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 꽃분홍색이다. 가로수에 가득 핀 벚꽃 때문인지, 산에 널린 진달래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옅은 매화 때문인지 우리는 봄, 하면 분홍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가장 사랑스럽고 달콤한 색, 분홍. 그러나 스크린 속 분홍색은 무해하지만은 않다. 오늘은 사랑스러웠다가, 때로는 강인한 심지를 보여주는 핑크 컬러의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랄프 파인즈, 틸다 스윈튼, 토니 레볼로리, 시얼샤 로넌, 애드리언 브로디, 윌렘 대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분홍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역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아닐까. 분홍색으로 칠해진 호텔 외관부터 분홍색 케이크까지, 이곳에서 ‘분홍색’은 영화를 동화처럼 만드는 장치로써의 역할을 한다. 줄거리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영화는 1927년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대에 세계 최고의 부호 마담 D.(틸다 스윈튼)가 살해되고 그의 연인 구스타브(랄프 파인즈)가 용의자로 몰려 누명을 벗기 위한 과정을 담고 있다. 언뜻 줄거리만 봐서는 추격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영화에서 스릴러의 긴장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인형극을 보는 것처럼 영화는 철저하게 관객의 감정이입을 막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은 살인 사건이 기반인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 없이 동화처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현실감을 매우 낮추는 역할을 하는 매개가 바로 ‘분홍색’이다. 

영화 속 분홍색은 굉장히 인공적이고 화려하다. 현실에서 보기 힘든 분홍색 호텔은 영화의 배경이 ‘현실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메인 컬러인 만큼, 영화에서 분홍이 상징하는 바도 남다른데, 일반적으로 ‘분홍색’은 사랑스러움, 행복, 로맨틱을 상징한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가 ‘향수’임을 떠올렸을 때 이곳에서 분홍색은 ‘화려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와 욕심’을 상징한다. 스토리가 아닌 색을 중심으로 보면 보이지 않았던 연출들이 보이기 때문에 2번 이상은 봐야 하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시얼샤 로넌, 랄프 파인즈, 틸다 스윈튼, 애드리언 브로디, 윌렘 대포, 토니 레볼로리

개봉 2014.03.20. / 2018.10.11.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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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감독 소피아 코폴라
출연 커스틴 던스트, 제이슨 슈왈츠먼, 립 톤

<마리 앙투아네트>(2007)

아름다운 영화를 찾고 있다면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배경, 그 안의 사회적인 이슈보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화려했던 궁정 생활에 더 포커스를 맞춘 영화로, ‘탐미주의자를 위한 영화’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원색보다 더 화려하고 눈부신 파스텔컬러를 볼 수 있는데, 드레스와 머리, 액세서리는 물론 궁정 인테리어, 조명, 정원까지 영화 속에서 아름답지 않은 건 없다. 한마디로 눈이 즐거운 영화. 실제로 프랑스 정부 측에서 베르사유 궁전 로케이션을 적극 지원해주었다고.

영화는 의도적으로 역사 고증의 우선순위를 낮췄다. 화려한 의상과 어지러운 파티를 전면에 내세우며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을 강화했다. 영화는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어린 10대 소녀였음을 이야기한다. 처음 보는 사람과의 결혼, 낯선 곳에 떨어진 소녀의 불안, 그 속에서도 웃음을 찾고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 등 얼추 보면 아주 먼 타지로 전학 간 소녀가 겪을 법한 이야기다. 실제로 영화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커스틴 던스트)가 구두를 고르는 장면이 있는데, 그 뒤로 컨버스 운동화가 보인다. 이 장면에 대해 의상감독은 “어린 소녀가 낯선 곳에서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담은 것으로, 현대 사회 소녀들이 겪고 있는 일상과 연결하기 위해 만든 장치”라고 밝혔다. 사람을 좋아하는 쾌활한 소녀로서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컨버스 운동화를 통해 표현한 셈. 스토리보다는 ‘미감’에 초점을 맞춘 덕분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수상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감독 소피아 코폴라

출연 커스틴 던스트, 제이슨 슈왈츠먼, 립 톤

개봉 200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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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이 너무해>
감독 로버트 루케틱
출연 리즈 위더스푼, 루크 윌슨

<금발이 너무해>(2001)

본 적 없는 사람은 많아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로맨틱 코미디 영화, <금발이 너무해>에서 분홍색은 단순히 사랑스러움만을 뜻하지 않는다. <금발이 너무해>의 주인공 엘 우즈(리즈 위더스푼)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완벽한 미녀다. 재력가 집안에, 장학생인 그는 남자친구까지 하버드 법대생이다. 인생에 어떠한 흠도 없을 것 같은 그에게 어느 날 남자친구 워너(매튜 데이비스)는 이젠 진지하게 사람을 만날 때가 되었다며 “네가 머리 나쁜 금발인 게 나쁜 거야”라는 말과 함께 이별을 고한다. 우즈는 자신의 지성을 증명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게 된다. 영화는 하버드 대학 내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편견 어린 시선’을 그가 이겨내는 과정을 유쾌하게 담고 있다. 

