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 가장 잘 생긴 배우라서'. 넷플릭스 시리즈 <연애대전>을 연출한 김정권 감독이 밝힌 이 배우의 캐스팅 이유다. '잘생김'을 전면에 배치한 담백한 캐스팅의 변이라니.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호들갑인가! 했지만 배우 '유태오'의 사진이 뜨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것도 아주 격렬히.
하지만 치이는 게 잘생김이요, 범람하는 것이 선남선녀다. 배우 유태오에게는 준수한 용모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길어진 무명으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사진작가 니키 리가 절대적으로 지켜주려 했던 소년미나 맑은 영혼, 개구쟁이 같은 면모 말이다.
절대 지켜 유태오, 절대 지켜 소년미!
배우 유태오는 10년이 넘도록 무명이었다. 아내 니키 리는 그런 그의 곁을 묵묵히 지킨다.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유태오의 매력을 믿고, 그 가능성에 배팅한 것. 당시 사진작가로서 벌어 놓은 돈 전부를 생활비로 쓰면서도 아르바이트하려던 유태오를 단호히 막아섰다. 그가 가진 소년미를 잃게 할 순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잃는 순간 배우로서 장점이 희석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세상의 풍파는 내가 맞으면 된다'라는 호방한 선언에 담긴 니키 리의 배려와 결단이 청년 유태오를 키웠다.
이 모든 게 니키 리의 일방적 배려는 아니었다. 사랑은 쌍방인 법. 한창 힘들었을 무렵, 오후 4시만 되면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그녀에게 유태오는 '평생 오후 4시에 내가 곁에 있어줄게'라며 든든히 곁을 내주고, 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집에 꽃 마를 날 없게 했다. ‘그녀에게 내 정체성이 있’고, ‘니키에게서 예술적 영감을 받는다’라 말하는 스윗함은 또 어떤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달달함에 전봇대를 뽑고 아파트를 부순 후 지구 내핵을 갈라 우주로 날아올라 버렸다.
사랑하는 이의 지지로 연기 생활 이어오던 유태오는 2017년, 마침내 그의 운명을 바꿀 한 영화와 조우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러시아 영화였다.
러시아어 1도 모르는데 러시아인 역할, 그리고 칸 영화제까지 진출?!
어디 세상이 소년美 만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만만한 곳인가? 오랜 무명 끝, 유태오는 연기력으로 칸 레드 카펫을 밟는다. 1981년 소련 록밴드 '키노'를 이끈 당대 독보적 슈퍼스타이자 자유와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빅토르 초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 <레토>의 주연으로 당당히.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 경계인의 삶을 산 이력 때문이었을까? 2000:1의 경쟁률을 뚫은 유태오는 고려인 빅토르에 빙의해 열연했고, 영화는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으로 노미네이트되고 사운드트랙 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 밖에(?) 구사할 줄 몰랐던 유태오가 역할을 위해 러시아어 대사를 3주 만에 외웠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2009년 영화 <여배우>의 단역 '에밀'로 데뷔한 이래 주로 해외 작품에 출연했던 탓에 국내 인지도가 낮았던 유태오는 <레토>를 계기로 국내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게 된다.

- 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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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출연 유태오, 로만 빌릭, 이리나 스타르셴바움
개봉 2019.01.03.
농약 같은 상사, 너드미 넘실대는 빌런, 이주임.. 그중 으뜸은 <머니게임> Eugene Han
<레토> 후 유태오는 다양한 얼굴로 한국 관객을 만난다. 영화 <버티고>의 농약 같은 상사 '이차장', <머니게임>의 인간 레드와인 '유진 한', <보건교사 안은영>의 너드미 가득한 빌런 '매켄지'까지. 최근에는 감독, 각본, 촬영, 음악, 편집을 도맡아 <로그 인 벨지움>을 제작하더니, <헤어질 결심>에서는 '이주임'으로 깜짝 출연했다.
이 중 유태오의 대표작은 단연 <머니게임>.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남들의 죽음 따위는 전리품쯤으로 여기는 냉혈한 월스트리트 '바하마' 한국지부 부사장 '유진 한'으로 분한 유태오는 '인간 월가'라는 별명 얻으며 큰 사랑을 받는다. 특히 개인 과거사를 투영해 기획재정부 사무관 이혜준(심은경)에게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는 장면들은 짧지만 강렬한 임팩트 주며 수많은 밈과 주접짤을 남겼다.
'고수가 오징어로 보인다', '이런 슈트핏 너무 오랜만이라 그냥 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등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섹시 빌런으로 존재감 제대로 드러낸 <머니게임>의 유태오. 올해는 새로운 장르로 관객을 찾아오는데, 그게 무려 로맨틱 코미디다.

- 머니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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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김상호
출연 고수, 이성민, 심은경
방송 2020, tvN
어서 와, 유태오표 로맨틱 코미디는 처음이지? <연애대전>
글을 쓰기 전 <연애대전>을 막 보고 오는 길이다. <연애대전> 속 유태오는 유쾌했고, 귀여웠으며, 섹시했다! 드라마는 상대가 미우면서도 끌리는 ‘혐관’(혐오 관계)의 끝판왕급 이야기인데, 그래서 마음 가벼이 즐길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알기에. '혐관'의 종착역은 사랑이라는 것을. 남녀 주인공은 심경의 변화를 느끼고 백년해로한다는 기분 좋은 결말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을.
남자에게 지는 것이 싫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연마하고 온갖 방면에서 강해진 변호사 여미란(김옥빈). 로맨스 연기의 달인으로 손꼽히지만 첫사랑의 트라우마로 여자를 병적으로 의심하는 톱스타 남강호(유태호). 서로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으로 당장 전쟁을 벌여도 이상할 것 없는 남녀가 우연한 기회에 액션 연기 파트너로 합을 맞춘다. 몸을 부대끼고, 술잔을 기울이며,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이 어느새 둘은 서로에게 스며든다.
<연애대전>은 남녀 성별 대결 구도가 팽배한 현대적 시대 배경에 ‘계약연애’, '너 같은 여자 처음이야', '남는 방이 없네요'로 대변되는 전통적 클리셰를 얹어 신구의 조화를 꾀한다. 관습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화법은 익숙한 것에서 오는 편안함을 준다. 반전보다는 예측 가능한 위기를 즐기고, 감정 변화의 폭이 넓고 갈등도 다양해 일부러 '혐관'을 찾아보는 당신이라면 <연애대전>은 놓쳐선 안 될 드라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듯이.
자식도 부모한테 인정을 받고 싶어 하잖아요. 독일에서 살아봤자 제 정체성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 가서 인정을 받고 싶지…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떠돌아다니는 삶과 뿌리에 대한 질문을 늘 던지며 살아온 배우 유태오. 오랜 독일 생활에서 느낀 이방인의 감정이 그를 칸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배우로 성장하게 했고, 다양한 얼굴을 가능케 했다. 맨땅에 헤딩하면서 일궈온 그의 필모가 능숙해진 한국어 만큼이나 촘촘하고 깊어졌다. 그토록 바라던 많은 이가 인정하는 배우가 됐지만, 그의 여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