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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초록색, 과즙. 여름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다.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계절.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듯 찾아온 유월의 하루들은 벌써부터 후덥지근하다. 그럼에도 여름이 좋은 이유는 평범한 장면도 낭만적으로 보인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지루한 일상도 왠지 여름이라는 필터를 끼면 아름답게 보이는 듯한 착각에 흠뻑 빠지고 싶은 계절.

다만, 너무나도 뜨겁고 무더운 날씨 때문에, “여름이었다”라는 말로 모든 찝찝함을 갈음할 수는 없기에, 하루 온종일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찌더운 여름을 조금이나마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좋아하는 여름 노래를 만들거나, 여름이 오면 생각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 그래서 소개한다. 유월이 오면 생각나는 영화.


씁쓸하고 달콤한 자몽에이드 같은 성장 영화

<남색대문>(2002)

<남색대문> 스틸컷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이 선명해질까?”

<남색대문> 대사 중

우거진 초록색 나무,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하교하는 학생들. 대만의 작품들은 유난히도 여름, 청춘, 싱그러움 등의 단어들과 착 달라붙는다. 드라마 <상견니>도 그랬고, 영화 <청설>도 그랬다.

대만 영화 <남색대문> 역시 여름의 청춘을 담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말할 수 없는 비밀>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계륜미의 데뷔작이다. 빛이 바랜 듯한 여름의 색감, 필름으로 담아낸 아날로그한 화면들은 청량한 성장담에 낭만을 부여한다.

그러나 <남색대문>의 스토리는 흔한 대만 로맨스 영화와는 사뭇 다르게 흘러간다. 영화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풋풋한 연애를 기대했다면, 조금 다른 성장 서사를 마주할 것. 사실 청소년기는 마냥 모든 것이 찬란했고, 순수했고, 치기 어렸고, 즐거웠다고 기억하기에는 그 안에 뒤섞인 고민과 아픔이 많은 시기다.

<남색대문> 스틸컷

계륜미가 연기한 ‘멍커로우’는 고민과 아픔을 지닌 고등학생이다. 다만, 그에게는 ‘장시하오’(진백림)라는 친구가 있어서,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조금이나마 아름답게 보낼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남색대문>은 로맨스보다는 우정을 다룬 영화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 이 친구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등의 생각을 하게 되는 여운 짙은 영화다.

여담으로, 영화의 주연을 맡은 계륜미와 진백림은 실제로도 아직까지 절친이라고 하니, 둘은 실제로 영화의 이야기를 완성한 셈.


청량하고 산뜻한 무알콜 모히또 같은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2020)

<썸머 필름을 타고!> 스틸컷

“영화는 말이야, 스크린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이어준다고 생각해. 나도 내 영화를 통해 미래로 연결하고 싶어”

<썸머 필름을 타고!> 대사 중

엉뚱하지만 그래서 더 재기발랄한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 경쾌한 청춘의 한 장면을 찾는다면, <썸머 필름을 타고!>가 제격이다. <썸머 필름을 타고!>는 영화의 제목 뒤에 붙은 느낌표처럼 내내 산뜻하다. 영화 포스터에 적힌 ‘청춘+로맨스x시대극÷SF’라는 말이 당최 뭔 말인가 싶지만, 영화를 보면 단박에 이해하게 될 것.

<썸머 필름을 타고!>는 사무라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에 판타지 한 스푼이 섞인 영화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어린 시절 영화감독의 꿈을 꿨었던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 실소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소소한 웃음 포인트부터 고등학생이기에 가능한 무모함까지. 기분 좋은 가벼움으로 러닝타임 내내 청량함을 선사할 것.


뽀송뽀송한 햇빛 향 같은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

<프리다의 그해 여름> 스틸

“여기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난 언니 사랑해”

<프리다의 그해 여름> 대사 중

누구나 추억 한켠에 어린 시절 여름날의 기억 하나쯤은 있다. 그 계절에 느꼈던 무더움과 찝찝함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따사로웠던 날만이 기억나는 그런.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그런 기억 같은 영화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영화는 줄곧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그 해의 여름날들을 비춘다. 영화는 스페인 어느 시골의 여름날에 특별한 환상을 덧입히지도, 애써 미화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 풀벌레 소리처럼 소박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맑고 투명하다. 프리다가 외삼촌 부부에게 애정을 받으려 애써 부리는 투정도, 소중한 인형을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모습도, 사촌동생 아나를 은근히 질투하는 모습도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달콤한 젤라또 같은 애니메이션

<루카>(2021)

<루카> 스틸컷

"너 머릿속엔 브루노가 있네!"

"브루노라고?"

"나도 가끔 걔가 찾아와. '알베르토, 넌 못해. 넌 죽을 거야.'(라면서.) 루카, 그럴 때는 브루노가 하는 말을 무시하면 그만이야. 걔보고 조용히 하라고 해. 따라 해봐, 실렌치오, 브루노! (닥쳐, 브루노!)"

<루카> 대사 중

<인어공주>의 반대 버전이라고 할까. 영화 <루카>는 육지에 발을 내디디면 인간처럼 변하는 바다 괴물 ‘루카’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물속에서만 살던 루카는 바다 괴물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처음으로 육지 위로 올라가게 되고, 인간 세계에 흠뻑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모험을 즐기게 된다.

<루카> 스틸컷

<루카>는 이탈리아 리비에라의 한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다.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색깔의 집들, 에메랄드빛 바다. 영상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진다.

<루카>를 어른의 시선으로 감상한다면, ‘두 소년의 인간 세계 모험기’라는 표면적인 테마 아래 놓인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발견할 것이다. 처음에는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인 척했던 루카는 점차 자신이 바다 괴물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된다. 루카는 자신과 다른 존재인 인간과 함께 어울리며, 스스로의 정체성 앞에 당당해진다.

<루카>는 ‘바다 괴물’과 ‘인간’이라는 서로 명확히 다른 존재를 내세웠지만, 현실 세계의 우리 또한 누군가를 나와는 다른 존재(영화에서 표현한 말로는 ‘별종들’)라고 여기기도 한다. 반대로 누군가와 어울리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도 하고, 그들과 닮으려 애써 노력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나와 다른 존재라고 여기며, 서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우리 어른들에게도 묵직한 교훈을 전하는 영화. 왠지 젤라또와 파스타를 먹고 싶어지는 영화 <루카>로 한 편의 휴가를 떠나보자.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