 그런 은희를 마지못해 따라가는 현오는 서로의 애인이 존재함에도 걸핏하면 사랑을 나눌 것만 같다.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

이 미칠 듯이 아찔한 상황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단연 정유미의 매력이다. 당돌하게 야한 속옷을 입었다고 자랑하면서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하다가도, 너를 정말 미워하고 힘들어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그 감정의 변화를 감내할 배우가 누가 있을까? 정유미 말고는 그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둘이 함께 걷는 아파트 단지에는 금방 떨어진 낙엽이 그득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속 은희가 말한 연애 불구의 상태는 갓 떨어진 낙엽이 많은 가을에 어울린다. 그러니 혹여 지금 ‘연애 불구’ 상태의 놓인 사람이 있다면, 은희의 원망이 조금은 더 가깝게 들리지 않을까?

조금만 더 가까이

감독 김종관

출연 윤계상, 정유미, 윤희석, 요조

개봉 201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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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