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차이나타운의 어느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용호의 결투>(1970)를 본 한 청년은 발을 동동 굴리며 답답해했다. “왕우의 발은 단지 서있기 위한 발에 지나지 않아. 나 같으면 발차기를 쓰겠다고, 발차기를...” 이 청년은 머잖아 권격 액션의 신풍(新風)을 일으키며 전설로 남을 이소룡(李小龍, Bruce Lee : 1940~1973)이었다. 이 무렵 이소룡은 할리우드에 배우로 진입하고자 했으나 악전고투 속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약간 거슬러 올라가자면 1964년 롱비치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서의 무술 시연(바로 이 대회에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촌경(寸勁), 원인치 펀치가 나온다)이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것을 계기로 배우 오디션의 기회를 얻은 이소룡은 TV 드라마 그린 호넷(미셸 공드리의 <그린 호넷>(2011)은 리메이크 작이다)에서 주인공을 보조하는 운전사 겸 사이드킥인 가토 역을 맡아 열연한다.

TV시리즈 <그린 호넷>.

그린 호넷은 이소룡 사후 1974년에 재편집되어 극장판으로 개봉해 나름 인기를 끌지만 정작 TV 방영 당시에는 단 한 시즌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조연임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 이소룡의 가토 연기는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아담 웨스트 주연의 TV시리즈 배트맨과의 크로스오버와 아이언사이드(<킬 빌> 시리즈의 유명한 효과음은 실은 이 드라마의 테마곡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블론디등에 연이어 게스트 출연하게 된다. 1969, 이소룡은 진번쿵푸(振藩功夫) 도장을 운영할 때 무술을 가르친 제자이자 친구이며, 할리우드에서 각본가로 활동하던 스털링 실리펀트의 주선으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을 영화화한 <말로우>(1969)에 단역 출연한다. 이때 이소룡은 제임스 가너가 연기하는 주인공 필립 말로우를 협박하기 위해 보내어진 악당의 부하 역이었는데 난장판을 만들어달라는 폴 보가트 감독의 간단한 주문을 이소룡은 삽시간에 방안의 온갖 기물을 때려부수며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어버리는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로 소화해버렸다.

<말로우>.

그러나 <말로우>는 이소룡의 사실상 첫 할리우드 영화 출연이란 의의에도 불구하고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흔한 말단의 중국인 악당에 지나지 않았다. 영어 발음이 부자연스러운 아시아계 배우라는 점은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과 같은 인맥의 도움과 치열한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었고, 이후에도 그는 보잘 것 없는 단역만을 전전해야 했다. 오랜 구상 끝에 1971년 워너브라더스에 제안한 TV 시리즈 전사(The Warrior)의 기획이 무산되자 실망한 이소룡은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 제작자 프레드 와인트롭과 홍콩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친구 소기린의 권유로 홍콩에 돌아갈 결심을 한다. 홍콩에서 본격적인 장편영화를 찍고 성공하면 그걸 바탕으로 할리우드에 재진입하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옳았다.

(워너브라더스 측은 ABC의 압력 때문이라 해명했지만 실상은 동양인 배우의 주연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인종차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전사의 기획은 나중에 <킬 빌> 시리즈의 빌 역할로 잘 알려진 데이빗 캐러딘 주연의 쿵푸로 현실화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소룡이 제자이자 배우인 제임스 코번, 상술한 각본가 스털링 실리펀트와 1969년부터 함께 추진하던 영화 <소리 없는 피리>(The Silent Flute)의 기획 또한 데이빗 캐러딘 주연의 <서클 오브 아이언>(1978)으로 이어진다.)


