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같은 시네필을 위한 고강도 하드 트레이닝. 허리운동은 필수다.

영화제는 특별한 힘이 있다. 평소라면 도저히 관람이 꺼려지는 난해한 작품도 영화제라면 독특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예매할 용기가 생긴다. 다른 극장에서는 관람하기 어려운 영화라는 특수성이 어떤 영화든 감내하고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 또한 영화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다. 최근 극장에서 상영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120분 안팎의 길이지만, 3시간은 물론 4시간이 넘는 영화도 왠지 영화제에서는 소화할 수 있다는 배짱이 생긴다. 막상 극장에 들어가서 2시간쯤 지나면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고, 다 보고 나오면 없던 디스크라도 생긴 것처럼 허리가 뻐근하고 저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제니깐’이라는 한 마디로 그 모든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시네필 하드 트레이닝 코스’가 된 셈이다.

올해 부산의 새로운 발견 <비행자들>. 사진제공 = 부산국제영화제

이번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유달리 초장편 영화들이 많이 등장했다. 120분이 넘는 영화들도 상당히 많았으며, 180분을 넘기는 화제작들도 상당수 초청되었다. 필리핀의 거장 라브 디아즈의 신작 <호수의 깊은 진실>은 3시간 35분으로 평균 4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그의 작품을 감안하면 비교적 짧게 영화를 만든 수준이다. 아르헨티나의 나른한 하이스트 무비 <비행자들> 또한 돈 가방과 금고를 턴다는 이야기를 무려 3시간에 걸쳐 진행한다. 한국인이 제일 사랑하는 일본 영화감독 중 하나인 이와이 슌지의 신작 <키리에의 노래> 역시 3시간에서 2분 모자란 178분의 러닝타임에도 전 회차 매진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 번 영화를 보기 위해 많은 결심이 필요한 ‘러닝타임 3시간 이상의 초장편 영화들’ 중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 작품 세 편을 꼽아 보았다. 부디 당신의 허리가 무사했기를.


<마른 풀에 관하여> dir. 누리 빌게 자일란 (197min)

이제는 터키 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인 누리 빌게 자일란 감독의 신작 <마른 풀에 관하여>는 시골 마을에서 4년간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오로지 이스탄불로 전근가기를 바라는 미술 교사 사메트의 이야기를 다룬다. 2014년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윈터 슬립>을 포함하여 그의 작품 대부분이 160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만큼, 이번 작품 역시 3시간 17분이라는 장대한 시간 동안 한 남자의 권태와 위선, 그리고 척박한 내면을 세밀하게 표현한다. 날씨라고는 여름과 겨울밖에 없는 터키의 설원 위에 영화는 사메트의 질투, 위선, 편견, 오해, 어긋난 욕망과 같은 내면을 덧붙인다. 순수함으로 대변되는 눈밭 위에 놓인 이 남자는 도저히 그 새하얀 풍경과 맞지 않아 보인다. 지긋한 시골 생활에 대한 혐오,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을 향한 어긋난 욕망, 룸메이트에 대한 질투, 혁명과 진보라는 단어에 대한 염세주의적 태도는 도저히 이 남자와 친해지고 싶지 않게 만든다.

사메트는 어느 날 그가 아끼던 (혹은 연정을 품었는지도 모르는) 반 학생이 교육청에 자신을 성추행으로 신고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날 이후로 사메트는 아이를 의도적으로 나무라거나, 반 아이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수업하거나, 학교에 대한 흉을 보며 자신의 불만을 표출한다. 이는 이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마찬가지다. 처음 누라이라는 여성을 소개를 받았을 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던 그는 룸메이트 케난에게 그녀와 만나보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이윽고 그 둘이 잘 어울리는 모습에 질투가 생긴 그는 의도적으로 친구를 따돌리고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추파를 던진다. 사메트라는 남자의 모든 동력은 부정의 감정들이다. 질투, 분노, 권태, 염세. 마치 지루한 눈이 그치면 푸릇한 잔디가 솟아날 새도 없이 누렇게 바랜 마른 잔디로 변해버린 시골 마을의 땅과 같다. 마치 <나는 솔로>의 한숨만 나오는 인물들을 보는 것만 같은 이 긴 드라마에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누라이 역의 메르베 디즈다르의 연기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춘다. 누리 빌게 자일란의 이번 작품은 풍경에 동화되지 못한 남성의 오만함에 대한 조소가 가득하다.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 dir. 프레드릭 와이즈먼 (240min)

