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드리머>. 사진제공 = 부산국제영화제

어떤 배우는 대사 이상의 육체를 연기하고, 어떤 감독은 그 배우의 모든 것을 극한으로 포착할 줄 안다. <스칼렛>(2022), <스테잉 버티컬>(2016)을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 라파엘 티에리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감독 아나이스 뗄렌느의 장편 데뷔작 <더 드리머>에도 함께 했다. <더 드리머>는 동화 '미녀와 야수' 21세기판이다. 하지만 여기서 미녀는 현대 예술가이며 상속녀이고, 야수는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반맹의 사나이다. 영화는 고전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쫓지 않고 금세 예술과 육체의 관계로 빠져든다. 육체를 연기할 줄 아는 배우와 예술의 낙폭을 경험하는 감독, 라파엘 티에리 배우와 아나이스 뗄렌느 감독을 만나 긴 시간 동안 예술과 육체 그리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나이스 뗄렌느 감독.

아나이스 뗄렌느 감독과 라파엘 티에리 배우 두 분은 단편 <19 juin>(2018), <Le Mal Bleu> (2018), <Modern Jazz> (2018)에 이어 <더 드리머>를 통해 네 번째로 작품을 함께합니다. 어떤 계기로 함께 작업을 시작했나요? 이번에 다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아나이스 뗄렌느 감독 (이하 아나이스): 제가 먼저 라파엘을 찾아간 입장입니다. <19 juin>라는 역사에 관한 단편을 찍을 당시, 극 중 인물인 쇼팽의 피아노를 이사할 때 옮겨줄 역할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알랭 기로디 감독님의 <스테잉 버티컬>을 보고, 라파엘 티에리 배우의 마스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꼭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당시 칸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을 받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전달해 드렸는데, 비중이 그리 큰 역할이 아님에도 유쾌하게 승낙해 주셨습니다. 세 편의 단편을 찍으면서, 당연히 장편도 함께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레르몽페랑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라파엘이 먼저 ‘한 남자가 혼자 살고 있는데, 맞은편에 한 여성이 이사 오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는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2년간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더 드리머>가 탄생했습니다.

라파엘 티에리 배우 (이하 라파엘): 우리가 여러 작품을 함께 작업하기도 했지만, 영화를 찍기 전부터 한 감독님을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내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잘 알아가고, 적응하며, 맞춰가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웃음) 덕분에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라파엘 티에리 배우

라파엘 배우님은 연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한다고 들었어요. 코미디언, 배우, 백파이프 연주자로도 활동했다고 하는데, 이번 <더 드리머>에서도 백파이프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라파엘: 저는 프랑스 부르고뉴 중부 지역의 모르방이라는 지역 출신입니다. 그곳은 민속음악과 전통문화로 굉장히 유명한 지역입니다. 사실 백파이프는 유럽의 일부 지역과 아프리카 북부 외에는 접하기가 어려운 악기입니다. 동네 친구가 아코디언을 좋아해서 전통 음악 전문가가 되면서, 그 친구를 따라 백파이프 연주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음악 그룹도 결성하여 전통 음악뿐만 아니라 베이스나 키보드, 드럼처럼 현대 음악의 여러 요소를 접목하는 시도도 했습니다. 재즈에 백파이프 사운드를 녹여 보기도 했죠. 몇 년 전에는 서울 음악 축제에 방문해서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백파이프도 단순히 과거의 악기가 아니라, 아코디언, 비올라, 기타처럼 일상적인 악기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연기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제가 텍스트나 언어의 측면에서도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영화를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상속녀 개렁스가 작업하는 점토조각, 사진, 행위예술, 전자음악 등 현대예술의 영역과 라파엘의 백파이프 연주가 대비된다는 점이 독특한 발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 드리머> 속에 스며들어 있는 예술에 대한 관점이 궁금합니다.

아나이스: <더 드리머>는 동화입니다. 그리고 동화는 사회적 계층 간의 격차가 매우 큰 두 인물이 만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양치기 소녀가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있죠. 때문에 <더 드리머>에서도 인물 간의 격차가 등장합니다.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에 대해 집중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예술을 하는 인물은 예술을 통해 사회적인 장벽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라파엘은 구두 전통으로 내려져 오는 백파이프를 연주하고, 개렁스는 현대 예술가로서 자신과 본인 경험이 곧 예술 행위가 되는 사람이기에 그와는 대조적인 작업을 합니다. 둘 사이의 예술적인 스펙트럼은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차이를 상쇄시켜 두 인물을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효과를 자아냅니다.

