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가 여성 이미지를 착취하는 역사는 아주 길다. 어쩌면 한국영화사 전체가 이 혐의로 얼룩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한국의 남성 감독이 만든, 한국영화사에 이미 기록됐거나 기록되고도 남을 한국영화 몇 편을, 젠더 감수성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따져보고자 한다. 이는 젠더 감수성을 문제 삼아 이들 영화 자체를 부정하거나 감독 개인의 인신을 공격하는 작업이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역발상이 전제된다. 언급할 영화들은 분명 한국영화사의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고 남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영화에서조차 여성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 면에서 편향된 젠더 감수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널리 인정받는 영화의 여성 재현 문제가 한국영화 일반의 문제적인 젠더 의식을 재고하는 차원에서 상징성을 가질 것이라 나는 믿는다.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임권택, <서편제>(1993)

너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550초에 이르는 진도 아리랑롱 테이크 장면을 위시로 한 이 영화의 자의식은 청각의 시각화, 삶과 예술의 조화, 잃어버린 민족예술의 복원 등의 수사로 극찬 받으며 한국영화의 미학적 성취로 기록되어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판소리로 결속된 유사가족은 여기저기 떠돈다. 여타의 판소리 연행자들이 몇 푼 안 되는 돈을 쫓아 서양 밴드 그룹에 합류할 때도 이들은 꿋꿋하다. <서편제>의 진의는 판소리라는 멸종 위기의 문화형식을 영화라는 매체를 경유해 생생하게 복원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가치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축소된 민족문화의 위엄을 복원하는 작업은 그것대로 뜻깊다 할 것이다. 문제는 판소리에 대한 의지가 아버지 유봉만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어떻게든 후대에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유봉은 이상한 짓을 일삼는다. ‘소리의 진정성은 고통에서 나온다며 딸 송화에게 시력을 잃는 독약을 먹인다. 이것은 아무리 다르게 말해도 남성 가부장의 명백한 범죄다심각한 것은 이것에 대한 영화의 태도다. 구시대적 인물의 광기로 취급하기는커녕 민족예술의 부흥을 위한 어떤 비장한 절차로 격상시킨다.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는 유봉에게 심청전을 배우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서편제>는 시각 장애인이 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란 판소리밖에 없다는 애석한 사연에 무관심하다. 대신 그것이 마치 자발적인 욕망의 발로인 것처럼 서사의 분기점으로 극화한다. 이는 슬픔은 인생을 통해 쌓이는 것이고 너는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다. 너는 단지 그것을 네 삶의 전부인 노래를 통해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라는 유봉의 말과 결합된다. 남성 가부장의 폭력이 마치 미적 승화의 선결조건인 것처럼 치장되며 비장한 혼으로 추앙된다<서편제>의 미학적 성취를 인정하더라도 폭력적인 남성성을 비장한 톤으로 용인하는 행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의 위신을 상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최후의 식민지를 착취하는 것이 바로 그 미학적 성취를 떠받들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맨 얼굴이다.


이창동, <박하사탕>(2000)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사진사를 꿈꾸던 순수 청년 김영호의 인생은 입대를 즈음하여 굴절된다. 신군부의 하수인으로 강제 편입되어 광주시민을 향해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으로 떠밀린다. 실수로 그만 선량한 시민을 사살한다. 그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끼어 있는 셈이다. 제대 후 그의 삶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그는 괴물이 된다. 괴물이 된 자신과 싸운다. 싸움에서 진 그는 자살한다. 김영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라고 영화는 묻는다. <박하사탕>은 어느 남성 주체의 모호한 정체성을 따라가면서 종국에는 개인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의 서늘한 면모를 정면에서 응시한다. 한국 리얼리즘영화 계보의 훌륭한 성과다.

한 발 더 들어가 똑바로 응시해야 할 것은 남성 주체의 트라우마를 포착하기 위해 그 반대급부로 동원되는 여성 이미지의 작위성이다. 제대 후 형사가 된 김영호가 잠복근무 중 우연히 만난 선술집 작부를 기억하는가. 그녀 앞에서 그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모호한 표정으로 첫사랑의 추억을 읊조린다. “지금 나랑 그 여자가 같은 비를 맞고 있는 거니까, 내가 보고 있는 비를 지금 그 여자도 보고 있으니까.” 놀라운 것은 그것을 듣고 있던 그녀가 그 어떤 의심도 없이 김영호의 회상에 전적으로 이입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첫사랑의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이 대목의 효과는 고약하다. 남성 주체의 모호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은 낭만적 환상의 객체로 떠밀린다.

