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부터 40대까지 한자리에 모인 회식자리,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했던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상한 곳에서 공감대를 발견했다. 나를 포함해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1분 남짓의 숏폼 동영상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 완전 쇼츠 중독이잖아.”
“저도요. 쇼츠 보다가 지루하면 이제 릴스로 넘어가고.”
“집에 도착하면 이렇게 누워서 멍하니 핸드폰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계속 쇼츠를 넘기는 거지.”
“이렇게 서서히 바보가 되어 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다들 알고는 있다. 기승전결 없이 말초적인 쾌감만 남긴 짧은 영상을 연달아 보는 건 도파민 중독의 한 증상이고, 이런 것들에 너무 익숙해지면 이제 긴 이야기는 못 본다는 것을. 그래서 다들 멀쩡한 영상을 2배속을 해놓고 봐야 비로소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라며 만족하고, 인기 있는 드라마를 따라잡는 일도 ‘몰아보기’ 대신 유튜브에 올라온 “드라마 〈OOO〉 1시즌 1시간 요약본”을 찾아보는 일로 대체하는 거겠지. 하지만 이런 폐해를 알면서도 숏폼 동영상을 끊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애플리케이션의 자동 추천 알고리듬 때문인가 싶어 재생목록을 지우고 차근차근 알고리듬을 다시 쌓아봐도, 어느새 자동 추천 영상 목록에 한가득 숏폼 동영상이 뜬다. 와, 이렇게 숏폼 동영상에 절어있으면서 나 〈플라워 킬링 문〉은 대체 어떻게 본 거지?

사람들이 향유하는 영상의 길이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서사 기반의 영상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근심은 커진다. 세상엔 분명 2시간 이상의 상영시간을 필요로 하는 서사도 있는 법인데, 다들 이렇게 짧은 호흡에 익숙해지면 영화를 못 따라오게 되는 게 아닐까? 영상 예술을 보고 글을 쓰는 내 입장에서도 그런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1분 남짓한 영상을 분석하는 글을 써봐야 뭘 얼마나 쓸 수 있을 것이며, 글이 지니는 의미는 뭐 얼마나 되겠느냔 말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전 세계가 마찬가지여서,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은 “이러다가 몇 년 뒤에는 스냅챗 오리지널 시리즈가 에미상을 받겠다” 같은 농담을 하는가 하면, 일본에서는 〈썸머 필름을 타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맞다. 포스터만 보면 그냥 청량한 일본 청춘영화로 보이는 〈썸머 필름을 타고!〉는, 미래가 불확실한 영화에 대한 절절한 러브 레터다.

시대극 마니아 ‘맨발’(이토 마리카)은 심기가 불편하다. 자신이 쓴 사무라이 영화 〈무사의 청춘〉 시나리오는 영화 동아리의 차기작 공모에서 탈락했다. 다들 영화 동아리의 공주님 대접을 받는 카린(코다 마히루)이 쓴 로맨스 영화 기획안에만 정신이 팔려가지고, ‘맨발’이 쓴 〈무사의 청춘〉은 보기 좋게 탈락한 것이다. 동아리 없이 남는 시간에 우리끼리 영화를 찍어보자는 ‘킥보드’(카와이 유미)와 ‘블루 하와이’(이노리 키라라)의 제안에도 ‘맨발’은 시큰둥하다. 자신이 찾던 주인공의 얼굴, 연약하면서도 아름답고, 변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슬픈 듯한 눈빛을 지닌 사내가 없으니까. 주인공을 시킬 사람도 없는데 뭐 하러 열을 올려서 영화를 만든담. 그러나 우연히 들른 극장에서 사무라이 영화를 보러 온 린타로(카네코 다이치)와 마주친 순간, ‘맨발’은 린타로를 주연으로 〈무사의 청춘〉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자신이 찾던 주인공의 얼굴이 린타로에게 있었다.
‘맨발’은 한사코 주연을 맡기를 거절하는 린타로를 설득하고, 노안으로 유명한 ‘대디보이’(이타바시 슌야)를 라이벌로 섭외하는가 하면, 자전거에 온갖 헤드라이트를 다 달고 다니며 주변의 이목을 끌던 양아치 오구리(시노다 료)를 조명감독으로, 포수 미트에 공이 꽂히는 소리를 듣고 누가 던진 공인지 알아맞히는 내기를 하던 코마다(코히나타 세이이치)와 마스야마(이케다 에이키치)를 음향감독으로 섭외해 온다. “모두 나의 영화를 위해 모여줘서 고마워. 이번 여름엔 너희들의 청춘을 내가 좀 쓸게!” 이렇게 오합지졸의 필름 크루가 완성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법. 카메라 대신 스마트폰으로, 조명기 대신 자전거 헤드라이트로 프로덕션을 꾸려가며 순조롭게 촬영이 진행되던 어느 날, 휴식시간을 가지던 크루들끼리 잡담이 오간다.
“린타로는 직접 시나리오 써보고 싶단 생각해 본 적 없어?”
“제가 어떻게 써요?”
“너 영화도 많이 보니까 써 보지 그래.”
“그냥 팬일 뿐인 걸요.”
“겸손 떨지 마!”
린타로의 겸손이 귀여워 보였는지 ’대디보이’와 오구리는 린타로를 양옆에서 붙잡고 간지럽히기 시작한다. 그런 통에 그만, 린타로는 얼떨결에 웃으며 진실을 말하고 만다. “미래에는 영화가 없어졌으니까요.”

