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이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 「필름랜드 엠파이어」 는 “박찬욱 감독이 클로드 샤브롤 감독을 추모하듯 만든 영화같다”고 썼다. 또 박찬욱 감독이 크라이테리언에 방문해 꼽은 10편의 세계영화 ‘픽’ 중 하나가 바로 클로드 샤브롤의 <사촌들>(1959)이다. 그만큼 클로드 샤브롤은 박찬욱 감독이 장 피에르 멜빌과 더불어 가장 사랑하는 프랑스 감독이기도 하다. 바로 그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대표작 5편 <악의 꽃>(2002), <초콜렛 고마워>(2000), <사기>(1997), <의식>(1995), <지옥>(1994)이 4K 리마스터링되어 ‘국내 최초 극장 개봉’으로 찾아온다. 이번 특별전은 10월 11일 씨네큐브를 시작으로 내년 초까지 15개 이상의 전국 예술영화관에서 진행될 예정으로 금주부터 부산 영화의 전당, 씨네Q신도림, 라이카시네마 등에서 본격적인 상영 레이스에 들어간다.
프랑스 뉴웨이브 운동의 핵심은 비평가에서 영화 제작자로 변신한 다섯 명의 「까이에 뒤 시네마」 출신 감독들이라 할 수 있다. 총과 여자만 있으면 된다는 대중영화 해체주의자에서 급진주의자로 변신한 장 뤽 고다르, 동심에 대한 애정을 지닌 휴머니스트 프랑수아 트뤼포, 유쾌한 희극적 도덕주의자 에릭 로메르, 불투명한 실험주의자 자크 리베트, 그리고 클로드 샤브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불길하고 도발적인 히치콕식 충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가장 주류로 여겨진 샤브롤은 일반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는 도덕적 이야기에 대한 객관주의적 태도로 일관해 거리를 유지하는 냉담한 형식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접근 방식과 철학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샤브롤은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이 다섯 명의 감독 중 최초로 장편 영화를 개봉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1958년 자비로 제작한 <미남 세르주>는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보다 1년,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보다 2년 앞서 개봉한 작품으로, 누벨바그의 다른 감독들에게, 신념으로 가득 찬 작품만 있다면 제작자가 굳이 빼어나지 않더라도 자력으로 영화판에 진출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다작을 좋아하고 까다롭지 않은 편이었던 샤브롤은 1년에 평균 2~3편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니더라도 영화 제작을 좋아했고, 실제로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는 달리 뻔하게 여겨질 수 있는 스튜디오 작업을 기꺼이 맡기도 했다. 2010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50편이 넘는 장편 영화를 만들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여성의 삶과 운명을 다룬 긴장감 넘치는 작품들이었다.
샤브롤은 종종 히치콕이라는 거장에 대해 프랑스 영화계에서 등장한 응답과도 같은 존재로 평가되지만, 스릴러와 서스펜스 장르에서 샤브롤의 공헌은 연상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비중이 크다. 때때로 변덕스럽다가도 어느 순간 우아한 매너가 있으며, 특유의 질감이 느껴지는 관찰주의적 작품에는 공포와 스릴, 그 이상의 철학적 질문이 담겨 있다. 그는 인간에 대한 희망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위선적인 계급과 사회 통념에 대한 신랄한 연구와 도덕극으로 요약된다. 또한 샤브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교활하게 조롱하는 듯한 그의 블랙 코미디로, "어리석음은 지성보다 무한히 더 매력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샤브롤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누벨바그의 스타일에서 확실히 벗어나고자 했고, 시골에서 친구가 된 두 하층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의식>을 통해 현실주의에 도전했다. 주인공 소피(상드린 보네르)는 부유한 부자들을 위해 일하는 가정부 역을 맡아 괴팍하고 때때로 조증을 보이는 우체국 직원 잔느(이자벨 위페르)와 점점 가까워진다. 이자벨 위페르는 이 영화에서 모든 권위를 싫어하는 엉뚱하고 광기 어린 젊은 여성을 연기하며 그녀가 쌓아온 고정관념을 깬다. 또한 보네르는 냉정하고 가식적인 고용주(자클린 비셋과 장 피에르 카셀이 연기한) 부부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하는 난독증에 수줍음이 많은 젊은 여자로 등장한다. 양극화된 계층 사이에서 충격적이고 도발적이며 거의 정신착란에 가까울 정도로 폭력적인 피날레는 프랑스 부르주아 계층과 하층민 사이 갈등에 대한 최고의 논평이 아닐까. 이 영화는 계급 투쟁, 비밀스럽게 파괴적인 힘을 탐구한다. 사회적 예의의 외피를 벗겨내어 소름 끼치는 속내를 드러내게 한다.
천상의 하모니를 들려주는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를 배경으로 한꺼번에 모든 지옥이 펼쳐진다. 양극화된 거친 결말에 아마도 관객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갈릴지도 모른다. 충격적이고 불길한 샤브롤 특유의 냉담한 블랙 유머가 깃든 장면들과,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고 무심한 결말은 성공적으로 그 이후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의식>의 서사를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봉준호의 <기생충>에도 미친 영향 역시 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페미니즘의 독특한 브랜드
샤브롤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을 다차원적인 인물로 거침없이 묘사한다는 점이다. 그의 영화는 특히 누벨바그 시절, 프랑스 영화계에서 획기적으로 등장한 깊이와 복잡성을 지닌 여성 주인공의 삶을 탐구한다. 샤브롤이 묘사하는 여성은 단순한 욕망의 대상이나 고난에 처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닌 서사의 능동적인 주체로 등장한다. 샤브롤의 영화는 관찰적이다 못해 거의 병을 진찰하는 듯한 시선을 유지하지만, 마냥 무미건조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영화 속에는 히치콕식 음모가 가득하지만 특유의 풍미가 존재한다. <초콜렛 고마워>는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뒤바뀐 시나리오와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한 가족을 중심으로 한다. 이자벨 위페르는 초콜렛을 좋아하고 숨겨진 의도를 가진 수수께끼 같은 여성 미카 역을 맡아 가족 간의 역학 관계와 오랫동안 묻혀 있던 비밀을 긴장감 넘치는 미로로 끌어들인다.
서스펜스와 사회적 논평의 결합
샤브롤은 복잡다단한 입체적 여성 캐릭터를 통해 프랑스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아냈다. 그의 이야기는 종종 상류층의 위선과 도덕적 딜레마를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는 시대를 초월한 영화,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사회 비판이 담긴 서스펜스 드라마를 남겼다. 그의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등장인물, 특히 가장 깊은 욕망과 두려움에 맞서는 여성들이 펼치는 정신(에스프리)에 대한 여정이 아닐까. 클로드 샤브롤의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여성 서스펜스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롭고 생각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여전히 낡지 않으며, 시대를 초월하여 변치 않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영화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매료시키고, 놀라게 하고, 도전하게 하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대로 자꾸 뭔가를 이야기하거나 쓰고 싶게 만든다.
김나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