첫사랑 윤순임을 묘사하는 방식은 보다 심각하다. 윤순임 입장에서 <박하사탕>은 광주 체험을 기점으로 괴물로 변한 김영호에게 버림받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제대 후 연락이 끊긴 김영호를 윤순임이 어렵게 찾는다. 김영호가 이상하다. 예전과는 달리 배려심이라고는 없다. 그녀 앞에서 보라는 듯이 다른 여성의 허벅지를 더듬기까지 한다. 윤순임은 이유를 알 수 없다. 김영호가 변한 계기를 아는 사람은 김영호 자신과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우리뿐이다. 이 와중에도 윤순임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는커녕 김영호를 위한 선물을 내민다. 보다 놀라운 것은 18년이 흐른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한 윤순임이 그만 병에 결려 생명이 위태로운 와중에도 마지막 소원으로 김영호와의 재회를 희망한다는 믿지 못할 설정이다. 김영호라는 남성이 국가폭력의 피해와 가해 사이에 입체적으로 끼어 있을 때 윤순임이라는 여성은 낭만적이고 운명적 사랑의 객체로 박제화된다. <박하사탕>의 역사 의식은 논리, 이성, 합리와는 대비되는 비논리, 감성, 로맨틱으로서의 여성, 바로 그 지리멸렬한 젠더 의식을 자양분 삼는다.


봉준호, <살인의 추억>(2003)

한국 스릴러 장르의 부흥은 <살인의 추억>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진단에 딱히 이견은 없어 보인다. 이 영화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재현한 것을 넘어 그것을 막지 못한 불행한 시대의 공기를 그린다. 형사와 살인범의 대결구도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옅어지는 반면 부당한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담당한 공권력의 위선과 무기력이 부각된다. 폭압적인 남성 이데올로기 앞에서 무기력하게 고개 숙인 남성 주체의 소시민적 근성이 이 영화가 대결하는 진짜 대상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결국 남은 것은 가을하늘을 닮은 텅 빈 공허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추억> 역시 문제적인 젠더 감수성이 발견된다. 여성의 죽음을 과시적으로 전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최근 한국영화의 여성 이미지 착취에 비할 때 오히려 이미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내 질문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국가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형사들의 무기력이 먼저인가, 아니면 살인범에게 희생당한 여성이 먼저인가? <살인의 추억>은 삼엄했던 권력에 저항하지 못했던 남성 주체의 무기력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 죄의식을 토로하기 위해 피해자 여성의 연이은 죽음을 도구적으로 활용한다. 여성 신체의 포박, 훼손, 그리고 절멸은 장르적 긴장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여성들의 죽음은 남성들 사이의 퍼즐 맞추기와 연대를 강화하는 촉매제로 극화된다. 어떤 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남성 형사와 남성 범인의 일화에 불과하다. ‘그들의 무능력과 악마성의 틈바구니에서 목숨을 잃은 피해자 여성에 대한 애도가 끼어들 여지는 희박하다.


우민호, <내부자들>(2015)

<내부자들>은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비루한 정치 지형도에 대한 생산적인 우화로 해석되며 극장가를 휩쓸었다. “대중은 개, 돼집니다라는 대사는 기득권이 국민을 대하는 위선적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널리 회자됐다. 특히 최근에는 탄핵정국을 비판적으로 예언했다는 극찬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국의 부조리한 정치 무대와 정면 대결하는 건 분명하지만 젠더 감수성을 대입시킬 때 이 영화는 역으로 자신이 비판하는 한국 정치의 추문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이것은 단순히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가 전무하다는 겉보기의 문제가 아니다. 재벌, 국회의원, 신문사 주필의 향락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국민을 개, 돼지라 부르는 그들이야말로 정말이지 변태처럼 논다. 엄밀하게 말해 이 추악한 장면에서 우리의 시야를 압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장면의 출발점에서 카메라 시선이 과시하듯 훑고 지나가는 대상은 비루한 기득권이 아니라 그들 앞에 마치 백화점 상품처럼 전시된 여성들의 나체이다. 남성들의 늙은 신체를 조롱할 여유도 없이 곧장 우리는 그들의 더러운 몸뚱이가 그녀들과 뒤엉킨, 여성 신체의 착취 이미지와 마주해야 한다. 상류층의 비루함을 고발한다는 명분이 여성의 나체를 자동적으로 전시하는 명분일 수는 없다.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사회적 약자를 상품화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내부자들>의 전제인 셈이다. 이런 태도는 스스로가 비판하는 비루한 남성 이데올로기와 엇갈리기는커녕 공명한다.