다큐멘터리의 전설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의 신작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은 4시간으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제일 긴 러닝타임의 작품이다.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시티홀>(2020), <버클리에서>(2013)처럼 거대한 집단 혹은 조직의 각 요소를 마치 육체를 구성하는 유기적인 개별 세포로 보는 방식과 <라 당스>(2009), <내셔널 갤러리>(2014) 속 전시회, 발레단의 공연처럼 하나의 과정을 그 단계에 맞춰 보는 방식이다. 이번 그의 작품은 둘 중 후자에 속한다. 2020년 여름 프레데릭 와이즈먼이 우연히 주변에 있는 식당을 검색하다 ‘르 브와 상 포이으’를 예약했고, 거기에서 셰프인 미셸 트와그로를 만나 제작된 이 영화는 트와그로 가족의 레스토랑이 운영되는 일련의 과정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마치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가 아무즈부쉬와 애피타이저에서 시작하여 메인 디쉬를 경유하여 디저트로 도달하는 미식의 여정인 것처럼 그는 트와그로 가족이 코스 요리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식사가 끝나는 순간까지의 여정을 함께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이번 신작이 유달리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처음으로 인물에게 영화가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그의 작품의 소재는 주로 시청, 도서관, 대학교 등과 같은 하나의 집단을 수용하는 장소거나, 아니면 무용단처럼 하나의 군집이었다. 하지만 미셸 트와그로와 그의 아들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기획은 셰프의 몫이기에 이따금 셰프의 이야기들이 그의 다큐멘터리에 추가된다. 와인을 고르고, 치즈를 생산하고, 메뉴를 만드는 모든 과정은 그의 ‘다이렉트 시네마’의 법칙에서 자연스러운 장면이지만, 직접 테이블에 인사를 나누며 손님에게 자기 음식이 지닌 의미와 영감에 대해 설명하는 트로그와 셰프의 장면은 어딘가 그의 영화에서 처음 보는 낯선 장면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그의 오랜 팬들은 호불호를 드러낼 수 있겠지만, 4시간에 걸친 러닝 타임 동안 런치부터 디너까지 이어지는 파인 다이닝 코스의 요리를 탐닉하는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정교하다. 마치 사소한 재료들마저 유기적이면서 동시에 각 요소의 풍미를 극한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파인 다이닝의 원리처럼,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요리와 코스를 구성하는 재료, 공간, 사람, 시간을 섬세하게 배치한다.


<청춘(봄)> dir. 왕빙 (215min)

지난해에도 특별 기획 프로그램에서 상영된 <세 자매>(2012)를 통해 부산을 찾은 중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왕빙의 신작 <청춘(봄)>이 아이콘 섹션을 통해 소개되었다. <청춘(봄)>은 10시간에 이르는 <청춘> 연작의 1부로 현재 그는 프랑스에서 2부와 3부의 편집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청춘(봄)>은 중국 의류공장의 중심지인 질리시에서 의류 재봉 노동을 하는 10대, 20대 청년들의 초상을 집요하게 담아낸다. 6년간의 촬영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공장을 돌며 젊은 나이에 노동 현장에 투입된 청춘의 삶을 조망한다. 이들의 노동 환경은 열악하고 업무 강도는 살인적이지만, 왕빙은 이들의 노동 현장에서 가혹함만을 발견하지 않는다. 단순히 고발적인 태도로 환경을 돌아보기보다는 가장 빛나고 꿈으로 가득 찬 시간을 공장에서 보내야 하는 그들의 삶에 사소한 부분들에 관심을 보인다.

공장의 어린 노동자들은 싸우기도 하고, 이성에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고, 좋은 옷과 고향으로의 휴가를 꿈꾸기도 한다. 업무가 끝나고는 훠궈에 술 한 잔을 곁들이기도 하고, 비좁은 기숙사 이층 침대에 걸터앉아 서로의 연애 관계에 대한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렇다고 <청춘(봄)>은 그들의 노동을 찬미하거나, 좋은 시절의 치열함으로 포장하지는 않는다. 이미 이들의 사소한 삶 외곽에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노동의 풍경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4,000벌을 넘게 만들어도 4만 위안(약 740만원)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사장과 입금 문제로 담판을 지으려 하기도 하고, 서로의 업무 분담 문제로 가위나 바늘을 들고 다투기도 한다. 다만 이들은 사소한 삶의 낙을 발견하거나, 대중가요를 틀어 놓고 수다를 떨면서 각박하고 어려운 노동의 현실을 견뎌낼 뿐이다. 21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단 한순간도 공장 지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마지막 10분 만이 그들의 고향으로 카메라가 향한다. 부당한 현실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이들의 휴가와 같은 이 장면은 왕빙의 다음 연작이 무엇을 향할지 기대하게 만든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