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블롬캠프 감독의 신작 <그란 투리스모>는 실화를 소재로 한 레이싱 영화다. 그럼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즐길 거리가 없는 작품이란 뜻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란 투리스모>는 레이싱 영화로서의 짜릿한 승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짜릿한 인생 역전 드라마를 보여준다. 어느 MZ 세대 청년의 독특한 성공 스토리라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극장에서 만나는 시원 짜릿한 레이싱 영화 <그란 투리스모>를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 안팎의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모아봤다.
게임하다가 레이싱 경주에 나간
잔 마든보로는 실존 인물
<그란 투리스모>의 주인공 잔 마든보로는 실존 인물로, 게이머 출신의 레이싱 드라이버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란 투리스모’는 소니가 개발한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인데 잔 마든보로는 이 게임을 너무 잘한 나머지, 결국 레이서로 데뷔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의 드라이버 도전기는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과정을 거쳤다.
잔 마든보로는 1991년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영국 풋볼 리그에 300회 이상 출전한 카디프 시티 소속의 전 축구선수 스티브 마든보로다. 잔은 8살 무렵부터 레이싱 게임 ‘그란 투리스모’를 접했고 거기 빠져 살았다. 레이서가 되고 싶다는 꿈은 갖고 있었지만 선뜻 부모님께 말을 꺼내지는 못했고 대신 대학 전공으로 모터스포츠 공학을 선택했다. 그런데 적응을 못해서 금방 자퇴를 하게 된다. 집구석에 처박혀서 학교도 안 가고 게임만 하는 스무 살 아들의 삶을 응원해 줄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잔은 꽤 오랫동안 부모 속을 썩이며 방구석 게이머로 지내다가 어느 날 ‘GT 아카데미’라는 이벤트에 지원을 하게 됐고 뛰어난 게임 실력 덕분에 발탁이 되어 결국 레이서가 되는데 성공했다. 잔은 GT 아카데미의 세 번째 우승자가 됐는데, 영화에서는 극적 긴장을 위해서 잔이 마치 첫 대회 우승자처럼 묘사한다. 실제로는 첫 회 우승자가 따로 있었는데 잔은 이 아카데미의 최연소 우승자라고 한다. <그란 투리스모>는 잔이 레이서가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다룬다.
TMI
학창 시절에 그는 자신의 방에 자동차 좌석 시트처럼 게임 장비를 설치해 놓고 사용했는데, 이는 전부 손수 제작했다고 한다. 십수 년 전의 장비이므로 지금은 많이 낡았을 텐데, 감독의 요청으로 이 장비는 영화에 실제로 등장한다. 극중 잔이 방에서 사용하는 장비가 이와 유사하게 디자인되어 있다고 한다.
게이머들의 극기훈련소,
GT 아카데미는 어떤 곳?
게임 잘하는 아이들을 레이서로 키우겠다는 발상은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해 준 장본인은 바로 올랜도 블룸이 연기하는 대런 콕스란 인물이다. 그는 닛산 유럽 지사의 마케팅부 임원이었는데 소니의 게임 ‘그란 투리스모’와 자신이 마케팅을 해야 하는 닛산 자동차와의 협업을 처음 고안하게 된다.
대체 어떤 계기로? 그건 바로 자신이 주최한 게임 대회 때문이었다. 당시 대런 콕스는 닛산 자동차를 홍보할 목적으로 자동차를 경품으로 내걸고 게임 대회를 열었는데 대회 출전자들의 게임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 친구들이 게이머에서 레이서로 변모한다면?’이란 아이디어를 얻게 됐고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해 게임회사 소니와 자동차 회사 닛산이 합작해서 ‘GT 아카데미’란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 잠깐, ‘그란 투리스모’ 게임에 대해 소개하자면, 이 게임은 1997년 야마우치 카즈노리에 의해 고안된 비디오 게임으로, 대중에게 고품질 레이싱 시뮬레이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레이싱 게임의 패러다임을 바꾼 거나 다름없는 접근이었기 때문에 실제 운전 경험과 흡사하게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자동차 매니아가 열광하는 게임으로 자리 잡았다.
