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2023)

<인터스텔라>(2014), <테넷>(2020)으로 물리학을 갖고 놀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이번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영화 <오펜하이머>를 내놓았다.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스스로를 ‘세상의 파괴자’라 자책하며 후엔 핵무기 개발 반대를 주장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천재 물리학자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는 ‘성공담’은 영화의 핵심이 아니다. 제목이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닌, ‘오펜하이머’이기에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불안했던 초년과 물리학자로서의 영광, 그리고 대량살상무기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 등 오펜하이머의 인생 자체에 주목한다. 그러니 문과라 꺼릴 필요 없다. 그들이 말하는 과학을 따라가는 것도 물론 즐거운 일이지만, 그래서 그 과학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또 과학자의 윤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도 영화를 보는 한 축이다. 오늘은 <오펜하이머>를 보기 전, ‘실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오펜하이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조쉬 하트넷, 케이시 애플렉, 라미 말렉, 케네스 브래너

개봉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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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의 실험 물리학
(좌)오펜하이머의 1925년 하버드 대학교 졸업 사진 / (우)오펜하이머가 거주했던 하버드 대학교의 신입생 기숙사 스탠딩홀

1904년 뉴욕시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가정 아래에서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탐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또래에 비해 학습능력이 좋았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조기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물리학과인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당시 물리학의 중심은 2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실험 물리학을 대표하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과 이론 물리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가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생활은 오펜하이머에게 고통이었다. 실험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친구에게 “실험은 끔찍하게 지루하고, 나는 (실험을) 너무 못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린 그는 지도 교수였던 패트릭 블래킷의 책상 위에 독사과를 올려놓는 등 위험한 기행을 벌였다. 


괴팅겐 대학교에서의 이론 물리학
괴팅겐 시절의 오펜하이머

2년 만에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나 괴팅겐 대학교로 옮기게 된다. 당시 괴팅겐 대학교에서는 이론 물리학의 최고봉인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있었고,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 관련한 논문을 12개 이상 발표하며 대활약을 펼쳤다. 


인간에겐 냉담한, 물리에는 뜨거운 천재 물리학 교수

괴팅겐 대학교에서 9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UC 버클리 대학교수로 임용된다. “친구보단 물리학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던 그의 학창 시절처럼, 동료와 학생들은 그를 냉담한 천재 물리학자로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물리학을 가르치는 것에는 굉장히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는 매일 한 번씩 사무실에서 대학원생과 박사 연구원들을 만나 연구 진행 상황을 논의하고, 양자역학과 핵물리학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고.


정치적 성향

쭉 과학에 빠져 살았던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역사적 금융 재앙,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을 6개월이나 지나서야 알게 됐을 정도다. 1936년 대통령 선거 전까지 한 번도 투표를 하지 않았던 그는 1934년부터 정치와 국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34년에 그는 나치 독일을 탈출한 독일 물리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2년간 연봉의 3%인 100달러, 2022년 기준 약 2,200달러가량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30년대 많은 청년 지식인들처럼 공산주의 사상으로 분류되는 사회 개혁을 지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당을 위한 기금 모금 행사를 주최하고, 반파시스트 활동을 하는 등 미국공산당에 공개적으로 가입한 적은 없으나 당원으로 추정되는 지인을 통해 자금을 보태왔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향은 1950년대 미국에서 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색출했던 매카시즘 시절이 도래했을 때 문제가 된다. 


과학자와 종교

언어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오펜하이머는 뉴욕 태생이지만,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물론, 네덜란드어는 공부한 지 1주일 만에 강의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스어를 습득하여 플라톤의 저서를 읽거나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힌두교 원전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바가바드 기타』