홍콩에서 세계로, 그리고 전설로

이소룡 본인은 몰랐지만 미국에선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었던 것과는 달리 중화권에서 그린 호넷은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중국인 배우가 활약하는 활극이라는 점은 큰 메리트로 작용하여 중화권 시청자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채워주었고 이소룡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홍콩이 배출한 인기스타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당시 무협영화의 주종을 이끌던 쇼브라더스 영화사로부턴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이소룡의 스타성을 알아본 골든하베스트 사의 사장 추문회가 영화 두 편을 같이 하기로 계약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한 이소룡은 곧 <당산대형>(1971)을 내놓는다. 급조하다시피한 각본에 미국에서는 CF 한 편 찍을 돈도 안되는 10만 달러의 초저예산을 들였을 뿐이었지만, <당산대형>은 당시 홍콩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던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끌어내리며 380만 홍콩달러를 벌어들이는 공전절후의 대히트를 기록해 스타로서 이소룡의 위상은 굳건해졌다. 이소룡을 섭외하려는 경쟁이 심화되자 추문회가 그를 붙잡아두기 위해 구룡 워털루힐 구역에 아파트를 제공할 정도였다. 다만 이 아파트는 13층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매번 걸어서 오르내려야 했다는 웃지못할 후문을 낳았고 뒤에 <맹룡과강>이 히트하면서 컴벌랜드가 41번지의 방 11개짜리 2층 저택을 구입해주어 이사한다.

<당산대형>.

(<당산대형>의 성공은 본의 아닌 피해자를 낳았다. 바로 장철과 더불어 신무협의 기풍을 이끌던 대가 호금전. 3년 가까이 작업한 필생의 대작 <협녀>(1971)를 대만과 홍콩에서 개봉했지만 영화 자체의 철학적 난해함과 더불어 <당산대형>의 압도적은 흥행몰이가 겹친 악재로 극장에서 금방 내려지는 굴욕을 겪었다.)

<정무문>.

다음 작품인 <정무문>(1972)은 홍콩에서 443만 홍콩달러, 미국에서 340만 달러를 벌어들여 <당산대형>이 세운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 두 편의 성공은 이소룡으로 하여금 오랜 세월 꿈꾸어왔던 비전의 현실화를 가능케 해주었다. 영화배우로서 높은 인지도를 쌓았지만 이소룡은 자신의 본령은 엄연히 무술인이며, 영화를 통해 자신의 무술 철학을 대중에게 전파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다시 말해 이소룡 본인이 영화를 직접 감독하거나 한발 물러나서 감독직을 위임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영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무제한의 통제권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였다.

<맹룡과강>.

<당산대형><정무문>의 작업 과정 내내 (직업인 영화 감독으로서의 기본적인 연출 역량은 있었지만 촬영 현장에서 현장 지휘를 방만히 하고 경마 이야기로 소일하는 등의 불성실한 태도로) 불화를 겪은 나유 감독과 결별한 이소룡은 스스로 감독을 맡기로 작정하고 두 개의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하나는 <맹룡과강>(1972)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완의 프로젝트 <사망적유희>였다. 우선적으로 <맹룡과강>의 제작에 돌입한 이소룡은 감독직 수행에 필요한 공부를 독학하면서 자신이 즐겨보았던 <황야의 무법자>(1964) 등의 마카로니 웨스턴과 <요짐보>(1961) 같은 일본 사무라이 찬바라 영화의 스토리텔링, 연출기법을 참고하여 각본과 안무를 짜나갔으며(또한 각본에는 1959년 처음 샌프란시스코에 건너왔을 때와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던 시기의 경험이 녹아들었다), 사운트트랙 녹음에서도 타악기를 직접 연주하고, 홍콩 영화계의 촬영 기술 수준에선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일본인 나시모토 타다시를 촬영감독으로 기용하는 등의 공을 들인다. 콜로세움 결투장면은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하자 몇몇 장면을 몰래 들어가 찍은 뒤 나머지는 정교하게 내부를 재현한 세트에서 촬영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맹룡과강>530만 홍콩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다시 한 번 전작의 흥행 기록을 갱신한다.

<맹룡과강>.