이쯤 되면 대런 콕스가 어떤 이유로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 운전도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는지 이해가 될 것 같다. 정교한 게임의 우수성을 역으로 증명하는 케이스가 되기도 한 이 레이서 발굴 프로그램의 이름은 ‘GT 아카데미’였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이 프로그램에서 모두 21명의 우승자를 배출했으며, 이들 중 다수가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하거나 국제 경주에 나가 놀라운 성적을 달성했다. <그란 투리스모>의 주인공인 잔 마든보로는 2011년 이 대회에서 9만 명의 참가자를 제치고 우승한 후에 여러 실전 경주에 참여하면서 국제 경주 면허를 취득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영화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게이머 출신 레이서,
큰 위기를 맞은 이유
잔 마든보로가 GT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착실하게 이수하고 레이서 면허를 취득하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보통 사람 입장에서는 이미 놀라운 일이다. 그는 아카데미에 들어가 레이싱 전용차를 몰고 트랙을 돌기 전까지 운전이라고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수준이 전부였다고 한다. 심지어 고속도로를 달려본 적도 없었다고 하니, 운전 실력이 얼마나 단기간에 급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게임만 하던 잔이 운전대를 잡고 실제 트랙에 처음 들어서던 순간을 묘사하던 어느 인터뷰 발언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19살에 처음으로 실버스톤 서킷에서 485마력의 GT-R 운전대를 잡고 안전벨트를 맸는데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나 자동차가 코너를 돌 때의 회전력, 미끄러지는 느낌까지 이상할 정도로 친숙했다. 스티어링 휠과 좌석을 통해 느껴지는 진동만 빼면 게임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잔은 운전에 대한 기본 소양이 전무한 상태로 무작정 뛰어들었던 게 오히려 운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2013년에는 포뮬러 레이싱 경주에도 출전했는데 그해 최고의 신인 레이서로 꼽혔다. 그는 또 이어서 권위 있는 모터스포츠 경기 르망 24시에도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그러다가 2015년 3월 28일, 드라이버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그것은 독일에서 열린 VLN 엔듀런스 챔피언쉽에서 난 사고였다. 잔이 몰던 닛산 GT-R 니스모가 악명 높은 독일의 뉘르부르크링 트랙을 달리던 도중에 바람을 못 이기고 뒤집히며 관중석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차는 관중석을 그대로 덮쳤고 많은 부상자와 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다행스럽게도 잔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의 사연이 영화화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사건을 본인 스스로 영화화하는 걸 허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드라이버에 복귀했고 <그란 투리스모>의 공동제작, 스턴트 드라이버, 컨설턴트로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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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데뷔한 잔 마든보로가 아무리 현역 중인 타고난 레이서라고는 해도 스턴트 드라이버를 한다는 것은 사실 또 다른 문제다. 할리우드에서 40년 넘게 레이싱 영화의 스턴트 드라이버 역할을 해온 전설적인 베테랑 스턴트 코디네이터 스티븐 켈소는 제작진으로부터 잔 마든보로가 직접 주연배우의 스턴트 드라이버 역할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엔 무조건 거절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스턴트’를 처음부터 가르쳐야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란 투리스모>는 <람보> 시리즈부터 <분노의 질주> 시리즈, MCU 영화들의 스턴트 코디네이터를 맡아온 할리우드 스턴트 베테랑이 잔 마든보로를 운전대에 앉힌 뒤, 그가 실제 트랙 위에서 실제 겪었을 법한 여러 가지 충돌 사고를 직접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찍어낸 영화인 것이다.