박찬욱, <아가씨>(2016)

박찬욱 감독에 따르면 <아가씨>의 진의는 한국사회에서 오염된 아가씨라는 호칭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는 여성의 아름다운 연대와 그것에 따른 위압적 남성성의 통쾌한 붕괴를 그려나간다. 특히 히데코가 궁금해하지 않은 지식을 뻔뻔하게 과시하는 백작의 맨스플레인을 한 방에 때려눕히는 장면은 압권이다.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은 농밀한 에로티시즘의 상상력으로 매개된다. 욕조에 앉은 히데코의 이를 숙희가 조심스럽게 다듬어줄 때의 농밀한 시선을 시작으로, 사랑이 불타오를 때의 뒤엉킨 두 여성의 나체를 경유한 후, 억압적인 남성성을 상징하는 기구를 보란 듯이 성행위의 도구로 전유하는 영화 말미의 상상력까지, 확실히 <아가씨>는 한국영화의 금기에 도전하며 생산적인 성 담론의 장을 마련한다.

문제는 영화의 의도와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남성적 시선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하나의 장면이다. 이것 때문에 전복적인 여체의 향연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알다시피 백작은 사기꾼이다. 숙희를 이용해 히데코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한 몫 단단히 챙기려 한다. 그는 허세로 가득하다. 딱히 명석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백작의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해 연출된 장면이 있다. 그것은 히테코나 숙희와 상관없다. 백작이 히데코의 대저택에 일하는 하녀를 꼬드기는 대목이 그것이다문제는 해당 하녀를 묘사하는 <아가씨>의 시선이다. 백작의 욕망을 은유하기 위해 하녀는 최대한 색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백작의 수작에 너무나 간단히 넘어가기도 해야 한다. 더구나 그녀의 신체는 필요 이상으로 육감적이다. 카메라는 남성 시선에 포획된 하녀, 그러니까 하녀의 가슴을 백작이 움켜질 때의 형상을 단도직입적으로 포착한다. 남성적 시선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가지런하게 배열된 하녀의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가끔씩 우리는 어색한 장면 하나 때문에 영화 전체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난데없이 불편한 이미지는 이후에 등장하는 여체의 향연을 의심하게 된다. 히테코와 숙희의 뒤엉킨 나체를 가까이서, 옆에서, 위에서 유영하듯 포착하는 카메라 시선이 에로티시즘의 환기를 벗어나 때로 남성적 관음증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 한국영화계는 왜곡된 젠더 감수성에 대한 비판으로 시끄럽다. 이런 흐름을 부당하다 생각하는 의견도 제법 있다. 현재의 페미니즘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또 다른 파시즘이라는 놀라운 주장까지 보인다. 국가권력을 장악해 폭압적으로 휘둘렀는가. 인종을 학살했는가. 헤어진 남자친구의 집에 찾아가 가족 모두를 죽였는가. 남자친구의 얼굴에 염산을 뿌렸는가. 말도 안 되는 폭력적인 비유다. 물론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이해한다. 과거를 현재로 무작정 환원할 경우 오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때는 몰랐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런 진단에 반대한다. 몰랐다고 해서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수혜자와 피해자는 앎의 문제를 떠나 실존한다. 삐뚤어진 젠더 감수성을 고칠 필요가 없었던 덕분에, 몰랐더라도 크게 피해보는 게 없었던 까닭에, 남성은 크게 이득을 봤고 여성은 크게 피해를 입었다. 여성 이미지의 착취를 젠더 감수성의 맥락에서 문제 삼는다고 해서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가치가 타격을 입을까? 조금이라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라는 운동장의 기울기는 생각보다 급격하고 견고하다. 영화사에 기록될 인정받는 영화들조차 크든 작든 왜곡된 젠더 감수성에 기대고 있는데 하물며 다른 영화들은 어떠할까? 과거의 삐뚤어진 젠더 감수성에 대한 비판은 과거를 일방적으로 청산하는 작업이 아니라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교두보이다. 한국영화는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박우성 / 영화평론가

※ 외부 필자의 글은 씨네플레이의 공식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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