이소룡과 비등한 실력으로 맞설 상대 격투가 콜트 역은 절친한 무술 동료이자 당수도를 수련해 전미 가라테 챔피언을 따낸 경력의 소유자 척 노리스에게 돌아간다.(조 루이스에게 먼저 제안이 갔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루이스 본인이 인터뷰에서 부인했다.) 배역을 맡아 자신과 합을 맞출 무술가를 선정하는 데서부터 이소룡이 <맹룡과강>에 투영하려 한 무술 사상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속도를 따라올 만큼 몸놀림과 반응속도가 빠른 서구인 무술가를 골라내는 동시에 어느 정도 체격이 건장하여 키가 왜소한 자신과 이미지적으로 대비를 이루게 함으로써 힘으로 승부를 보는 격투 스타일에 대응해 스피드와 유연성을 강조하는 절권도의 특성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실제로 이소룡은 척 노리스로 하여금 더욱 체중을 불릴 것을 주문했고 이 주문에 척은 평소의 몸관리를 풀고 피자와 치킨, 파스타 등을 신나게 먹어대며 기대에 부응하듯 몸을 키워서 촬영장에 왔다.(나중에 척 노리스는 마음껏 식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때를 두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용쟁호투>.

<맹룡과강>을 마친 직후에도 이소룡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곧이어 <사망적유희>의 촬영에 돌입했다. 한국의 법주사 팔상전을 배경으로 각층마다 기다리고 있는 각종 무술의 고수들을 꺾고 아들을 구출한 주인공이 뒤이어 무술대회에 출전한다는 내용의 영화로, 이는 다양한 무술과의 대결을 통해 보다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이소룡 무술의 습합(習合) 사상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입부에 해당하는 탑에서의 결투만을 촬영한 상태에서 프로젝트는 잠시 (그리고 영원히) 중단된다. 이소룡이 거둔 괄목할 만한 아시아권에서의 성공과 스타성, 그리고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이 여러 주 동안 북미 흥행 1위의 자리를 고수하면서 아시아 무술 영화의 수익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워너브라더스의 노선 변화가 들어맞아 골든하베스트와의 합작영화를 먼저 추진하게 된 것이다. <피와 강철>(Blood and Steel)이란 제목으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이소룡이 합류하면서 <용쟁호투>(1973)로 개명된다.

(<사망적유희>를 위해 촬영되었다가 <사망유희>(1978)15분만 쓰이고 난도질당한 격투시퀀스의 원본필름 40분 분량은 분실된 채 사라진 걸로만 알려졌으나, 1999년 베이 로건에 의해 발견되어 이소룡 전문가 존 리틀의 다큐멘터리 <이소룡 : 전사의 여정>에 삽입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국내 정발 <용쟁호투> SE DVD2번 서플먼트 디스크에서 볼 수 있다.)

<용쟁호투>(좌), <상하이에서 온 여인>(우) 거울방 장면.

007 시리즈와 같은 스파이 첩보물의 기본적인 플롯에 이국적 배경과 동양 무술의 요소를 넣어 차별화를 꾀하고자 한 <용쟁호투>는 제작비가 (당시 환율상 홍콩에선 엄청난 금액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고작 85만 달러밖에 책정되지 않은 B급 영화였다. (이것이 얼마나 적은 액수인가는 5년 뒤에 나온 <슈퍼맨>(1978)의 제작비가 5천만 달러를 넘었다는 걸 보면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소룡의 입장에서 이것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할리우드 주연작이라는 의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한 영화에 자신의 흔적을 많이 불어넣으려고 했다. 이소룡의 입김이 들어간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수련생을 지도하는 초반부인데 전체적인 플롯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사족 같은 장면이지만 무술철학자로서의 이소룡의 면모와 절권도의 자세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으로 이소룡의 적극적인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거울방 격투씬은 오손 웰즈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에 대한 오마주(다른 설에 따르면 로버트 클로즈 감독과 제작자가 호텔 화장실을 지나다가 거울이 붙어있는 복도를 보고 받은 영감을 이소룡에게 이야기했고, 여기에 이소룡이 찬성하면서 이뤄졌다고도 한다)인 동시에 고정된 관념에 휘둘리지 말고 상황에 유연히 대응한다는 이소룡 무술철학의 선()불교적 모티브를 잘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거울방 촬영은 금세 촬영 스태프의 모습이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거울로 포장한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렌즈만 보일 정도의 구멍을 뚫어 촬영했다. 세트에는 8000여개의 거울이 동원되었고 이소룡은 거울을 깰 때 파괴력을 강화하기 위해 손에 작은 쇠붙이를 쥐고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거울방은 각종 조명기자재와 사람이 뿜어내는 열, 환기가 안되는 공간으로 인해 즉석 찜통이 되어서 배우와 스태프 전원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장면을 자세히 보면 이소룡과 석견이 온몸과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건 바로 이 촬영환경 때문이었다.)

