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으로서 2010년대 중반 한국을 살아가는 20대 여성의 이야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절찬 상영 중이다. 드라마 <나쁜형사> <D.P.>, 영화 <방법: 재차의> <흐르다> 등으로 얼굴을 알리고 있는 배우 이설을 만나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주인공 박한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말투나 중국어 등 탈북민 캐릭터를 위해서 준비해야 될 게 많았을 텐데요. 한영은 이미 한국에서 지낸 지가 꽤 됐기 때문에 유창하지도 어설프지도 않은 미묘한 상태를 조절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아요.
탈북민과 화교 분들께 자문을 많이 구했어요. 그런데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보다는 문화권에 많이 노출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각 나라의 고유적인 것들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어요. 저도 이제 경상도 사람이다보니 경상도에서 같이 서울로 온 친구들이 초반에 서울 말씨를 쓰려고 무던 애를 쓰고 분명 서울 말을 쓰고 있다고 하지만 “혹시 어디서 오셨어요?” 라고 질문받는 걸 떠올렸어요. 북한 말은 잊고 싶어서, 한국말은 잘하고 싶어서, 중국 말은 잘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긴장을 많이 하고 한 템포씩 떠 있는 게 많이 보일 거예요.
시간 순서대로 찍지는 않았죠? 시간이 지날수록 한영의 처지가 점점 코너에 몰리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감독님의 디렉션은 어땠나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한국말의 농도가 달랐으면, 한해한해 갈수록 한국말에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주문해주셔서 그걸 정말 많이 신경 썼어요. 나름의 차이점을 두기는 했는데 편집하면서 앞뒤가 섞이고 시간의 순서가 달라지면서 그게 많이 드러나진 않은 것 같아요. 편집이라는 것이 이렇게 다르게 만들 수 있구나, 참 신기했어요.
지난 3월 개봉한 <흐르다>의 진영과 비슷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한영 역시 잔잔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인스타그램이나 <썬더버드> 개봉 당시 라디오에 출연했던 영상을 보면 쾌활하고 표현도 잘 하는 타입이시더라고요.
저는 사실 <흐르다>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인물들과 반대 성격이에요. 표현 잘하고 말도 잘하는 편이에요. 맞아요, 보이는 라디오에서 보신 게 저와 훨씬 가깝죠. 그래서 저도 신기해요. 저한테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시나봐요. 일정 부분 저에게 해당하는 점들도 있어서 너무 멀게 느껴지진 않지만, 이제는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들을 해도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말이 없고 꾸역꾸역 참는 걸 하다 보면 실제로도 그렇게 되는 거 같아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걸 하는 것도 내 삶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요.
역할을 맡으면서 실생활에도 영향을 받는 편인가요?
심하게 받진 않는데 아예 안 받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이런 걸 찍으면 어쩔 수 없이 로케이션에 가고 분위기가 조성되다보니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작품 선택할 때 무엇을 주안점을 두세요?
이야기를 제일 봐요. <믿을 수 있는 사람>도 그렇고 <흐르다>도 그렇고 너무 시나리오가 재미가 있어서. 두 감독님 모두 문학적으로 쓰시더라고요. 제가 소설 읽는 것도 좋아하다보니까 더 반해서 대번에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땅에 붙어 있는 이야기같이 느껴지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어요. 몇 년에 걸쳐서 한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 우리의 시대상도 담겨 있는 게 매력적이라고 느껴서 하게 됐죠.
영화 속에서 한영이 만나는 사람들이 꽤 많다보니, 그만큼 다른 배우분들과 보냈던 시간도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아요.
사이가 너무 좋고 자주 만나서 모두와의 기억이 좋은데, 아무래도 (정미 역의) 경화 언니랑 절친으로 나오고 서로에게 믿어 의심치 않는 관계라, 언니랑 친해지기 위해서 평양냉면도 먹으러 가고 남산도 가서 야경도 같이 보고 집에 초대해서 같이 영화도 보고 대화도 많이 나눴던 추억이 가장 많은 사람이에요. 희한하게 언니가 저만 보면 울었어요. 저만 보면 눈물이 난대요. 실제로 사랑스러운 사람이기도 하고, 똑똑한 사람이기도 해서… 정말 신기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이설 씨 개인은 영화 속 한영을 믿을 수 있나요?
