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데에는 스스로를 믿는 능력이 있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본능은 막을 수 없어서 워터게이트가 터졌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왜 그들이 강대국의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증명이었다. 사고는 상대를 말해주지 않지만, 그 대응은 상대를 설명하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관점이 올리버 스톤 감독이 <플래툰>(1987)과 <7월 4일생>(1990)으로 통렬하게 조국을 까면서도 두 번이나 아카데미를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지 모르겠다.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성경과 헌법 책에 손을 올리고 하는 선서는 빠지지 않는 전통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1861년에 링컨이 사용한 성경에 손을 올렸고, 조지 부시는 1789년 조지 워싱턴의 성경을 이용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헌법 책에 손을 얹고 선서하면서 미국을 떠받치는 두 정신적 뿌리가 무엇인지 알려줬다. 미국은 정치적 핍박을 피하고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면서 만들어진 나라이기에 이 두 가지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 거기에 늘 언급되는 것이 영웅의 부재였다.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며 헌법을 만든 존재들이 있었으나 1787년이라는 시기를 생각하면 위인화하기엔 짧은 감이 있었나 보다. 미국은 늘 호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흔적은 최근까지도 유행했던 히어로물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헌법은 갓 독립전쟁을 마친 연방정부가 떠나온 유럽 국가의 폭압적 태도를 피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며 만들어 냈기에 국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장전된 기본권 덕분인지, 총기 소지 문제는 지금도 논란에 오를 때마다 나라의 근간과 맞닿은 문제라며 외면 혹은 무시되기도 한다. 애당초 청교도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며 실용주의와 자유 민주주의가 건국 정신으로 자리 잡았기에, 종교 또한 미국의 주요한 정신이라 볼 수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두 가지 요소를 건드리며 숨어있는 어두운 면을 들추는 것은 미국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8)의 경우는 종교와 석유를 끌어와 현대 미국을 떠받치는 두 연원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미국의 외교 덕분에 사우디 석유 거래에서 달러만 통용되어 세계 통화의 표준이 되었으니, 감독은 석유가 내포한 욕망을 미국 그 자체로 바라본 것이다.
영화의 시선
SF영화 <크리에이터>(2023)는 종교적 요소를 많이 끌어왔다. 인공지능의 메인 소비지역처럼 등장하는 뉴 아시아에는 로봇이나 시뮬런트라 불리는 사이보그가 승려의 복장을 하고 생활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도 아니요, 인류의 절멸도 아니다. 반면에 미국의 군인들은 인공지능을 향한 복수가 아니면 무엇도 의미 없는 1차원적 모습을 보인다.
인공지능의 절대자이자 아이의 모습을 한 알피(매들린 유나 보일스)는 어쩌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다. 그러나 알피의 존재 자체가 위협인 인간들은 알피의 엄마인 마야(젬마 찬)와 부부였던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에게 알피의 제거를 의뢰한다. 알피의 정체를 모르고 만났던 조슈아는 비정한 인간들의 모습과 그에 비해 훨씬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인공지능들을 보며 갈등하며 결국엔 A.I.의 편에 서게 된다. 게다가 자신의 유전자를 품은 자식 같은 존재 아닌가.
미국으로 대체되는 인간의 세력은 무지막지하다. 노마드라 불리는 장비를 이용하여 인공지능을 사냥하며 부가적 피해를 고려치 않는 모습을 보면 과연 어떤 대응을 하는 쪽이 인도주의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딜레마에 빠진다.
미국군측 지도자인 하웰(엘리슨 제니)은 인공지능에게 자식을 잃어서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적개심을 드러내는 데 있어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나 A.I.측 지도자인 마야는 노마드 공격으로 인해 아이를 잃었지만 새로운 아이인 알피에겐 인간을 향한 증오를 프로그램 하지 않는다. 보복과 해빙의 측면에서 연출자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며 미국이 지닌 제국주의적 면모에 일침을 가한다.
낡은 시대의 인간을 미국인, 새로운 시대의 인간을 인공지능이라 비유했을 떄 각자가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완연한 자유다. 그러므로 전 세대로부터의 탈피는 기독교적 요소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로의 진입쯤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물의 설정에서 반종교적 요소들이 눈에 띈다. 실제로는 신의 아들인 예수가 희생하여 세상을 구했다면, 영화에서는 아버지인 조슈아가 아들과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처녀 수태했던 마리아에 비해 마야는 조슈아와의 관계에서 알피를 가지게 된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가 만나면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했다면, <크리에이터>에선 두 남녀가 진정으로 만나면서 끝을 맺으며 다음 세대 인간의 출현을 알린다. 이런 요소들은 미국과 그 근간인 성경을 비틀어 보면서 현실적인 성찰을 유도한다.
연출자의 또 다른 시선
이를 종합해보면 연출자는 편을 가르는 행위를 경계함을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행했던 선 긋기는 많은 혐오를 정당화했다. 많은 희생을 감행하는 전쟁은 결국 그런 자세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독이 제시하는 영화적 이미지에는 의아함이 따른다. 배경인 뉴 아시아는 동북아, 동남아, 서아시아의 국가를 마구 섞은 것으로 묘사되며 다양한 언어가 구사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 통해 윤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강대국의 입장에서 이방의 세계인 오리엔탈리즘으로 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뉴 아시아엔 인공지능이 경찰과 군대 역할까지 하고 있지만 정작 배경엔 넓은 논과 밭, 그리고 수많은 소떼들로 채워진다. 도시와 문명으로 채워진 서양과는 대비가 극명하다.
미국은 중국 티베트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티베트 문제 조정관을 따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알려진 이미지는 '모든 동양인은 인사할 때 합장을 한다'는 기묘한 클리셰로 이어진다. 중국이 반세기 동안 자행한 티베트 학살은 달라이 라마나 틱광득 스님이 서양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 및 사회주의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심벌이 되었다.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개한 동양은 아직도 현대국가의 모습을 덜 갖췄다는 인식에서 오는 이런 표상은, 할리우드에서 아시아를 묘사할 때 제시하는 유행 이미지였다.
<크리에이터>는 블록버스터 치고는 굉장히 열악한 예산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폭파씬을 묘사하는데도 푸티지를 구입하기보다는 실제 장면에서 CG를 추가하여 효과를 냈다. 문제는 그 원소스가 실제로 비극적인 사고였다는 데 있다. 베이루트 항구에서 질산암모늄이 터져 비극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그 국가 시스템의 불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사용하기로 한 제작진은 영화의 메시지와 비교했을 때 이런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크리에이터>는 분명 강대국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연출자가 보여주는 경향에서 의아함이 나오기도 한다. 시각적 화려함을 강조했던 감독의 필모들을 보며 다음 작품은 그 알맹이까지 채울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