<용쟁호투>.

<용쟁호투>의 촬영은 열악한 홍콩의 현장 환경,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작업 방식이 다른 미국과 홍콩 크루 간의 합을 맞추는 문제 등등 여러 난항을 겪으면서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숱한 에피소드를 낳았다. 섬의 지배자 한의 부하들을 맡은 300여명의 엑스트라들 중에는 인근 무술 도장에서 뽑은 인원만이 아니라 진짜 깡패들이 섞여들어 있어 통제가 곤란한 상황이 종종 발생했는데, 이 중 하나가 이소룡에게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지고는 이소룡을 큰 형님으로 모시는 일화도 있었을 정도였다. 여기에는 다른 후일담이 더 붙어있다. 극중 오하라와 싸우는 격투씬을 찍던 이소룡은 날카로운 유리병에 손목 부상을 입어 잠시 촬영이 중단되는 불상사를 겪었다. 영화에서 보이는 오하라가 든 깨진 유리병은 사실 영화용 소품으로 쓰이는 슈거글래스가 아니라 진짜 유리였다.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는 슈거글래스를 만드는 기술이 아직 없었고, 리얼리즘을 중시한 이소룡의 고집으로 진짜 유리병이 쓰였다.) 때문에 이소룡을 떠받들던 깡패들이 저 꽈이로우(서양오랑캐)를 죽여버립시다. 형님” 하는 식으로 흥분했고 이소룡은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너스레를 떨면서 나중에 손을 보겠다고 했다.

(로버트 클로즈 감독은 이 말을 잘못 이해해서인지 이소룡이 오하라 역을 맡은 밥 월을 정말 죽이려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한 엑스트라의 증언에 의하면 치료가 끝난 뒤 현장에 복귀한 이소룡은 욱하는 성질을 다 죽이지 못하고 촬영 중 광동어로 번역이 난감할 정도의 욕설을 뱉으며 밥 월에게 옆차기를 날렸다고 한다.)

<용쟁호투>.

리얼리즘에 대한 이소룡의 집착은 코브라에 손을 물리는 사고로까지 이어졌다. 이소룡은 실제 코브라를 동원해 극 중 한의 부하들을 쫓는 장면에 이용했는데 지하기지로 들어가기 전 코브라를 제압하는 장면에서 코브라의 머리를 전광석화같이 후려갈겨 촬영팀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그걸 반복하다가 성이 난 코브라가 한 번 손을 물었는데 다행히 이빨에서 독을 미리 빼둔 터라 응급조치만 하고 촬영을 이어갔다.

이처럼 여러 자잘한 사고를 겪으면서도 <용쟁호투>의 작업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소룡에게는 점점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1970510,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 스튜디오에서 더빙 작업(<용쟁호투>의 모든 대사는 현장녹음이 아니라 따로 더빙된 것이다)을 지휘하던 중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전신발작과 뇌부종 증세로 이때 발견한 사람이 없었으면 바로 죽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고 한다. 심한 두통을 호소하거나 기절하는 등의 증세는 이미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종종 발병하던 터였고 이소룡 자신도 뭔가를 예감했는지 한 역으로 극중에서는 적이지만 아버지 이해천과 절친한 사이였던 원로배우 석견에게 아저씨, 전 아무래도 아저씨보다 먼저 갈 것 같아요라 토로하곤 했었다. 이 말고도 이소룡은 이미 (아내 린다의 증언에 따르면) 1970813일 자신의 몸무게에 버금가는 무게로 굿모닝 리프트 운동을 하다가 척추 4번 천골신경에 큰 부상을 입어 통증으로 고생하는 등 몸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종종 진통제에 의지하고 마리화나를 섞어 구운 과자를 먹기도 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화에서 이소룡은 정상이 아닌 컨디션을 가지고도 모든 액션을 다 소화했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가장 몸 상태가 좋은 상태에서 촬영한 건 막 재활한 직후인 <당산대형>이고 <용쟁호투> 즈음에 이르면 여러 부상과 지병, 단시간에 여러편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받은 과도한 스트레스, 일 중독으로 인한 피로의 누적으로 인해 이소룡의 얼굴빛부터가 어두워져있는 걸 관찰할 수 있다.)

