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는 처음부터 특이한 캐릭터였다. 뭐랄까, 정의 구현 위주로 흘러갈 법도 한 히어로무비에 긴장감을 주는 캐릭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다. 매력적인 히어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빌런도 필요하다. 그때의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는 분명히 있었다. 빌런이 빌런으로 존재할 만한 이유, 그렇게 행동하기 위한 개인적인 합당한 사유.

오딘의 아들로 똑같이 자라왔지만 적자와 양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공백감, 유치하다기엔 너무도 합리적인 자격지심은 로키의 존재에 어떤 당위성을 만들어 줬다. 물론 그의 선택은 히어로가 아닌 빌런의 선택이었고, 그래서 어벤져스는 로키를 생포하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토르는 하나뿐인 동생이기에 로키에게 애정을 느끼는 유일한 어벤져스였으며 그래서 로키와 토르는 계속해서,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는 다시금 한 팀이 되어 싸울 수 있었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시작되던 바로 그 순간까지 함께일 수 있었다.

<토르: 천둥의 신>부터 이어진 두 형제의 질긴 인연

하지만 지금 로키에겐 토르가 없고, 토르에겐 로키가 없다. 그들의 시간선은 갈라졌으며 로키는 오랫동안 로키 자신을 괴롭혀 왔던 자격지심이나 갈 곳 잃은 복수심 대신 히어로로서의 사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본인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디즈니 플러스의 시리즈 <로키>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멀티버스 사가, 그리고 '로키'

로키 시즌 2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확정되었다. 디즈니 플러스가 OTT로서의 출발을 하던 시점부터 플랫폼 전체에 있어서 로키는 주요한 프로그램이었고, 평가도 나쁘지 않았으며 로키의 여전한 인기에 힘입어 흥행도 좋은 편이었다. MCU의 본진이자 가장 큰 사업 수단인 MCU 무비가 스크린에서 고전하는 동안 TV 시리즈 로키는 나름 선전해 온 셈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통해 지난 인피니티 사가의 면면을 훑어내리는 동시에 초유의 사태였던 '핑거 스냅'을 블립으로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돌아올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던 로키의 모습이 다시 등장했을 때 많은 관객은 환호했다. 2018년 10월 말 시리즈가 확정되고, 2019년 코믹콘에서 정식 발표되면서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로키>를 발표하는 현장의 케빈 파이기

오웬 윌슨과 리처드 E. 그랜트 등 유수의 배우들이 캐스팅되었고, 캉의 등장이 확실시되면서 <로키> 시즌 1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높아졌다. TVA라는 새로운 조직이 소개되었으며, 유수의 MCU 작품에서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한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MCU의 방식으로 로키 시즌 1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관객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긴 했지만, 멀티버스의 개념을 가장 시간을 들여 설명한 드라마가 바로 <로키> 시즌 1이기는 했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기는 했지만(물론 원작 팬들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이야기) 여러 차원의 로키들이 등장해 온갖 난장판을 벌이는 광경은 꽤나 흥미진진하긴 했다. 다른 차원의 '로키'들과 협력 혹은 대치 속에서 결국 로키는 여자 버전 로키인 실비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시즌 1의 후반부에서 로키는 멀티버스 사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중 하나인 '정복자 캉'과 마주치게 되면서 결국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지난 시즌의 복잡미묘한 사정

시즌 1의 최종장에서 로키와 실비는 시간선의 끝에 도달해 '계속 존재하는 자(He Who Remains)', 즉 정복자 캉을 만난다. TVA의 최고관리자인 남자의 정체는 31세기의 과학자였고, 그의 변종 중 하나는 연구 끝에 멀티버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서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연구 결과를 공유하며 서로의 차원에 이바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모두가 선의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우주 정복을 꿈꾸는 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끝없는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살아남은 '계속 존재하는 자'는 시공간을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알리오스'를 찾아내 전쟁을 마무리하고, 신성한 시간선을 창조한 다음 TVA를 조직해 시간선의 변종들을 처치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유지하는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 존재하는 자'는 타임라인을 관리하고 TVA를 꾸려가는 일을 계속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나이 들고 지쳤다며(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로키와 실비에게 역할을 이어받아 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하지만 로키의 변종이자 여성 캐릭터인 '실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로키'가 고민에 빠진 사이 결국 그를 죽인다.

실비와 로키

'계속 존재하는 자'가 최후를 맞이하자 시간선은 혼돈에 빠지기 시작했고, 로키는 실비에 의해 TVA로 순간이동한다. 시간선은 폭주 상태로 수십 개의 가지가 뻗어나가기 시작하게 되고, 문제의 심각성은 TVA 전체로 확산된다. 이제 '타임키퍼' 캉의 진실이 TVA 전체로 퍼지면서 TVA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이제까지 타겟으로 삼아 왔던 '변종'중 하나임을 인정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게 됐다. 그걸 인정한 사람들과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은 대립하지만, 모든 멀티버스의 소멸을 막고 가장 주축이 되는 타임라인인 '신성한 시간선'을 지켜내지 않으면 멀티버스 전쟁은 다시 시작될 것임은 분명하다.