소피 칼의 <호텔>

개렁스라는 인물이 현대 예술, 특히 일상을 예술로 담는다는 점에서 다양한 개념 예술가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일상을 예술로 만든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아나이스: 14, 15세 때부터 소피 칼이라는 예술가에게 굉장히 매료되었습니다. 개렁스라는 캐릭터도 그런 연장선에서 탄생했습니다.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 <호텔(l’hotel)>이라는 작품은 베니스에 본인이 묵었던 호텔 방을 그대로 재현했었습니다. 연인이 헤어지고 남겨진 메시지를 그대로 담은 전화기조차 전시된 것들을 보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삶을 예술로써 풀어내는 작업이 많은 용기가 느껴지는 행위로 다가왔기에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예술의 소재로 삼는 일이 예술에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작업이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 <더 드리머>

엠마뉴엘 드보스가 연기한 상속녀 개렁스는 대사와 표정 연기를 통해 감정을 드러내는 스타일이라면, 라파엘 티에리가 연기한 인물은 덤덤하게 육체의 속성을 드러낸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서로 다른 연기 스타일을 지닌 두 사람 사이의 앙상블을 구축하려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라파엘: 개인적으로는 엠마뉴엘 드보스라는 배우에게 이전부터 매료되었습니다. 대비라는 단어는 일상에서도 당연한 부분입니다. 당연히 화면에서 대조적인 스타일을 끌어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두 인물 간의 대비를 위해 따로 무언가를 만들어가겠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시나리오에서 당연하게 도출된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감독님의 공이 더 컸습니다.

<더 드리머>

<더 드리머>에서 연기한 저택 관리인 라파엘은 예술의 대상인 조각이 됩니다. 이는 카메라에 포착되는 배우와도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점토를 뒤집어쓰고 진행하는 연기는 힘들지 않았나요?

라파엘: 점토를 바르고 연기하는 장면은 꽤 고통스러운 작업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나이스 감독님께서 절대 강제하신 부분은 아니고, 저도 도전하고 싶었던 작업이었습니다. 다만 시간의 문제에 쫓기는 작업이기에 물리적인 어려움은 존재했습니다. 점토가 굉장히 빨리 마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표면을 적셔줘야 했습니다. 또한 점토 두께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피부가 숨을 잘 못 쉬다 보니, 몸이 추워지거나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촬영 기간 자체는 4시간 정도의 준비 과정을 걸쳐 딱 3시간만 촬영했기에, 큰 제약이 있던 촬영은 아니었고 오히려 연기에 큰 도움이 된 경험이었습니다. 조각상이 뒤를 돌아보는 장면에서 엄청난 감정을 전달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개렁스가 오히려 욕망의 대상에 대한 감정이 잘 드러나는 훌륭한 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스칼렛>에 출연했던 라파엘 티에리.

피에르토 마르첼로의 <스칼렛>이나 알랭 기로디의 <스테잉 버티컬>에 등장하는 라파엘 티에리 배우는 얼굴뿐만 아니라 손이나 다른 신체들을 통한 연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강도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매우 흥미로웠어요.

아나이스: 영화가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역설적인 것의 역동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언뜻 라파엘을 보았을 때는 압도적인 면모에 위협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너무나도 부드럽고 자상한 면모들이 발견되는 이 대조적인 부분이 좋았습니다. 라파엘 티에리 배우님을 통해 이 역동적인 모순을 찍고 싶었어요.

라파엘: 저와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무언가 자신을 지우고 싶고 감추고 싶은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모습 그대로를 오히려 드러내면서, 하나의 장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수감자나 농부처럼 거칠고 공격적인 역할들이 많이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아나이스 감독님이나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님 같은 경우에는 제 이면의 면모를 발견해 줘서 감사하게 이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대사 너머의 표정, 육체, 감각 등의 다른 요소에 대한 라파엘 티에리 배우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라파엘: 사실 작업 초반에는 대사가 더 많았습니다. 대사가 행위를 부연 설명하는 역할에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감독님과 제가 둘 다 동의하여 대사를 많이 줄였습니다.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님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대사량이 어마어마했지만, 제가 대사를 좀 덜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연극과 달리 카메라 앵글만으로도 얼굴의 세세한 부분을 잘 강조할 수 있습니다. 대사보다는 그 디테일이 더 많은 내용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음악도 연기도 모든 것을 다 독학으로 배운 만큼 특별히 무언가를 노력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런 속성이 따라왔습니다.

<더 드리머>

상속녀 개렁스는 라파엘의 얼굴을 보고 풍경(Visage)이라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더 드리머>는 얼굴에 대한 영화라는 느낌이 듭니다. 배우님에게도 이전의 다른 작품과는 또 다른 모습을 이번 영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던 계기였던 것 같은데요.

아나이스: 영화의 초반부에 표현되는 라파엘의 얼굴과 마지막에 나타나는 얼굴 사이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인물의 얼굴을 봤을 때, 이 사람이 어느 단계에 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물론 의안처럼 두드러지는 디테일도 있겠지만, 그 외의 요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기나 시나리오에도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조명이나 촬영의 측면에서도 예산의 문제로 아날로그 필름으로 찍지는 못했지만, 아나몰픽 렌즈를 활용한 뒤 디지털의 질감을 최대한 훼손하기 위해 여성용 스타킹을 렌즈에 씌워서 촬영했습니다. 피부 그대로의 날 것을 화면에 최대한 보여주면서, 동시에 디지털 시대에 당도하여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라파엘: <스칼렛> 이후로는 제가 연기하는 인물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조금 더 비판적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결과물에 대해 후회했다면, 이번 두 영화를 계기로 연기하는 것이 조금 더 성공적으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제가 연기했던 인물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더 드리머>에서 개렁스가 저를 진심으로 바라줬을 것 같다는 시선으로 제가 연기한 인물을 바라보게 된 점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껍질을 벗겨내고 누드화하는 작업인 셈이죠.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