<용쟁호투>.

결국 운명의 날이 된 1973720, 조지 라젠비(<007 여왕폐하대작전>(1969)의 제임스 본드를 맡았던 그 배우다)와 차기작을 의논할 겸 저녁 식사를 약속했던 이소룡은 골든하베스트 사장 추문회와 오후 2시에 만나 중단된 <사망적유희>의 촬영 재개를 논의한 뒤 여배우 정패의 아파트에 갔다가 두통을 호소했다. 이때 정패는 진통제만을 건네줬을 뿐 변변한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저녁 7시경 이소룡은 잠에 빠졌다. 저녁 약속에 늦자 추문회가 정패의 아파트로 찾아갔지만 이소룡은 깨어나지 않았고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숨져있었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용쟁호투>는 그의 사후 홍콩에서 726, 미국에서는 819일 극장에서 개봉했고 월드와이드 2억 달러를 넘는 흥행성적을 거둬들인다. (다만 홍콩에서는 이소룡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가장 저조한 330만 홍콩달러에 그쳤다.) 아시아의 별 이소룡이 세계의 영웅이 되는 순간이었지만,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환호하며 받아들였던 영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소룡 영화 무술에 관하여

<사망유희>.

이소룡 스타일의 액션이 지니는 의의를 설명하려면 먼저 이전에 홍콩에서 유행했던 무협영화의 안무가 어떠했는가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엽위신의 <엽문 2>(2010)에서도 배경으로 스쳐지나가듯 묘사되는 바이지만 홍콩을 비롯해 당시 중화권 남방에서 주종을 이루던 무술은 광동 남파권법의 대종을 이루던 홍가권이었다. 보폭이 넓고 크게 휘두르는 동작이 많은 홍가권은 일찍이 청대 말기에 군대에 징집된 인원을 빠르게 실전에 투입하기 위해 훈련하면서 애호되었으며, 1년에 5~6편 꼴로 무협영화를 밥 먹듯 찍어내던 홍콩의 영화 인력들 상당수는 이미 홍권 수련자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장철과 수영선수 출신에서 배우로 변신한 외팔이왕우로, 특히 장철은 본인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홍권의 고수였다.

더군다나 시각예술의 특성이 중시되는 영화의 특성상, 의념을 크게 가져가는 권법이 보여주기 식의 안무를 짜기엔 굉장히 유리했다. 따라서 쇼브라더스를 중심으로 양산되던 1960년대까지의 무술영화들은 홍권을 비롯한 광동남파 권법의 큰 기조를 따라가는 동시에 관객의 눈이 편하게 동작을 따라갈 수 있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또는 비숙련자 배우도 손쉽게 액션을 따라할 수 있게) 일부러 속도를 조절해 인위적인 합을 만드는 걸 중시했다.

<정무문>.

