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 행성의 해양 생태계가 관객 마음을 적시고 고등학교 농구부가 심금을 울리는 지금, 조용하게 롱런하며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는 영화가 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는 2022년 11월 30일 개봉해 지금까지 상영되며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일본 실사 영화가 100만 관객을 달성한 건 자그마치 21년 만. <오세이사>는 불치병을 앓는 소녀와 그와 가짜 연애를 시작한 소년의 이야기.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본격화된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한국 관객들이 특히 사랑한 일본 멜로의 감성을 그대로 담았다.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일본 멜로 대표작과 근래 관객들의 선택을 받은 영화들을 함께 만나보자.


90~2000년대 = 일본 멜로의 전성기

<러브레터>(왼쪽), <비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일본 영화계의 멜로 부흥이 맞물려 많은 일본 멜로 영화가 한국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등공신이라면 지금도 재개봉을 거듭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러브레터>. 넓은 설원에서 '오겡키데스카'를 외치는 명장면으로 유명하다. <러브레터>를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이 장면이나 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 오랜 시간 오마주나 패러디로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노출됐다. 최초 개봉 당시 전국 관객수 집계는 없었는데, 서울 관객수만 64만 명으로 지금까지도 일본 실사 영화 관객수 1위를 지키고 있다. 특유의 청아한 이미지로 바다 건너 한국까지 장악한 히로스에 료코 주연 <비밀>도 흥행에 성공했다. 죽은 아내가 딸의 몸에 깃든다는 설정은 다소 징그럽지만, 료코의 매력이 그 호불호를 넘어선 것이다. <러브레터>와 마찬가지로 전국 관객수는 공식 기록이 없지만, 서울에서만 18만 명을 동원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왼쪽),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흔히 말하는 '신파', '최루성 멜로'라는 단어조차 아름답게 장식하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19만 명을 동원했으며 한국 영화로도 리메이크돼 한국 대중이 사랑하는 픽임을 증명했다. 평생에 한 번 있을 뜨거운 사랑을 공유하는 커플의 이야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그 강렬한 제목만큼 흥행에도 성공했다. 전국 48만 명 관객을 기록했다. 제목 어렵기로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영화를 다 본 뒤엔 제목의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게 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이 시기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개봉 당시 5개 관에서 상영했는데 4만 명을 동원했으니 그야말로 입소문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러브레터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나카야마 미호

개봉 1999.11.20. / 2022.12.08.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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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감독 이누도 잇신

출연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아라이 히로후미, 우에노 주리

개봉 2004.10.29. / 2016.03.17.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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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영화들이 폭풍처럼 한 차례 유행을 휩쓸고 난 후 일본 멜로 영화는 한국 대중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이 장르 특유의 매력을 사랑하는 관객들은 여전히 있었지만 대중적인 픽으로까지 번지지는 못하곤 했다. 그러다 2010년대 말부터, 몇몇 영화들이 위 영화들에 준하는 관심과 흥행을 이어가는데 성공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첫눈에 반해 고백한 에미(고나츠 나나)가 사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사람임을 알게 된 타카하시(후쿠시 소우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뜻 이게 무슨 말인가 싶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데 의외로 간단하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멜로 영화의 '불가항력적 이별'을 시간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한 사람과, 반대로 이제 사랑을 보내야만 하는 한 사람. 그것도 시간이란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야만 한다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미키 타카히로 감독이 영화화했다. 미키 타카히로 감독은 <양지의 그녀> <언덕길의 아폴론>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이고> 등을 연출해 일본 멜로 영화를 챙겨보는 관객에겐 익숙한 이름이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절절한 스토리가 주 무기지만, 두 주연 배우의 케미스트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훤칠한 키에 순수함과 이지적인 이미지를 겸비한 후쿠시 소우타와 이국적인 외모와 패셔너블한 모습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 고마츠 나나가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랑의 순간은 가슴 깊이 잔상을 남긴다. 멀티플렉스 특정 체인 독점 개봉에도 전국 17만 관객을 돌파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개봉 2주 후부터 흥행 바톤을 이어받았다. 독특한 제목으로 이목을 끈 만큼 46만 명을 동원해 일본 멜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나'가 야마우치 사쿠라가 췌장암에 걸린 걸 알게 되면서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스토리만 보면 흔한 최루성 멜로 같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소설의 독특한 구성,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는 전개와 철저히 '나'의 시점에서 하는 서술 방식으로 의외의 순간을 관객에게 전한다. 사랑에 죽고 못사는 멜로를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주연배우들의 존재감도 영화의 장점. 사쿠라를 연기한 하마베 미나미는 한국 관객들에게 차세대 일본 스타로 눈도장을 찍었고, '나'를 연기한 키타무라 타쿠미는 절절한 연기로 일본 연예계 블루칩임을 입증했다. 두 사람은 이후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이고>에서 다시 만나 찰떡 같은 청춘 시너지를 한 번 더 빛냈다. 현재의 나와 쿄코를 연기한 오구리 슌과 키타가와 케이코 조합도 관객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 같은 느낌.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2022년 영화계에 여러 이변이 있었는데, <오세이사>의 100만 돌파는 정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파란이었다. 한동안 일본 영화가 100만을 넘은 건 애니메이션 장르에서나 가능했지, 실사 영화는 N만 관객만 돼도 희소식일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오세이사>의 흥행은 진귀하다 싶은 일이었다. <오세이사>는 매일 아침마다 어제의 기억을 잊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마오리와 동급생 토루와의 '가짜 연애'를 그린다. (모두가 예상하듯) 가짜 연애에서 슬그머니 고개 드는 진심과 두 사람 사이의 변화를 지켜보는 달달함이 영화를 이끈다. 그러다가 서로 말하지 못한 비밀들이 조금씩 드러날 때, 영화가 보내는 '눈물벨'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아이돌 나니와단시의 멤버 미치에다 슌스케와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두각을 보이는 후쿠모토 리코의 외모합이 장점 중 하나. 판타지인 듯 현실적인 듯 아슬아슬 선을 타는 따듯한 감성이 도드라지고, 반대로 스토리 전개가 '급발진'한다는 단점이 있다. <오세이사> 또한 위의 두 작품처럼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으며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의 미키 타카히로가 감독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츠키카와 쇼 감독이 각본에 참여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감독 미키 타카히로

출연 후쿠시 소우타, 고마츠 나나

개봉 201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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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감독 츠키카와 쇼

출연 하마베 미나미, 키타무라 타쿠미

개봉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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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감독 미키 타카히로

출연 미치에다 슌스케 , 후쿠모토 리코, 후루카와 코토네, 마츠모토 호노카

개봉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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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