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가 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이들을 위해 쓴다. ‘씨네플레이’는 10년 전, 20년 전 이맘때 개봉했던 영화를 소개하려 한다. 재개봉하면 당장이라도 극장으로 달려가서 보고 싶은 그런 영화들을 선정했다. 이름하여 ‘씨네플레이 재개봉관’이다.

기담
감독 정식, 정범식 출연 진구, 이동규, 김태우, 김보경 개봉 2007년 8월 상영시간 98분 등급 15세 관람가

기담

감독 정식, 정범식

출연 진구, 이동규, 김태우, 김보경

개봉 2007 대한민국

상세보기

<기담>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수술 장면.

여름과 공포영화는 늘 함께였다. 10년 전 그때도 그랬다. 2007년 여름 개봉한 정식, 정범식 감독(두 사람은 사촌지간으로 크레딧에서는 ‘정가형제’라고 나온다)의 데뷔작 <기담>은 조금 덜 알려진 수작이다. 지난 20여 년의 한국 공포영화 계보에서 빠지면 섭섭한 작품이기도 하다. 공포영화 마니아 사이에서는 <여고괴담>(1998),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 <장화홍련>(2003), <알 포인트>(2004), <불신지옥>(2009) 등과 함께 언급된다. <기담>은 어떻게 ‘숨겨진 수작’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을까.

담백한 공포

<기담>의 공포는 자극적이지 않다. 맵고 짜고 달지 않다. 딱 필요한 만큼의 양념만 사용했다. <기담>이 주로 사용한 양념은 미장센이다. 카메라의 움직임, 조명, 미술 등이 미장센을 만든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안생병원이라는 <기담>의 공간이 미장센으로 만든 공포를 극대화시킨다. 거기에는 긴 복도, 시체안치실, 수술실 등이 있다.

<기담> 속 안생병원 복도.

<기담>은 안생병원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기이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첫번째 이야기는 주로 시체안치실에서 벌어진다. 의대생 정남(진구)은 병원장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다. 시체 안치실에서 근무하던 중 물에 빠져 자살한 여고생 시체를 받게 된다. 정남은 그 시체에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 에피소드에서 <기담>이 공포를 쌓아가는 방식은 이렇다. 정남이 병원 복도를 걷는다. 묘령의 스님은 정남에게 목례를 한다. 이내 텅빈 복도를 보여준다. 시체저장고의 문이 서서히 클로즈업된다. 책상 위의 펜은 또르르 굴러서 떨어진다. 점점 불길한 기운은 고조된다. 시체저장고에서는 물이 흘러나온다. 결국 정남은 시체저장고의 문을 연다. 그곳에는 컴컴한 어둠이 있다.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안생병원 세트.

이 과정에 관객을 뜬끔없이 깜짝 놀래키는 장치는 없다. 점점 고조되는 긴장감이 있다. 공간을 활용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그걸 만들어낸다. 2007년 당시 나온 <씨네21>의 기사에 따르면 <기담>의 두 감독은 이렇게 얘기했다. “요즘 영화들은 드라마의 정보와 정서가 전달될 수 있을 정도면 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전영화의 형식미와 양식미를 지키고 싶었다.” 이들의 노력을 칭찬한 사람 가운데는 의외의 인물도 있다. 주연배우 진구의 아버지인 진영호 촬영감독이다. 그는 “꼼꼼한 미장센을 구사하는 두 감독이 누아르를 찍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기담>에 출연한 진구.

고전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미장센을 통해 쌓아올린 공포의 끝에는 공포의 실체, 즉 귀신이 등장하는 ‘한방’이 있다. 공포영화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장면이다.

처음 만나는 공포 

교통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아사코(고주연)와 의사 이수인(이동규)의 이야기를 담은 두번째 에피소드는 두고두고 회자될 장면을 담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귀신은 매우 기이한 모습이다.

아사코를 연기한 고주연(왼쪽)과 이수인을 연기한 이동규.

가족이 모두 죽은 교통사고에서 작은 외상 하나 입지 않고 병원에 실려온 아사코는 악몽에 시달린다. 먼저 아사코 앞에 등장한 귀신은 엄마다. 아사코의 곁에 머무는 엄마 귀신이 쏟아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음성은 전에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공포다. 놀라운 점은 이 소름 끼치는 음성이 아사코 엄마를 연기한 배우 박지아가 홀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아사코 엄마를 연기한 배우 박지아

<기담>의 엄마 귀신은 <여고괴담> 복도 신의 점프컷만큼 유명하지는 못해도 결코 쉽게 잊지 못할 장면이다. 무릇 공포영화라면 변죽만 울릴 게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한방’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기담>의 공포는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전과 서스펜스의 공포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기담>은 관객과 일종의 심리전을 벌인다. 일본군 살인사건에 관계된 김동원(김태우), 김인영(김보경) 부부 의사의 사연에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누가 귀신인가, 누가 범인인가. 관객은 계속 반문하게 된다. 꼬고 또 꼬아서 애써 준비한 반전이 밝혀졌을 때는 다소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일본군 살인사건의 부검을 하는 의사 김인영을 연기한 배우 김보경(가운데).

그럼에도 이 심리게임이 불쾌하거나 심심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감독이 관객에게 자신의 패를 까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아내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는 김동원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그것이다. ‘그림자가 없다’는 정보는 끊임없이 관객의 심리에 작용한다. 스탠드의 전구를 부부가 좋아하는 스노우볼에 비춰 그림자 놀이를 하는 장면에서 “잠깐만 여보, 이쪽으로 와봐” 하면서 김동원이 스탠드 불빛을 좌우로 흔드는 장면은 ‘아내의 그림자’라는 정보를 관객이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섬뜩한 느낌이 더할 수 있었다.

액자구조의 공포

<기담>은 ‘3일 전’, ‘2일 전’, ‘1일 전’ 세 가지 시간대에서 벌어진 세 가지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세 에피소드는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를 살짝 보여주는 식이다.

<기담>의 세 에피소드의 주요 인물들.

더 크게 보면 액자구조를 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 나이 든 정남(전무송)이 등장한다. 그는 의대 교수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할 김동원, 김인영 부부의 수술 장면 기록영상을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이후 자신이 사무실에서 안생병원 시절 앨범을 보며 영화는 과거로 들어간다. 세번째 에피소드까지 끝을 낸 <기담>은 잊지 않고 다시 늙은 정남에게 돌아온다. 알 듯 모를 듯했던 정남의 사연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기담>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꽤나 인상적이다. 프롤로그에서 뿌려놓은 밑밥을 모두 회수했기 때문이다.


‘씨네플레이 재개봉관’ 첫 순서로 ‘숨겨진 수작’ <기담>을 소개했다. 10년 전 <기담>은 심형래 감독의 <디워>와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 사이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기담>은 ‘숨겨졌다’, 입소문을 통해 <기담>이 꽤 잘 만든 영화라는 걸 안 관객들은 가만 있지 않았다. 교차상영을 하던 <기담>의 상영관을 늘이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기도 했다. 재밌는 건 올해 여름도 10년 전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애국심과 관계된 영화와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기담>처럼 숨겨진 영화가 없는지 눈 크게 뜨고 찾아보시길 바란다.
덧, <기담> 엔딩 크레딧에서 배우 엄태구, 감독 엄태화 형제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동생 엄태구는 일본군1이라는 단역으로, 형 엄태화는 연출부에 이름을 올렸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재밌으셨나요? 아래 배너를 눌러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영화 이야기, 시사회 이벤트 등이 가득한 손바닥 영화 매거진을 구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