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조직 검은 9월단에 희생된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들의 복수를 위해 팔레스타인 인사들을 보복 암살하고 다니던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 아브너(에릭 바나)와 팀원들은,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KGB(소련 정보기관)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하는 자이드 무차시(제멜 바렉)를 암살하기 위해 그리스로 향한다. 그런데 정보상 루이(마티유 아말릭)이 제공한 안전가옥에서, 팀원들은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에 처한다. 같은 날 같은 장소를 빌렸다고 주장하는 PLO 조직원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서로를 적대시하는 두 무장집단의 충돌. 루이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 걸까? 다행히 로버트(마티유 카소비츠)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두 집단은 큰 충돌 없이 안전가옥을 나눠 쓰게 된다. 로버트가 자신들의 소속을 ETA(바스크 분리독립 무장반군), IRA(아일랜드 임시 공화국군), ANC(아프리카 국민회의), 바더 마인호프(서독 적군파)라고 둘러댄 덕분이었다. 같은 민족주의 무장세력이라는 동병상련 때문이었을까. 로버트가 둘러댄 소속을 들은 PLO 조직원들은 경계를 푼다.

바더 마인호프인 척 제 신분을 속이는데 성공한 아브너는, PLO 조직원들의 리더 알리(오마르 메트왈리)와 담배를 태우며 대화를 나눈다. 너희들의 활동은 실패할 거라고. 애초에 가진 적도 없었던 나라를 되찾을 수는 없다고. 너희도 그게 그저 꿈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고.

“유대인들을 죽이면 세상이 그들을 동정하고 너희를 짐승 취급 할 거야.”

“알아, 하지만 유대인들이 어쩌다가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었는지도 알게 되겠지. 그들은 우리에 갇힌 상태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할 거야.”

(중략)

“넌 진정으로 선조들의 고향이 그리워? 아무것도 없는 땅을 정말로 되찾아야 한다고 믿어? 척박한 토양과 돌집이 전부인데 후손을 위해 정말 그런 걸 원해?”

“당연하지. 100년이 걸려도 우린 승리할 거야. 유대인이 나라를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지? 독일인들은 독일을 세우는 데 얼마나 걸렸고?”

“그래서 지금 결과가 어떤지 봐.”

“자네는 집이 없는 심정을 몰라. 그래서 유럽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를 이해 못 해. 다들 ‘별거 아니잖아’ 라고 하지만 너희에겐 돌아갈 집이 있잖아. ETA, ANC, IRA.. 우리들이 자네들의 국제혁명에 관심 있는 것처럼 굴지만, 천만에. 우리는 나라 있는 국민이기를 원해. 집이야말로 모든 것이니까.”

아브너는 혼란스럽다. 애초에 자이드 무챠시는 자신들의 암살 리스트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브너의 팀이 PLO와 KGB 사이의 연락책이었던 후세인 아바드 알히르(모스테파 디아디암)를 암살하자, PLO가 알히르를 대신해 보낸 후임자가 무챠시였던 것이다. 전임자 알히르에 비해 훨씬 더 과격하다는 정보상 루이의 말에 어쨌거나 암살하러 그리스까지 왔지만, 아브너의 마음 한 켠에는 의구심이 자라고 있다. 이 암살에 끝이 있을까? 한 명을 제거하면 더 과격한 사람으로 대체되는 악순환이 아닐까? 뮌헨 참사 이후 우리는 레바논을 폭격했고, 우리가 팔레스타인 인사들을 암살할 때마다 팔레스타인 측은 또 다른 테러를 저지르는데… 여기에 끝이 있긴 할까?

그런 와중에, 알리는 꼭 자신들이 할 법한 말을 한다. 집 없이 나라 없이 살아가는 민족의 서러움을 네가 아느냐고.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나라를 건설하고야 말 거라고. 불과 몇십 년 전인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전까지만 해도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이 하던 말이 그것 아닌가. ‘척박한 토양과 돌집이 전부’인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유대인들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왔던가. 그런데 그와 똑같은 소리를 적인 PLO 조직원인 알리가 하고 있으니, 아브너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보복의 연쇄, 우리의 명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대의 명분. 아브너는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스티븐 스필버그가 ‘신의 분노 작전’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입장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 거라고 지레짐작하기도 했다.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유대민족이 겪은 가장 끔찍한 역사인 홀로코스트를 정면으로 고발하기도 했던 스필버그니까. 게다가 각본 각색을 담당한 토니 커쉬너 또한 유대인이니, 이번 영화도 뮌헨 올림픽 참사로 상처 입은 유대인들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겠어? 아무리 균형감각이 뛰어난 스필버그라 하더라도 이렇게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의 편을 더 들지 않겠어? 하지만 스필버그와 커쉬너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뮌헨〉은, 그런 영화가 아니다.

〈뮌헨〉은 대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보복의 연쇄 속에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탄식하며 바라본다. 도덕적 명분은 갈수록 흐릿해지고, 반복되는 임무 속에서 일단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다른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투의 마음이 자리를 잡는다. 민간인 경호원과 함께 있어서 암살 대상을 관찰만 했을 뿐 쏘지는 않았다는 아브너의 말에, 팀원 중 가장 열렬한 시오니스트인 스티브(다니엘 크레이그)는 자기였으면 쏘았을 것이라며 말한다. “(팔레스타인) 놈들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놈들을 이길 수 없어!” 팀 내 최고참인 칼(시어란 힌즈)은 답한다. “우린 늘 놈들처럼 행동해왔어. 유혈 참사를 뭐 팔레스타인 놈들이 발명한 줄 알아? 우리가 어떻게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쥐었겠어? 친절해서?”

스티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기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아브너는, 하나둘씩 동료들을 잃고 난 뒤 자신이 맡은 임무를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암살한 그 많은 사람은 정말 뮌헨 올림픽 참사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긴 했던 걸까? 그 사람들을 죽이고 난 자리에 더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람들이 들어온 것 뿐이지 않나? 팔레스타인인들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면,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그랬듯 체포를 해야 했던 게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는 아브너가 이민을 떠난 뉴욕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따라 천천히 패닝하다가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있는 지점에서 멈춘다. 보복의 연쇄가 어느 지점까지 도달했는지, 스필버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신의 분노 작전’은 테러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뮌헨〉의 이와 같은 묘사에 불쾌감을 표했다. 스필버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50여년 간 이어져 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는 게 부담스러워 한 차례 연출 제안을 거절했고, 마침내 연출을 수락할 때엔 “이 주제를 건드린다면 친구들을 잃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단 연출을 수락한 스필버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피를 피로 갚는 일이 과연 평화를 불러 올 수 있겠냐고 싸늘하게 물어보는 쪽을 택했고, 그 반복된 역사가 어떤 비극으로 이어졌는지 똑바로 보라고 말하며 탄식하는 길을 택했다.

〈뮌헨〉이 공개된 지 18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피를 피로 갚는 끝없는 나선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있다. 누군가는 먼저 그 나선에서 내려가야 하는데, 아무도 먼저 내려갈 생각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자지구를 완전 봉쇄하고 하마스의 거점을 폐허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이스라엘과, 가자지구를 폭격할 때마다 인질을 한 명씩 죽이겠다고 선언한 하마스 앞에서 나는 〈뮌헨〉을 다시 본다. 피의 나선은 끝도 없이 순환하고, 스필버그의 탄식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