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하는 월드컵이라니. 매번 월드컵은 뜨거운 열기가 가시지 않는 여름밤에 붉은 유니폼으로 수놓은 거리와 함께했다. 하물며 동네 주변 호프집과 치킨집도 치킨에 맥주를 하면서 월드컵을 보려던 이들로 만석이었다. 물론 11월에도 여전히 거리 응원과 치맥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다만, 불면의 밤을 모르는 이들과 뒤섞여 땀을 나누거나, 목구멍까지 시원한 생맥주로 열대야를 떨쳐내는 것이 어려워진 계절일 뿐이다.
올해만큼은 조금 낯선 계절, 낯선 환경으로 월드컵을 즐겨야겠지만,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라운드 위의 치열한 싸움과 시원한 중거리포 한 방, 그리고 꿈만 같은 감동의 드라마가 가득한 축구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붉은 악마의 기운을 북돋울 수 있는 축구 영화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11월 24일 밤 10시, 대한민국의 월드컵 첫 경기가 있기 전, 미리 맥주와 함께 같이 볼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이다.
<소림 축구>
주성치의 팬이라면, <소림 축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환장에 가까울 정도로 미친 타율의 웃음을 보장하는 <소림 축구>는 웰메이드 코미디로도 유명하지만, <소림 축구>는 밀레니엄을 보낸 이들에겐 완벽한 축구 영화다. 쿵푸와 축구의 조합이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한 쌍인 것처럼 보이지만, 90-0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이들이라면 이런 얼토당토않은 축구는 오히려 익숙할 것이다. 철두공의 강철같은 헤딩, 선풍지당퇴의 화려한 발재간, 경공수상표의 공중권 다툼 그리고 아성의 무쇠 다리 슈팅을 보고 있자면, 추억 속 오락실 앞에서 100원을 넣고 하던 테크모 월드컵 98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모두가 즐겨 쓰던 브라질의 바나나 슛이나 이탈리아의 슈퍼 스루패스, 독일의 파워 슛같은 기술은 분명 소림 형제들이 사용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주성치의 <소림 축구>와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화려한 쿵푸 기술과 배꼽이 찢어질 것 같은 유머 감각도 있겠지만, 쿵푸로부터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이 축구를 매개로 다시 모인다는 ‘팀 플레이’의 정신이 묻어 있는 서사도 한몫할 것이다. 아성의 무쇠 다리가 시원하게 골망을 가르는 장면을 보며 나머지 다섯 사형제들이 혼자 나가도 우승하겠다고 말하며 감탄할 때, 감독인 명봉은 "축구는 독불장군이 아니야. 팀워크야. 혼자서는 할 수 없어." 라는 말을 내뱉는다. 흩어진 형제들이 다시 모이고, 어려움 속에서 나타난 아매가 새로 팀에 녹아드는 과정을 보면서 축구는 진정 11명이 유기체처럼 함께하는 ‘집단’의 스포츠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소림 축구>는 진정한 월드컵 정신의 영화다.

- 소림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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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주성치
출연 주성치, 자오웨이, 오맹달
개봉 2002.05.17.
<골!>
사실, 축구를 좋아하는 영화광에게는 바이블 같은 영화는 따로 있다. 바로 <골!> 시리즈. 물론 시리즈 3은 최악의 영화 중 하나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영화의 1편만큼은 축구광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축구를 사랑한다면 살면서 한 번쯤은 수만명이 운집한 그라운드 위에서 스타급 플레이어들과 유럽 최고의 클럽에서 뛰어보고 싶다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기자 역시 중학생 시절, 리버풀 소속으로 스티브 제라드의 패스를 받아 루이스 수아레즈와 다니엘 스터리지와 함께 스리톱을 이루어 득점왕이 되는 꿈을 꾸곤 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가 되기도 하고, 유럽 대항전에서 메시와 즐라탄과 자웅을 겨뤄보는 삶. <골!>은 그런 꿈을 꾸어본 축구팬의 소원을 영상으로 이루게 해준 전설의 작품이다.
멕시코 출신 미국 밀입국 불법체류자의 아들 산티아고 뮤네즈가 우연찮은 계기로 유럽의 명문 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되어 팀을 챔피언스 리그로 이끈다는 단순한 이야기. 하지만, 비가 종일 오는 영국의 궂은 날씨에 진흙밭에서 치열하게 축구를 하는 장면이나, 램파드, 토레스, 제라드 등 당대 EPL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화려한 경기에 직접 뛰는 듯한 느낌을 주는 연출 기법은 꿈으로만 상상해온 이야기들을 실제로 형상화했다. 월드컵 경기 직전에 <골!>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골>을 보고 나면 축구 경기에 치맥이 간절해지기보다는, 축구화에 끈을 질끈 매고 그라운드 위로 달려가고 싶어질 테니까.