시간선을 지켜내야 할 사명, 로키의 두 번째 이야기

시즌 2는 2022년 6월 촬영을 시작해 같은 해 10월 촬영을 마무리지었고, 이후 D23 엑스포 등에서 예고편을 공개하면서 기대를 모았다. 이 와중 2023년에 공개될 신작이 <시크릿 인베이전>과 <로키> 시즌 2 단 두 편으로 결정되면서 공개일이 다소 미루어졌고, 이후 캉 역의 배우 조나단 메이저스가 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과거 소문까지 들추어져 배우 교체 루머가 있었으나 결국 원안대로 진행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지난 10월 6일 총 6부작으로 제작된 시즌 2가 드디어 1화를 공개했고, 11월 10일까지 매주 한 편씩 공개될 예정이다. 현재 2화까지 공개되었으며, TVA로 돌아온 로키가 시즌 1 결말에서 실비가 한 선택 때문에 초래된 시간선의 붕괴에 휘말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임슬립을 하게 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타임슬립이 아닌, 멀티버스 전체의 존폐다.

잊어버리곤 하지만 <로키>의 로키는 이때의 로키다.

시즌 1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면, 로키는 이른바 '뉴욕 사태'를 초래한 빌런의 시점이었다. 토르에게 온갖 자격지심을 갖고 있어 지구를 정복하려는-물론 스톤의 개입이 있었지만-상황에서 어벤져스에게 야욕을 저지당하고 잡혀가기 직전, 스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시간선의 진행을 탈출한 '변종'이었다. 하지만 TVA로 잡혀오면서 지난날의 자신과 정상적인 루트에서 자신이 겪어야 했을 수많은 사건들을 마주하고, 실비를 비롯한 다수의 인물과 조우하면서 로키는 다른 캐릭터로 또다른 히스토리를 만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된 수많은 TV 시리즈 중에서도 <로키>는 MCU의 오랜 팬들이 디즈니 플러스에 기대하는 요소들을 유일하게 갖고 있는 시리즈였을지도 모르겠다. 기존 MCU 인피니티 사가에서 등장한 캐릭터와, 새롭게 시작된 멀티버스 사가와의 연계점, 그 기이할 정도로 깊어진 간극과 거리감을 메울 수 있는 이야기. 로키는 명실상부 인피니티 사가가 낳은 가장 매력적인 빌런 캐릭터 중 하나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갈래로 갈려진 '성스러운 시간선'

출발점은 분명히 빌런이었지만, 이제 멀티버스 사가에서 로키는 모든 사건의 진실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자 '성스러운 시간선'을 지켜내야 할 사명감까지 가지게 됐다. 어디로 튈 지 모른다는 건 여전히 흥미로운 점이지만, 로키가 시즌 1을 통해 보여준 것과 시즌 2의 두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 것은 히어로로서의 면면이었기에 시즌 2의 최종장, 그리고 다시 MCU의 스크린에서 만나보게 될 미래의 모습에 기대감을 걸어볼 수 있겠다.


MCU의 미래, '멀티버스 사가'에서의 로키가 갖는 위상

토르가 되고 싶었던 로키, 이 또한 멀티버스스럽다

이제 대부분의 관객이 알고 있겠지만, 로키 역할의 배우 톰 히들스턴은 당초 토르 역할로 오디션에 참여했다고 한다. 감독은 애당초 톰 히들스턴을 토르로 기용할 생각은 없었고, 일부러 자격지심을 심어주기 위해(진짜 나쁜 사람이다) 토르 역할 오디션에 참여시키고 떨어뜨리는 과정을 계획했다고 하는데 이 전략은 먹혀들어 톰 히들스턴은 첫 만남에서 '웬 북유럽 신이 앉아 있는 바람에' 크리스 헴스워스가 토르 역으로 기용된 데 동의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실제로 질투심에 휩싸였다고 말하긴 했다.

지금이야 오랜 시간이 지났고 헴스워스가 이래저래 여러모로 좋은 사람이었기에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지만, 초반 로키라는 캐릭터가 토르에게 갖는 근원적인 질투심은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었고 '데미갓' 지위의 두 형제가 벌이는 싸움은 오랫동안 아스가르드의 히어로들이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매력 요소가 되었다.

토르와 로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진 셈이다. 이전에도 언급했다시피 토르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인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토르는 사상 최초로 로키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펼쳐야 했다. 로키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흥행에는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제인 포스터의 재등장이 기대감만큼 매력적인 구성으로 자리 잡지도 못했다. 결국 토르는 로키가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서사를 보여주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반해 로키는 좀 다른 국면에 처해 있다. 타임슬립 때문에 생명의 존폐를 걸고 위험한 결정에 내몰려야 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실비를 설득하는 일이라든지, 시간선을 지켜내는 일이라든지- 로키는 멀티버스 사가라는 새로운 페이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전)로키의 마지막

로키는... 어쩌면 다시 토르를 조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전에 마지막으로 토르와 함께했던 순간, 타노스 앞에서 토르에게 형제애를 발휘하며 희생당했던 바로 그 시점과 비교했을 때 두 캐릭터의 위상은 사뭇 다를 것 같아 보인다. 시즌 2가 무사히 멀티버스 사가에서 몇 안 되는 '재미있는 수작'으로 남는 게 우선이겠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지점인 건 사실이다. 로키 없는 토르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토르 없는 로키는 이 페이즈에서 어떤 유의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지가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