악명 높은 뉘르브루크링 트랙,
<러시: 더 라이벌>의 주요 사건 장소
레이싱 영화의 팬이라면 꼭 봐야 할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러시: 더 라이벌>도 레이싱 드라이버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 작품은 영화 역사상 포뮬러원 경기를 사실에 가깝게 묘사한 두 번째 영화로, (첫 번째 영화는 MGM에서 만든 1966년작 <그랑프리>) 영화의 주인공인 세기의 라이벌 제임스 헌트(크리스 헴스워스)와 니키 라우다(다니엘 브륄)의 수십 년에 걸친 우정담을 다룬다. 1976년에 독일 그랑프리 경기 당시에 폭우가 쏟아지던 뉘르부르크링 트랙에서 니키 라우다의 차가 충돌해 화염에 휩싸이고 큰 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 이후 뉘르부르크링 트랙에서는 포뮬러원 경기가 금지된다. 얼마나 위험한 구간인가 하면, 위키피디아에 해당 구간 경기에서 사고를 당한 레이서들의 목록이 1920년대부터 최근 시기까지 정리되어 있을 정도다.
레이싱 경주 최고의 권위,
르망24시와 스티브 맥퀸
<그란 투리스모>의 잔 모든보로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이를 극복하는 장소로 르망24시 경주를 택한다. 르망24시는 모나코 그랑프리, 인디애나폴리스 500 등과 함께 세계 3대 모터스포츠 경주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 르망 지역에서 매년 열리는 지구력 중심의 레이싱 경기로 24시간 동안 가장 긴 주행 거리를 달린 차가 승리하는 경기다. 이 경기는 레이싱 영화 역사에 있어서도 꽤 주목할 경기다.
르망24시를 이야기하려면 레이싱 영화의 촬영 기술 발전을 언급해야 하는데 현대의 레이싱 영화들이 사실적인 촬영 기법을 도입해서 보다 생생한 경주 장면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건 과거 할리우드가 목숨을 걸고 찍어낸 영화들의 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레이싱 경기를 촬영하는 특수 장비인 온보드 카메라를 비롯해서 고프로 같은 초경량 카메라도 존재하고 또 카메라를 고정할 수 있는 스테빌라이저 기술도 발전했지만 수십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무게를 자랑하는 필름 카메라를 필름통에 해당하는 매거진과 함께 경주용 차에 고정시켜 촬영하던 과거의 현장 사진을 찾아보면 정말 아찔하다. 달리는 자동차의 물리적인 위험성을 감수하고 찍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이런 노력을 가장 열심히 해낸 사람이 바로 <빠삐용> <대탈주> <블리트>의 스티브 맥퀸이고, 스티브 맥퀸은 르망24시 경주를 카메라에 담아 영화로 만들어낸 당대 최고의 자동차광 배우였다.
사실 스티브 맥퀸은 르망24시 이전에 포뮬러원 경기를 할리우드 최초로 영화화하려고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와 동시에 제작이 진행되던 MGM에 기회를 뺏겼다. 그가 워너브러더스와 찍기로 했던 <데이 오브 더 챔피언>이란 제목의 영화는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이 기구한 사연은 <스티브 매퀸: 잃어버린 영화>란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됐다. 티빙에서 관람 가능하다.)
당대 최고의 스피드광이었던 스티브 맥퀸은 결국 영화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독일 뉘르브르크링 트랙에서 최초로 파나비전 카메라로 레이싱 경주를 찍은 영화인이 되었다. 그는 이 실패를 평생 가슴에 담아뒀다가 훗날 르망24시 경주를 영화화한 <르망>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영화의 제작 과정도 너무 황당하고 무모했는데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그 현장의 악몽 같은 스토리는 최근 다큐멘터리 <스티브 맥퀸: 더 맨 앤 로망>으로 만들어져서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질풍노도의 질주
레이싱 영화의 매력
청춘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일컫는 말로 ‘잘풍노도’라는 수식어를 흔히 사용하는데 이 표현은 레이싱 영화의 매력을 설명할 때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레이싱은 제대로 사는 남자에게 중요한 요소입니다. 레이싱이 곧 인생이죠. 나머지는 레이싱을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죠.”라는 명대사를 남긴 스티브 맥퀸의 말처럼 트랙 위에 모든 걸 내던지고 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재미는 한결같다.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어떤 열망을 트랙 위에서 쏟아내는 질주 본능, <그란 투리스모>에서도 그 시원 짜릿한 감정을 대리 체험해 볼 수 있다.
김현수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