-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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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니 캐논
출연 쿠노 벡커, 스티븐 딜레인, 알렉산드로 니볼라
개봉 2005.11.04.
<92년의 여름>
축구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우승은 단연 언더독의 우승이다. 국가 대항전에서는 브라질,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전통의 강호들이 클럽 대항전이나 리그에서는 레알, 바르샤, 바이언, 맨시티, 리버풀 등 강팀이 우승하는 일은 사실 팬들로선 흥미롭지만 큰 감흥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그래서인지 언더독들의 우승은 축구의 역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장 기자가 기억할 수 있는 우승만 해도 챔스 03/04 무리뉴의 FC 포르투, 유로 2004 그리스, 11/12 리그앙의 몽펠리에, 15/16 EPL의 레스터 시티 정도는 나열할 수 있다. 규모가 크지 않거나, 최약체라고 평가받던 팀이 보란 듯 우승컵을 거머쥘 때의 쾌감. 이토록 극적인 순간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 바로 2015년 작품 <92년의 여름>이다.
<92년의 여름>은 유로 1992 대회에서 우승컵을 거머쥔 덴마크의 기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원래 덴마크는 유고슬라비아에 밀려 당시 예선에서 탈락했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전쟁을 이유로 대회 10일 전 대체 출전이 결정되었고, 조직력이 좋지 못한 덴마크는 엉겁결에 유로 1992에 합류했다. 그 누구도 그들이 우승할 것이라 예상한 이들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까지 국제 대회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던 덴마크였고, 준결승에선 전설의 오렌지 삼총사로 이뤄진 네덜란드를, 결승에선 브레메와 에펜베르크가 포진한 전차 군단 독일이었다. 이런 막강한 팀을 상대로 덴마크가 발휘한 힘은 팀워크와 강한 동기부여였다. 각자의 삶에서 포진한 어려움들을 극복해나가는 개개인이 모여 하나의 결집된 팀을 만들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약체라 평가받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필요한 모습이 바로 <92년의 여름>에서 드러나는 단합력과 용기가 아닐까? <92년의 여름>에서 느낄 수 있는 교훈을 업고 대표팀이 돌아올 조별리그 예선에서 각자의 간절함을 안고 치열하게 뛰는 공동의 투지를 기대해본다.

- 섬머 오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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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카스페르 바르포에드
출연 율리히 톰센, 미켈 폴스라르
개봉 미개봉
혹자는 스포츠에서 성과와 결과만이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승을 거둔 승자가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패배와 실패라는 단어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하지만, 축구를 다루는 영화는 우승의 영광과 승리에 영광만을 비추려 하지 않는다. <소림 축구> 속 잃어버린 꿈과 목표를 회복한 다섯 사형제의 모습과 <골>에서 드러나는 산티아고 뮤네즈의 빛나는 노력, 그리고 <92년의 여름>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간절함과 투지. 우승보다 빛나는 과정이 있다고 세 영화는 이야기한다. 물론 대표팀의 선전과 좋은 성적을 바라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그들의 투지와 열정 그리고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까? 그런 마음가짐은 대표팀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가 90분 동안 치열하게 뛰고, 휘슬이 부는 그 순간에 후련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