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개봉과 동시에 전세계적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흥미로운 빌런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 신선하게 리부트된 이번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도 이미 속편이 예정된 상태일 텐데, 앞으로 어떤 빌런이 나올지 많은 팬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요즘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으레 그러하듯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도 후속 영화들을 위한 복선과 암시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떡밥'들은 원작을 아는 팬들에게 보내는 서비스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는 스파이더맨의 숙적이 되는 '스콜피온'과 동료/적수 관계인 프라울러가 상당히 비중있게 등장하였다. 스콜피온은 '맥 가간'이라는 본명으로 등장하였고, 프라울러는 '애런 데이비스' 버전이 주차장 신에서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앞으로의 영화들에도 등장할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익숙한 이름을 들은 팬들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랐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포스트 크레딧 영상에 등장한 맥 가간.

위의 두 인물도 인상적이지만 필자는 외계 물질로 만든 무기를 든 강도들이 은행/ATM을 터는 장면에서 은행 벽에 붙어 있던 광고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은 남자의 상반신이 그려진 신분 도용 방지업체 광고였다. 그것은 스파이더맨의 숙적인 카멜레온의 등장을 암시하는 광고다.

뒤의 벽보에 주목.

카멜레온은 스파이더맨 최초의 슈퍼빌런이다. 스파이더맨이 처음 등장한 <어메이징 판타지> 15호에는 슈퍼빌런이 등장하지 않았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호에서야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카멜레온이다. 이름이 명시하듯 외모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옛 소련 출신 악당이다. 원작 설정에서는 특별히 전투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각종 마스크를 사용하여 외모와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스파이더맨을 70년 동안 괴롭혀온 숙적 중의 하나다.

필자는 영화를 보면서 카멜레온을 잠깐이나마 등장시킨 것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일단 <스파이더맨: 홈커밍>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마블 스튜디오는 스파이더맨 세계관을 <어벤져스>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는 달리 좀 더 현실에 가까운 환경으로 만들고자 하는 듯하다. 카멜레온의 경우 이번에 등장한 벌처처럼 주변에 실제로 있을 법한 수준의 빌런이기 때문에 현실반영적 세계관에 적합해 보인다. 1960년대 등장한 빌런답게 원작 만화엔 마스크를 뒤집어 써 변장을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영화에 등장한다면 아마 스파이더맨처럼 하이테크 장비를 사용해 외형과 목소리를 변조하는 빌런으로 나오지 않을까 짐작한다.

카멜레온은 아직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스파이더맨의 다른 숙적과도 연관되어 있다. 역시 숙적 중 한 명이자 '시니스터 식스'의 일원인 '크레이븐 더 헌터'와도 설정상 형제인데, 카멜레온과 크레이븐의 애증어린 관계만 가지고도 너끈히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원작 만화 스토리 중 1980년대 연재된 <크레이븐의 마지막 사냥> 스토리는 원작 팬들이 손꼽는 최고 걸작 중 하나다. 이 스토리를 각색해 카멜레온을 같이 등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크레이븐과 스파이더맨의 일대일 승부를 다루는 내용인데, 크레이븐이 승리해 스파이더맨을 생매장해버리는 충격적 전개가 인상적인 4부작 시리즈다.

필자가 처음으로 접한 마블 코믹스는 1994년 출간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386호부터 388호까지 이어진 '인생 도둑' 스토리 라인이다. 여기에 카멜레온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지금까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피터 파커의 친부모가 갑자기 등장하는데 알고 보니 카멜레온이 만든 가짜였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은 친부모와의 재회에 기뻐하던 피터 파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1990년대의 메이저 스토리 중 하나인 '스파이더맨: 클론 사가'의 발단이 된다.

'클론 사가'는 피터 파커의 클론이 등장해 그의 현재와 과거, 정체성이 미궁에 빠지게 되는 스토리다. 스파이더맨은 이 사건으로 자신의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대혼란에 빠진다. 살해당한 연인 그웬 스테이시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존재가 진짜인 것인지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되고 급기야는 자기 자신이 진짜인지, 클론인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카멜레온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인생 도둑' 스토리가 이 클론 사가의 복선을 제시한다. 만약 스파이더맨 영화 프랜차이즈가 계속 이어진다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이후 딱히 노선이 정해지지 않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메이저 스토리 라인으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소재이다.
 
샘 레이미와 마크 웹이 만든 5편의 영화를 거치는 동안 숙부 벤 파커와 연인 그웬 스테이시의 죽음 등 굵직한 소재들이 충분히 소개된 지금은 새로운 빌런과 인물의 등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행히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연재되어 온 스파이더맨의 긴 스토리에는 영화화하기 좋은 소재와 인물이 무수히 많다. 그 중 하나가 카멜레온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감독 존 왓츠

출연 톰 홀랜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마이클 키튼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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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서 / 그래픽 노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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