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생, 1982년 데뷔, 17편의 영화, 현재 76세. 그러나 여전히 촬영 후에는 버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노장 현역 감독.
함께 작업한 진경 배우의 말마따나 ‘탈권위의 대표격’인 정지영 감독이 <소년들>과 함께 돌아왔다. 정지영 감독은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1985>(2012), <블랙머니>(2019) 등으로 ‘한국 사회파 영화의 거장’이라고 불리며 줄곧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파고들어왔다. 올해는 정지영 감독이 데뷔 4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데, 2020년 촬영을 마친 <소년들>은 코로나19 탓에 올해 말이 돼서야 개봉을 하게 되었다.
<소년들>은 11월 1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개봉에 앞서, 지난 23일 진행된 <소년들>의 언론배급시사회와 기자간담회에는 정지영 감독과 배우 설경구, 유준상, 진경, 허성태, 염혜란이 참석해 영화를 보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이날 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소년들>을 보기 전 알아두면 좋을 포인트를 정리한다.
‘한국의 켄 로치’ 정지영 감독의 ‘실화 시리즈’
<소년들>은 <부러진 화살>, <블랙 머니>와 함께 정지영 감독의 ‘실화 3부작’으로 꼽힌다. <소년들>이 모티브로 삼은 이야기는 이른바 ‘삼례나라슈퍼 사건’으로, 1999년 사건 당시의 상황, 2000년 재수사 과정, 그리고 2016년 재심 과정을 허구의 수사반장 ‘황준철’(설경구)의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나라슈퍼'는 영화 속에서 '우리슈퍼'로 등장한다.
‘삼례나라슈퍼 사건’은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한 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해 주인 할머니가 사망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건 9일 만에 동네 소년 3인이 사건의 용의자로 검거되고 범행 일체에 대한 자백과 함께 수사는 일사천리로 종결된다. 한편, 사건에 관련된 모든 증거와 자백은 조작된 것이었고, 소년들은 살인자로 낙인찍힌 채 억울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소년들>은 사건 이면에 자리한 부조리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정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일맥상통한다. 죄 없는 약자를 가해자로 낙인을 찍은 권력자들, 그리고 끝까지 조직의 부정을 시인하지 않는 거대 집단. 정지영 감독은 “영화는 우리가 어느 지점에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게끔 만드는 것”이라며, 영화는 자신의 사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전했다. 또 정 감독은 “내가 한 작품들을 보면 (실제로는) 실패한 사건이더라도, 영화의 말미에는 희망을 담아내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절망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구나, 싶다”라며 영화가 자신의 인생과도 닮아 있음을 언급했다.
무거운 실화 소재의 부담을 덜어줄 영화적 재미
<그것이 알고싶다> 등으로 익히 알려진 실화를 영화로 한 번 더 관람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정지영 감독과 출연 배우들은 그 답을 ‘영화적 재미’에서 찾았다.
정지영 감독은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영국의 영화감독 켄 로치에 비견되곤 한다. 켄 로치는 영국 노동자들의 삶, 복지 사각지대 등을 다루며 사회 시스템에 문제 제기를 하는 사실주의 감독이다. 정 감독은 “나는 켄 로치와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켄 로치는 사실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한다면, 나는 실화에 극적 장치를 넣은 영화를 만든다”라며, 실화라는 굳건한 뼈대를 바탕으로 “극적 장치를 도입하고, 잔재미를 넣는다”라고 밝혔다. 정 감독은 이전부터 자신을 ‘대중영화 감독’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많은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내는 것, 재미있는 영화를 통해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그의 영화 세계의 골자다.
덕분에, <소년들>은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배우 허성태와 염혜란은 묵직한 실화 소재에 신선한 활기를 넣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허성태는 그간의 악독한 역할을 벗어나 작품의 웃음을 책임지는 ‘박정규’ 역으로, 유일하게 황반장을 믿고 따르는 후배 형사를 연기하며 영화의 톤을 조절한다. <더 글로리>, <마스크걸> 등으로 ‘흥행 요정’이 된 염혜란은 재수사에 나선 황반장을 지지해 주는 아내 ‘김경미’ 역을 맡았는데, “<소년들>도 흥행했으면 좋겠다”라며 ‘흥행 요정’으로서의 소망을 전했다.
가상의 인물 ‘황준철 반장’과 교차 구성의 리듬감
<소년들>이 허구의 ‘황준철 반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도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다. 영화 속 황준철이라는 캐릭터는 (영화 <재심>으로도 영화화된)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의 형사반장에게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된 인물이다.
또한 <소년들>은 일반적인 실화 소재 영화와는 다르게 연대기순이 아닌, 1999년과 2016년의 모습을 교차해서 구성하는 방식을 택해 리듬감을 더했다. 이런 구성 방식을 택한 이유로 정 감독은 “처음에는 연대기 순으로 쓴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마치 영화가 전, 후로 나눠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하면) 관객들이 전편, 후편으로 인식해 다른 호흡으로 영화를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를 섞어봤다”라고 전했다.
1999년의 과거와 2016년 현재 판이한 황 반장의 모습을 보는 것 역시 하나의 관람 포인트다. 황준철은 1999년에는 ‘미친개’라고 불리며 진범을 검거하기 위해 열심인 혈기왕성 형사였다면, 2016년에는 은퇴를 앞둔 피폐한 형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기 때문에 외형적인 변화에 욕심이 있었다"라고 밝힌 설경구는 혹독한 체중 감량을 통해 세월의 간극을 극명하게 표현해냈다. 정지영 감독은 설경구를 “16년의 세월을 어떻게 표현할지 끝없이 고민하는, 디테일에 상당히 강한 훌륭한 배우”라고 극찬을 전했다.
한편, <소년들>은 표면적으로 설경구의 ‘황준철 반장’이 이끌어가는 수사극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야기의 진주인공은 ‘소년들’과 ‘진범들’이기도 하다. ‘소년들’과 ‘진범들’ 역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중함이 돋보이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소년들’ 역은 <완득이><밀정><독전><거미집> 등에서 활약한 배우 김동영, <거래> <D.P. 시즌 2>의 유수빈이 맡아 묵직한 울림을 전했고, ‘진범들’로는 배우 배유람과 서인국이 출연해 남다른 캐릭터 소화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