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리 영 맨’(Angry Young Man, 성난 젊은 청년)은 1950년대와 60년대 영국 대중문화의 메인 키워드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영국 사회의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던 젊은 노동자들과 하층계급으로 이루어진 앵그리 영 맨은 계급적 차별과 그에 따른 사회정치적 부조리에 대한 젊은이들의 ‘성난 선언’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앵그리 영 맨의 표상은 곧 수많은 소설과 영화, 희곡 등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1960년에 개봉된 카렐 라이즈 연출의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은 부도덕한 세상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자전거 공장 노동자, ‘아더’(알버트 피니)를 중심으로 하는 앵그리 영 맨 운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지독한 가난과 계급의 벽에 맞서는, 그러나 힘 없이 나가떨어지는 ‘앵그리 영 맨’이 영국 한 시대의 주축을 이루었다면 60여 년이 흐른 현재 한국의 독립영화와 대중문화의 중추적 키워드는 '헝그리 영 맨'이다. 각각 다른 문화와 시간 터울에도 이 두 트렌드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공통점을 보인다. 지난 몇 년간 개봉된 독립영화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세상>(최창환, 2021), <그 겨울, 나는>(오성호, 2022), <혜옥이>(박정환, 2022), <홈리스>(임승현, 2022)를 포함한 일련의 작품들은 일자리가 없는 청년을 필두로 그들이 가난하거나, 일이 없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비극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들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입시 학원비, 혹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식당으로, 택배 사무실로, 공장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는 으레 더 큰 문제와 참극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앞선 앵그리 영 맨의 작품들과 비슷하게, 이 영화들에서도 해법이나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년들은 허기와 빈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우울한 최후를 맞는다.

<그 겨울, 나는>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이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청년의 가난, 혹은 기회의 부재가 전적으로 사회적 시스템, 즉 구조적인 병폐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창훈 연출의 <화란>은 회귀한 <토요일 밤, 일요일 아침>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주기도 한다. 영화는 극심한 가난과 가정,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17살의 ‘연규’(홍사빈)를 중심으로 한다. 연규는 그의 인생만큼이나 우울한 동네를 떠나 네덜란드(영화 제목 '화란'은 네덜란드의 한자 표기)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돈을 모은다. 어느 날 연규는 역시 학교 폭력의 피해자인 이복 여동생, ‘하얀’(김형서)을 지키려다 싸움에 휘말리고 상대를 다치게 한다. 합의금 3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한 연규는 이곳저곳에 도움을 청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동네 범죄 조직의 중간 보스인 ‘치건’(송중기)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의 조직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연규는 그렇게 치건의 부하로, 조직의 일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독립영화들과 비슷한 주제와 캐릭터를 다루고 있지만 <화란>은 절대적으로 누아르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 영화다. 이 시대의 헝그리 영 맨, 연규가 마침내 도달한 곳은 공장과 식당이 아닌, 범죄 조직이다. 그럼에도 그가 조직으로 편입되는 과정은 돈과 겉멋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치건’에 의한 것이다. 연규만큼이나, 혹은 더한 방법으로 버려진 아이, 치건은 그간 한국의 조폭영화에서 등장했던 ‘중무장 마초’의 형상이 아닌,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처연한 얼굴을 가진 ‘형’이다. 그는 수많은 조직원을 데리고 있으면서도 유독 연규에게만은 ‘형님’이 아닌 ‘형’을 자처한다. 연규가 ‘땅’에 버려진 아이라면 (극 중에서 의붓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할 때마다 연규는 본능처럼 바닥에 움츠러든다), 치건은 ‘물’에 버려진 아이다. 이 작품에서 조직의 보스로 극강의 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송중기지만 그의 유약한 얼굴은 물의 아이, 치건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어린 시절 육지로 떠내려 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치건은 시간이 흘러, 땅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연규를 통해 자신을 보게 된다. 그렇기에 이들의 인연은 우연이라기 보다 필연이다.

치건 역의 송중기

물론 연규의 눈에 비친 치건이 살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치건은 조직의 룰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고, 누구든 그렇지 못하다면 조직의 법대로 처단을 강행한다. 조직의 법칙을 어떻게든 지켜낸다는 치건의 행동은 <화란>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과 협잡해 세상을 군림하는 그 누구도 ‘법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맥락에서 치건은 역설적으로 가장 정의로운 인물이자, 신뢰할 만한 지도자다.


연규는 치건을 통해 네덜란드로 엄마와 함께 떠나는 꿈에 도달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꿈이 좌절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치건 때문도, 조직 때문도 아닌, 정치(혹은 정치에 가담한 인물), 즉 세속으로 인해서다. 이로 인해 한번 나락으로 떨어진 연규는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연규의 원래 자리로 말이다.

<화란>에서 연규 역을 맡은 홍사빈은 놀랍다. 그는 어쩌면 앵그리 영 맨의 표상이 되었던 알버트 피니보다도 더 우울하고, 처절한 얼굴을 가졌다. 영화의 전반을 차지하는 홍사빈의 클로즈업은 허기와, 실패, 그리고 절망과 허무주의를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 놓은 초상처럼 느껴진다. 다소 급작스럽게 보이는 그의 최후의 선택에 설득력을 실어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의 홍사빈의 얼굴 때문이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생기를 얻어 생존할 수밖에 없는 그의 선택을 홍사빈은 너무나도 슬프고 간절한 눈빛으로 역설한다.

연규 역의 홍사빈

전반적으로 <화란>은 극도로 우울한 (영화의 영어 제목, Hopeless처럼) 그러나 매우 잘 만들어진 이 시대의 '청년 영화'다. 어쩌면 극도로 우울한 것은 이 영화라기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일 것이다. 청년 김창훈 감독은 이 놀라운 데뷔작으로 이 시대가 젊은 세대를 병들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가난이기도 하고, 폭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한 ‘불능’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세상, 그래서 착취만 남은 세상은 1960년대 영국과 한국, 그리고 현재의 한국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의 극단일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