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그렇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어설펐던 시절은 엄연히 존재하건만 대개의 인간은 그 시절 따위 까맣게 망각한 채 어설픈 누군가를 “싹수가 노랗다”며 비웃거나 “재능이 보이질 않는다”며 손쉽게 비판한다. 글쎄. 예술에 관한 한 우리는 천재 신화에 과도하게 함몰되는 경향이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따라서 그 처음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그 처음을 통과하는 누군가의 가능성은 비로소 날갯짓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블루 자이언트>는 이런 작품이었다.
줄거리는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므로 메인 캐릭터 3명을 간략하게 설명해본다. 주인공 다이는 가히 색소폰 강박증 환자다. 그는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연습량을 통해 도도한 성격의 피아니스트 사와베마저 눈물짓게 한다. 사와베는 작곡과 피아노에 두루 능통한, 어느 정도는 완성된 느낌을 주는 연주자다. 성격적으로 이 둘은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밴드 내에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타마다가 있다. 타마다에 대해서는 설명할 게 별로 없다. 축구를 그만두고 이제 막 드럼을 시작한, 완전 초짜인 까닭이다.
<블루 자이언트> 원작 만화 중 1부를 처음 봤을 때 계속 눈길이 머무른 캐릭터는 주인공 다이가 아니었다. 타마다였다. 다른 두 (친구이자) 멤버의 수준에 어떻게든 맞추려고 악전고투하던 어느 날, 관객들 중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공연이 끝난 뒤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그에게 와서 말한다.
“자네… 좋아지고 있어. 난 자네의 드럼을, 성장하는 자네의 드럼을 들으러 온다네. 자네의 드럼은, 좋아지고 있어.”
으아. 타마다도 울고 나도 울었다. 만화로 봤을 때도 울었는데 애니메이션으로 보면서도 울었다. 둘 사이에 차이는 있다. 만화의 경우 재즈 클럽 내부에서 이 장면이 그려졌지만 애니메이션은 클럽 밖에서 펼쳐진다. 정서는 유사하다. 다른 두 멤버는 라이브가 끝나면 소수지만 열광적인 팬으로부터 사인을 요청받는다. 타마다는 아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덩그러니 혼자 서 있다. 그런 그에게 할아버지가 스윽 다가와서는 저렇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과연,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신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블루 자이언트>는 “음악이 들리는 것 같은 만화”라는 찬사를 획득했다. 그러나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는 수식과 진짜 들리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먼저 다음 조건을 상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주인공 3명이 결성한 자스(Jass)가 이제 막 궤도에 오른 밴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를테면 ‘매력적으로 삐걱거리는’ 재즈다. 피아노 연주만큼은 원숙한 터치를 들려주지만 전체적으로는 섬세한 질감보다는 듣는 이를 압도하기 위한 양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보면 된다.
하긴 그렇다. 너무 뜨겁게 타오른 나머지 붉은빛을 넘어 푸르게 빛나는 별을 뜻하는 ‘블루 자이언트’를 상징하려면 이런 타입의 연주여야만 할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아직 미완성이지만 재능이 눈앞에서 빛나는 것 같은 연주라고 할까. 즉, 주인공 다이는 어떤 과잉의 패턴을 만든 뒤에 그것을 장점으로 전환해 도리어 그 과잉에 주목하게 하는 유의 연주자다.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주도한 인물은 그래미 수상에 빛나는 세계적인 연주자 우에하라 히로미(Hiromi Uehara)다. 예를 들어 그녀의 대표곡인 ‘Spark’와 이 애니메이션의 수록곡인 ‘N.E.W.’를 비교하면 이게 같은 작곡가가 쓴 게 맞나 싶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N.E.W.’의 시작부터 터져 나오는 색소폰 솔로는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나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을 연상케 하는 근육질 브라스를 너무 프로답게 들리지 않는 선에서 절묘하게 포착한다.
한데 <블루 자이언트>는 위의 뜻도 있지만 작가 이시즈카 신이치(Shinichi Ishizuka)가 재즈 색소폰의 왕이라 할 존 콜트레인의 두 걸작 <Blue Train>(1958)과 <Giant Steps>(1960)를 합쳐서 만든 조어이기도 하다. 이시즈카 신이치는 전작 <산>에서도 비슷한 유의 이야기를 보여줬던 바 있다. <산>의 주인공은 산에 완전히 미친, 그러면서도 한없이 낙천적인 사람이다. <블루 자이언트>에서는 ‘산’이라는 소재를 ‘색소폰’과 ‘재즈’로 바꾼 셈이다.
주제가라고 부를 수 있을 곡은 자스(Jass)의 첫 무대와 대미를 장식하는 곡 ‘First Note’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히 묘사하긴 어렵지만 이 마지막 무대에서의 연출력은 압도적이고, 웅장하기까지 하다. 또한 역동적이고, 짜릿한 스릴마저 전달하는 색채의 소용돌이가 펼쳐지면서 음악과 함께 관객에게 장관을 선사한다. 뭐랄까. 이 최후의 신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그들의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사와베의 지적 섬세함과 다이의 들끓는 열망, 타마다의 성장 욕구가 폭발하면서 자스(Jass)는 꿈에 그리던 ‘소 블루(So Blue)’에서의 라이브를 성공적으로 끝마친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작품 속 ‘소 블루’의 모델은 당연히 실재하는 재즈 공연장 ‘블루 노트 도쿄’다.
페스티벌 무대에 같이 서게 된 한 선배 뮤지션이 원작에서는 사와바에게, 애니메이션에서는 다이에게 묻는다. “어떤 재즈를 하나? 모드? 쿨? 밥? 프리?” 대답은 이렇다. “저희는 그냥 재즈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주인공 밴드의 이름을 지극히 평범한 자스(Jass)로 결정한 이유일 것이다. 원래 재즈는 자스라고 불렸다. 따라서 자스는 장르 따위 구분 없이 재즈를, 그것도 ‘창작곡’으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상이 된다.
총 10권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다 보니 원작에서 생략된 부분이 여럿 있다. 물론 가지치기를 잘하긴 했지만 딱 하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 바로 ‘소 블루’ 매니저가 사와베에게 혹독한 비판을 한 뒤 후회하는 장면’들’이다. 원작에서 그는 이미 ‘소 블루’에 출연하는 이른바 거장 뮤지션들에게 지친 상태다. 답보 혹은 후퇴하고 있는 그들의 음악에 마지못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자신에게 환멸마저 느끼고 있다. 원작 만화에는 매 권마다 보너스 트랙이라는 타이틀로 (영화에서도 일종의 막간처럼 등장하는) 인터뷰 신이 그려져 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소 블루’의 매니저가 말한다.
“그건 사와베군의 허물이 찌익 찌익 벗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새로운 그 친구를 본 것 같은 연주였죠…(중략)… 저는 그래서 지금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 재즈가 좋다고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갓 데뷔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건 냉엄한 비판보다는 따스한 격려일 것이라고. 3명의 멤버들 중 사와베만큼은 아니다. 그는 이미 준프로의 경지에 오른 연주자니까. 어쨌든, 비단 음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막 첫 발을 뗀 그 사람이 지닌 가능성의 날개를 더욱 크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누군가의 온기 있는 한마디일 터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PS. 원작과 애니메이션에서는 블루 자이언트가 마치 재즈 쪽에서 통용되는 표현처럼 묘사된다. 그렇지는 않다. 드라마틱한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 작가가 기존 뜻을 활용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거라고 보면 된다.
배순탁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