내가 지금 영화에서 하는 걸 봤던 것처럼 내밀하게 볼 수 있었다면 믿을 것 같고, 표면적으로만 대하게 된다면 사실 저도 100% 믿을 수 있다고는 못할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지 않을까요. 오늘 기자님 처음 만났는데 믿을 수 있을까요? (웃음) 시간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알다 보면 참 멋있는 사람이구나, 믿을 수 있겠죠.
한영을 오랫동안 지켜봤다면 어떤 면에 믿음이 갈까요?
얘는 일을 하나 시키면 100%를 넘어 200%까지 하는 애다. 연약한 사람이 아니어서 친구로 두면 참 좋겠다. 주로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한영에게 감정적으로 공감이 갔던 모습은 무엇인가요?
중국인 관광객들을 처음으로 대하던 때 그 긴장이나 잔뜩 얼어서 들떠 있는 그런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요. 저도 배우 일을 처음 시작한 것이니 여전히 첫 촬영 날 첫 미팅 날 그런 모습을 가졌기 때문에.
클럽에서 춤추는 신이 있죠. 그때 춤이 나중에 정미랑 ‘다시 만납시다’ 부르면서 하던 동작이랑 비슷하던데요.
한번 짜보라고 하셔서 저 나름대로 생각을 열심히 해서 간 안무예요. 영화관도 평소 안 가는 애가 클럽을 가봤을 리 전무하지 않을까, 딱히 음주가무를 즐길 것 같지도 않고. 보통 북한 무용단 분들 보면 그런 춤을 많이 추더라고요. 그걸 보고 자랐으면 이런 동작이 익숙하지 않을까 해서 그걸 열심히 췄죠. 처음엔 사람들이 무슨 클럽에서 저런 걸 춰? 하다가 남산에서도 추는 걸 보고 컨셉이구나 많이 알아봐주셨어요.
현장에서 이설 배우님은 어떤 배우인가요?
현장의 저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열심히 하려고 해서 사람들도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질문이 많은 편이긴 한 거 같아요. 제 스스로도 납득이 가고 이해가 가야지 움직이기 편해서. 부족한 정보 같은 것들을 최소화하려고 많이 묻고 답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질문이 많은 편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서 말씀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의 디렉션 외에도 직접 의견을 제시해서 반영된 설정도 있을까요?
늘 그런 건 있었어요. 아까 말했던 춤도 그렇고. 의상이나 메이크업 같은 경우는 제가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썼었고. 원래는 엄청 소박한 것들을 준비해 주셨는데, 저는 한영이가 한국에 왔으니 진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 것처럼 보여주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예쁜 옷들 많은 동묘시장 같은 게 가서 나름의 스타일을 찾았을 것 같다고 혼자 상상했고, 실제 제 옷도 많이 입었어요. 요즘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해서 신경을 많이 썼어요. 메이크업 같은 경우에도 원래 화장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화장 안 하던 애가 한국에 와서 화장을 따라했을 때 어떤 화장이 나올까 생각하고, 제가 중학교 때 화장 따라하던 것처럼 빨간 틴트 바르고 싶다 말씀드리고 그랬죠. 여러모로 어설픈 한영의 모습을 많이 녹여내려고 했어요. 탈북민이라는 이미지에 전형화되지 않기를 원해서 제 옷도 준비하고 다행히 승낙을 해주셨죠. 실제 제가 만난 탈북민 분들은 너무 예쁘시고 스스로를 잘 꾸밀 줄 아셨어요. 탈북민은 수수하게 입고 다닐 거라는 건 굉장한 편견이라고 생각해서 그걸 좀 비틀고 싶었어요.
나름 로맨스라 부를 만한 관계도 있어요. 임 형사와의 마지막 신에서 한영의 감정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랑보다는 인류애에 가깝지 않을까 해석했어요. 지금 한영의 옆에는 동생도 없고 엄마도 없고 마지막 남았던 친구 정미마저 떠나고, 유일하게 관계를 갖고 있던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임 형사밖에 없는데, 오로지 혼자 남았을 때 홀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이 사람한테 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저를 믿을 수 있느나, 누구 하나라도 믿어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노력해볼 생각인데, 그런 질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서 거절당하니까 그럼 여기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시작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나아갈 수 있는 촉매제가 되어준 사람인 셈이죠.