영화는 지금까지 연약하고 순수한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색으로 여겨졌던 핑크를 주인공 우즈의 상징적인 컬러로 사용한다. 그는 핑크색 의상을 입은 법대생으로, 지금까지 무시당해왔던 여성성을 전면에 드러낸다. 전문직 여성들은 의도적으로 여성성을 배제한다. 짧은 머리에 어둡고 매니시(Mannish)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즈는 지금껏 ‘연약함 혹은 멍청함’으로 인식되어왔던 여성성을 대담하고 혁신적인 것으로 뒤바꾸며 자신에게 따라붙던 편견을 유쾌하게 이긴다. 

금발이 너무해

감독 로버트 루케틱

출연 리즈 위더스푼, 루크 윌슨

개봉 200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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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슈포르의 숙녀들>
감독 자크 드미
출연 카트린 드뇌브, 프랑소와 돌리악

<로슈포르의 숙녀들>(1967)

<라라랜드>가 적극적으로 오마주한 작품으로 유명한 <쉘부르의 우산> 감독, 자크 드미는 화려한 색감과 영상미로 유명하다. 자크 드미 감독은 음악과 춤, 색채를 잘 쓰는 것이 특징인데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건 역시 ‘색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었다. 그는 대담하고 생동감 있는 색채를 주로 사용했고, 명도 차를 통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로슈포르의 숙녀들>에서 특히 그의 색 감각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로슈포르의 숙녀들>은 1967년에 제작된 뮤지컬 영화로, 쌍둥이 자매 델핀(카트린 드뇌브)과 솔랑쥐(프랑소와 돌리악)가 작은 해안 도시 로슈포르를 떠나 멋진 사랑을 하게 되리라 꿈꾸는 이야기다. 영화는 로슈포르에 공연을 하러 온 서커스 단원들이 크레인 위에서 춤을 추는 걸로 시작하는데, 이 장면이 <라라랜드>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오마주 되었다. <쉘부르의 우산>이 사랑이 현실에 지는 아름답고 처연한 러브 스토리라면, <로슈포르의 숙녀들>은 사랑에 좀 더 유연하고 경쾌하다. 색의 채도나 선명함 역시 <로슈포르의 숙녀들>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햇살 내리쬐는 봄에 보기 좋은 영화로 추천.

로슈포르의 숙녀들

감독 자크 데미

출연 까뜨린느 드뇌브, 프랑소와 돌리악

개봉 201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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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연인>
감독 하워드 더치
출연 몰리 링월드, 존 크라이어, 해리 딘 스탠튼, 앤드류 맥카시, 애니 마츠, 제임스 스페이더

<핑크빛 연인>(1986)

1986년 작이지만 2023년에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미감으로 여전히 ‘사랑스러운 영화 추천작’에 손꼽히는 작품, <핑크빛 연인>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핑크빛 연인>은 봄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로맨틱 코미디다. 80년대 할리우드의 청춘스타들이 영화의 주조연으로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주인공 앤디 월시 역을 맡은 몰리 링월드가 단연 돋보인다. 몰리 링월드가 입고 나오는 패션은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을 정도. 영화에서 패션은 단순히 미적인 영역을 넘어 자본주의 속 계급과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있다. 부유하던 블레인에게는 눈에 튀지 않는 베이지색 컬러의 단정한 옷을 입히고, 노동 계급인 앤디와 더치에게는 빈티지 의상을 입히며 개성을 강조한다. 영화에서 앤디가 프롬 파티에 가기 위해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핑크색드레스를 입는 장면은 앤디의 개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명장면. 이 드레스는 앤디의 독특한 패션 감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개성을 포용하고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영화는 꽉 닫힌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나가는 80년대 청춘 영화로, 가볍게 보기 좋다. 주인공 앤디(몰리 링월드)는 고등학교 졸업반으로, 편부 가정이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 완벽한 학생이다. 앤디네 형편은 넉넉잖은 노동자 집안이지만, 그는 패션에 관심이 많다. 아울렛 같은 곳에서 싸게 구입한 옷을 믹스매치하며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잡아간다. 형형색색의 패션과 액세서리를 걸친 그는 그와 비슷한 소꿉친구 더치(존 크라이어)와 평화로운 나날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상류 계급의 블레인(앤드류 맥카시)의 등장에 앤디는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뜨게 되고, 그를 몰래 짝사랑하던 더치는 애가 타기만 한다. 

핑크빛 연인

감독 하워드 도이치

출연 몰리 링월드, 존 크라이어, 해리 딘 스탠튼, 앤드류 맥카시, 애니 파츠, 제임스 스페이더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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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