힌두교 원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는 인도인의 정신적 지침서인 『바가바드 기타』에 심취한다. 힌두교도가 되지도 않았고,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않았지만 『바가바드 기타』의 지혜에 매혹된 그는 물리와 대척점에 있는 ‘신비의 영역’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한 말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역시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맨해튼 프로젝트
(좌)1945년 9월 트리니티 현장에서 만난 뉴욕타임스 기자 윌리엄 로렌스와 J. 로버트 오펜하이머 / (우)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가 기폭에 성공한 후 트리니티 기폭 현장을 살펴보는 모습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바꾼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은 1938년 독일 과학자들의 실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원자는 세계의 최소 단위로 여겨지며 절대 쪼개질 수 없다고 여겼는데 우라늄 원자가 쪼개지는 현상을 발견한 것. 게다가 원자의 분열과 함께 큰 에너지가 생성되는 것을 발견했다. 세계 최강의 폭탄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발견한 지 1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당시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을 온 과학자들은 히틀러가 이 폭탄을 얻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치보다 미국이 먼저 원자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당시 미국에서 망명 중이었던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미국 정부를 설득하는 편지에 서명을 요청했고, 이는 승인된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맨해튼 프로젝트’였다. 

1942년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의 참여자는 13만 명, 투입된 돈은 당시 20억 달러로 2023년 기준으로 따지면 330억 달러다. 한화로는 약 42조 원으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거대 프로젝트를 이끌어 본 적도, 노벨상 수상 경력도 없던, 오히려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있던 오펜하이머가 이 프로젝트에 주요 인력으로 투입된 건 맨해튼 프로젝트 총괄자인 그로브스 장군의 강경한 의지 덕분이었다.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에게서 물리학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야망’을 발견하고 이것이 곧 프로젝트를 이끄는 추진력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처음 대규모 조직을 운영한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 운영을 위한 행정적인 측면까지 빠르게 익혀 과학자와 군인 조직 간의 갈등을 통제했다.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곳에 그는 늘 현장에 직접 가서 상황을 판단했고 그의 이러한 카리스마는 ‘3년 만에’ 원자폭탄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그리고 반핵주의자
(좌)오펜하이머가 전쟁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 / (우)팻맨 핵무기 폭발 후 나가사키 상공에 남은 버섯구름에 대해 논의하는 오펜하이머

히틀러가 자살한 후 독일은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면서 전쟁은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은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아직 일본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황. 맨해튼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진행하게 되고 아직 항복하지 않은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결국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오펜하이머는 한순간에 미국의 스타가 된다. 

그러나 일본의 끔찍한 상황을 보고 들은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라는 죄를 알아버렸다”는 말과 함께 죄책감과 회의감을 심하게 느끼게 되었고,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가 핵을 갖게 되었을 때 찾아올 비극을 막고자 했다. 

그는 핵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을 소집해 핵무기를 통제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핵무기가 국가가 아닌 UN과 같은 초국가적 조직이 평화를 위해서만 보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내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 같다. 핵폭탄은 그만 만들어야 한다”라 말하며 반핵을 요청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수소 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이 각각 15킬로톤과 21킬로톤인데 수소폭탄은 1백만 킬로톤, 즉 메가톤 급의 위력을 갖는다. 상부의 말에 복종하고 카리스마 있게 부하를 통솔하던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투하 이후 수소폭탄 개발에 강하게 반대한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연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자의 과신과 핵시대에 과학이 제시하는 도덕적 책임의 딜레마를 상징한다. 소련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할 때 한 축은 소련을 방어하기 위해선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축은 그 무기는 단순히 대규모 민간학살에 사용될 뿐, 전술을 강화해 보다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주류는 전자였고 그들에게 ‘반핵주의’이자, ‘공산당과 가까운’ 오펜하이머는 표적이 되기 좋았다. 


매카시즘
고등연구원에서 강의하는 오펜하이머

미국의 예상보다 일찍 소련도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로 몰리며 모든 권위를 박탈당한다. 프로젝트 접근 권한이 취소되고, 도청과 감시를 당했다. 그렇게 정치권력을 잃은 오펜하이머는 고등연구원 IAS의 소장이 되어 교육에 힘을 썼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는 핵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과거로 돌이킬 수 없음”을 이야기했다. 이와 함께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인용했다. 그의 말처럼, 인류는 자신의 종을 스스로 멸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 되었다.

영화 <오펜하이머>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