마지막 장면의 클로즈업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찍힌 모습인가요?
원래 테이크를 많이 안 가시는데 그 장면은 유독 많이 찍었어요. 웃는 거, 살짝 눈물이 고인 거, 무표정한 거, 다양한 표정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알 수 없는 표정을 쓰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테이크마다 계속 다르게만 하고 과연 어떤 걸 쓰셨을까 궁금했는데 가장 알쏭달쏭한 걸 쓰셔서 마음에 들었어요. 너무 행복하게 떠나도, 너무 아쉬워해도 좀 안 맞을 것 같아요. 그게 가장 오묘한 표정이었어요.
봄에는 첫 연극 <오셀로>를 작업하셨죠. 연극 무대의 경험이 배우로서 무엇을 남겼을까요?
하면 된다. (웃음) 진짜 하면 되는구나, 정말 그걸 많이 느꼈어요. 연습을 엄청 많이 하니까. 물론 처음이어서 부족한 면이 훨씬 더 많았겠지만서도, 일단 저는 그 무대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한테 칭찬해 주고 싶고. 그리고 같이 함께했던 동료분들이 정말 멋있는 사람들이어서 되게 많이 배웠어요. 인품도 많이 배우고, 노력하는 모습들에서 제게 다 귀감이 돼주셨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요. 연극을 하기 전과 후에 제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정말 힘들었는데 하기를 너무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작업이었어요.
내가 이걸 잘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우선 하고 보는 편인가요?
그런데 우리 직업이라는 게 닥치면 다 해야 돼서 (웃음) 하면서 한 가지 생각밖에 안 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한테 부끄럽지만 말자. 노력을 덜 하고 나면 후회가 많이 되는데, 내가 못 할지언정 최선은 다하자 그런 주의예요. 일단 열심히 해보자.
아까 굳이 로맨스 이야기를 꺼낸 게, 이설 씨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을 떠올려 보면 연애하는 사람 혹은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맞아요.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 <남과 여>라는 드라마를 하게 됐어요. 물론 이별을 하는 과정을 그린 거지만. 저한테는 되게 신선했어요. 어쨌든 본연의 제가 나올 수밖에 없는 장르다 보니까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민망해서 숨고 싶었는데 하다보니까 재밌더라고요. 그리고 배우분들도, 감독님도 엄청 많이 사랑해주셨어요. 처음에는 꿍꿍이가 있나 가짜 아니야 싶을 정도로. 아무래도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다 보니까 서로를 사랑해주는 분위기에서 제 스스로가 사랑스러워진 거 같아요. 그래서 장르가 중요하구나 느꼈고, 앞으로도 이런 장르를 해보고 싶어요.
앞으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틈틈이 직접 쓰기도 한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이설 씨가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진짜 작가님들이나 감독님들이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디스토피아에 관심이 많아서, 인류애를 잃어가다가 다시 인류애를 찾게 되는 인물들이 많은 것 같아요, 요즘 제 상상에는.
영화나 책도 열심히 챙겨보시죠. 근래 인상적이었던 것 소개해주세요.
엔니오 모리코네 다큐멘터리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봤는데 그렇게 좋았어요. 나도 누가 뭐래도 나를 믿고 가야겠다, 이게 내 길이 맞을 수 있겠다… 영화 보니까 반대가 심했더라고요. 무시도 당하고, 따돌림 아닌 따돌림도 당하고. 그런 걸 보고 나니까 어차피 나는 고유한 사람이니까 그냥 내 것 믿고 가야겠다, 하는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줬어요. 많은 사람들이 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주변에 홍보도 많이 했어요. 소설은 <홍학의 자리>라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었는데, 너무나 경악스러운 반전이어서 저 스스로한테 실망했어요. 나 진짜 편견이 있는 사람이구나… 결말 절대 보지 말고 아무것도 미리 알지 말고 첫 장부터 차례차례 봐야 하는 작품이에요.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