이게 무슨 소리람.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린타로는 자초지종을 고백한다. 린타로가 살던 세계는 숏폼에 중독된 우리의 우려가 현실이 된 세계다. 아무도 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래서 30초조차 너무 긴 시간이라 영상은 5초가 기본인 세상. 1분짜리 영상은 ‘장편영화’ 취급을 받는 통에, 그 미래에는 극장도 사라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도 없다. 그런 미래에서 온 린타로는, 미래에서는 보기 드물게 영화를 즐기는 영화광이었다. 우연히 거장 감독 ‘맨발’의 영화를 접한 이후 ‘맨발’의 모든 영화를 빠짐없이 챙겨 본 린타로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맨발’의 데뷔작,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찍은 사무라이 영화 〈무사의 청춘〉을 직접 보기 위해 시간을 건너 과거로 왔다가 자신이 그 작품에 출연하게 되는 타임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자신이 거장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맨발’은 기뻐할 수 없다. 영화가 사라진 미래에, 과거의 거장으로 기억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전해지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그런 ‘맨발’에게 린타로는 말한다. ‘맨발’ 감독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우연히 보게 된 감독님의 영화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영화라는 건, 이야기라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그러니까 반드시 영화를 찍으시라고.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 미래를 바꿔서, 그 이야기가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할 건데?” “끊임없이 노력해야죠.” 이렇다 할 해법도 없는 주제에 기세만 좋아서, 노력하면 영화가 살아남지 않을까 하고 말하는 린타로 앞에서 ‘맨발’은 저항 없이 웃는다. “대답이 너무 대충이잖아!”
〈썸머 필름을 타고!〉를 기획할 무렵, 마쓰모토 소우시 감독에겐 유독 짧은 숏폼 동영상 기획 제안이 많이 들어오곤 했다고 한다. 5분짜리 기획, 1분짜리 기획, 그런 짧은 기획 앞에서 영화를 찍고 싶은 자신이 시대를 거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지만 마쓰모토 소우시 감독은 영화가 사라진 종말론적인 미래를 그리면서도, 영화는 끝내 살아남을 것이라 말한다. “이 영화는 사라지지 않아. 네가 지켜봐 줬으니까. 내가 본 첫 사무라이 영화가 날 감동시켰고 그 마음을 이어가려고 영화를 시작한 것처럼, 이 영화를 본 린타로가 꼭 미래와 이어줄 거야. 그렇지?” 영화를 향한, 이야기를 향한 사랑이란 전염병과 같아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영화를 찍을 거라고. 그렇게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고.

코로나19 시기를 통과하면서 산업으로서의 영화는 서서히 침몰하는 중이고, 특히나 한국 영화시장은 더는 예전 같지 않아졌다. 우리는 모두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태블릿으로, 컴퓨터로 영상을 보는데 익숙해졌으며, 2시간 반짜리 영화가 너무 길다고 투덜대면서 숏폼 동영상은 앉은 자리에서 서너 시간씩 볼 수 있게 되어버렸다. 우리의 뇌는 이미 더 짧고 강렬한 자극에 익숙해졌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알고 사랑했던 형태의 시네마는 우리 세대에서 끝장이 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썸머 필름을 타고!〉는 말한다. 우리가 더 잘 해보겠다고. 어떻게 하면 영화를 살릴 수 있을지 당장은 잘 알 순 없어도, 영화에 대한 사랑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더 노력해 보겠다고.
“너무 대충이잖아!” 린타로의 다짐을 들은 ‘맨발’처럼, 나 또한 〈썸머 필름을 타고!〉의 결론 앞에서 저항 없이 웃고 말았다. 처음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대책 없는 낙관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극장가가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지금 시점에서 다시 꺼내 본 그 결론은, 낙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장한 결기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이야기로 진심을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우리가 영화를 통해 들려준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는다면, 영화는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영화인들의 이 결기를 믿어봐도 될까. 그랬으면 좋겠다. 저마다 자신만의 알고리듬에 갇혀 1분짜리 숏폼으로 쌓은 벽으로 나뉜 미래보다는, 여럿이 하나의 영화를 함께 보고 “당신은 어떻게 보셨습니까?”라고 서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미래가 더 궁금하니까.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