바로 이 점에서 이소룡 액션의 혁신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쉽게 말해 이소룡은 짜고 치는티가 심하게 나는 기존의 액션을 탈피해, 보다 빠르고 실전적인 액션을 지향하고자 했다. 그의 영화에 상대역으로 동원된 배우들, 예를 들면 <맹룡과강>의 척 노리스와 황인식, <용쟁호투>의 밥 월과 석견(심지어 1913년생으로 이미 환갑이었음에도 선풍각을 찰 정도의 달인었다), <사망적유희>의 지한재와 카림 압둘 자바이 실은 상당기간의 수련을 거친 사람들이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속도와 힘을 받아낼 수 있는 '우께'(기술을 받는 자)들을 부르고 실제 무술인답게 실전 동작을 중심으로 한 가운데, 필요한 선에서의 영화적 과장을 섞음으로써 이전의 양식적인 액션을 대체하고 권격 영화의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용쟁호투>에서 오하라와의 대결을 보면 영춘권의 치사오에 측면으로 서는 채리불권의 스탠스를 접목한 이소룡 나름의 응용을 엿볼 수 있다. 이소룡은 (엄밀히 말하면 사형 황순량과 친구 장탁경으로부터 주로 배웠지만) 엽문에게서 배운 영춘권을 골격으로 삼되 채리불권의 측방 스탠스와 홍권의 힘을 쓰는 요령을 접목하고, 가라테와 사바트의 발차기, 펜싱의 스텝과 복싱의 펀치를 참고하는 등의 연구를 통해 절권도의 틀을 다져나갔으며, 이를 영화에 곧 적용해서 보여주었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기풍의 무술을 창조해냄으로써 이소룡은 액션 영화와 무술 양 방면에 동시에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용쟁호투>.

여기에는 이소룡이 평소 즐겨보았던 1960년대 일본 사무라이 찬바라 영화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소룡은 두 장르의 기법을 세심히 관찰하고 자기 영화의 연출에 반영했는데 시네마스코프의 수평적 길이 양 끝에 인물을 배치하고 대치하는 동안의 시간적 여백을 두어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지속하고, 액션이 시작되는 순간 호흡이 끊기고 액션의 합이 펼쳐지는 식의 연출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와 고바야시 마사키의 <할복>(1962) 등을 참고한 흔적이 역력하다. <맹룡과강>의 클라이막스 결투에서 보이는 급격한 줌 인-아웃, 클로즈업과 와이드숏을 충돌시키는 편집은 세르지오 레오네가 서부극을 찍으면서 즐겨 애용하던 테크닉을 받아들인 것이다. 심지어 <맹룡과강>에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더 웨스트>(1968)의 사운드트랙 일부를 차용한 부분이 있다. 척 노리스와의 대결 장면 직전이 그러하다.

(참고로 이소룡은 일본 사무라이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하고자 오륜서본조무예소전의 영역본 등을 즐겨 읽었다. <용쟁호투>의 초반에 시비를 거는 호주 무술가를 쪽배를 태워 보내버리는 건 일본 검술 초창기의 유명한 검호로 ‘500년래 무쌍의 남자라 불리는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 1489~1571)이 비와호수를 건널 때의 이야기를 각색해 인용한 것이다.)

<용쟁호투>, 이소룡(좌)과 대역으로 출연한 원화(우).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에 머리채를 잡힌 성룡.

정리하자면 이소룡은 종래의 홍콩 영화가 답습해온 관습화된 액션 컨셉을 탈피해 보다 빠르고 실전적인 무술 안무를 추구했으며, 다양한 무술의 접목을 통해 이전에 보지 못한 무술 스타일 자체를 창시해버렸고, 그걸 영상에 담는 그릇으로써 안정적인 프레임과 긴 호흡의 리듬감을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소룡이 남긴 영화적 유산은 그의 뒤를 잇는 액션 스타들에게 다시 영향을 끼치며 계속 남게 되었다. <용쟁호투>의 단역 내지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이들 중에는 80년대 홍콩 액션의 한 시대를 장식할 인재들, 바로 홍금보(도입부 소림사에서의 스파링 상대)와 임정영, 원표와 원화(이소룡이 공중제비를 돌 때와 서머솔트 킥을 찰 때의 대역), 그리고 성룡(지하 기지에서 머리채를 잡힌 채 목이 꺾이는 엑스트라)이 있었다. 이소룡은 갔지만 그의 유작 <용쟁호투>는 이후에 있을 새로운 액션의 인재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등용문이었던 셈이다.

용쟁호투

감독 로버트 클루즈

출연 이소룡, 존 색슨

개봉 1973 미국,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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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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