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을 찾는 일의 성패는 결국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있다. 아무나 심마니가 될 수 가 없는 것처럼 귀한 것은 귀한 것을 볼 줄 아는 마음과 눈의 역할이 8할이다. <박열>과 <아이캔스피크>의 이제훈, <하루>의 변요한, <더 테이블>의 한예리, <꿈의 제인>의 구교환과 이민지 등 2017 년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넘나들며 크게 활약한 배우들의 친정은 독립영화라는 텃밭이다. 천만 영화의 천 분의 일인 1만 관객만 들어도 흥행에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척박한 시장. 독립영화의 배우들은 스스로의 매력과 노력으로 그 텃밭에서 움텄다. 그리고 꿋꿋이 스스로의 가치를 키워오던 그들에게 관객이란 든든한 응원군이 관심과 사랑이라는 애정을 보탰다. 여기 반짝일 채비를 마친 또 다른 보석들이 있다. 언제라도 빛만 들어오면 배우가 없다는 푸념의 공기를 정화해줄 근사한 초록색의 이름들을 호명해본다.


이서준
<울보>

이진우 감독의 <울보>는 내몰린 십대들의 등을 토닥이는 영화다. 맘놓고 울 수도 없는 아이들의 속내를 찬찬히 살피는 이 작품은 그래서 보는 이들을 울컥하게 만든다. 내성적인 모범생 이섭을 연기한 장유상, 문제아로 낙인 찍인 하윤을 연기한 하윤경의 연기도 좋지만 동네 양아치들의 리더 격인 길수 역할을 맡은 배우 이서준은 영화 <울보>에서 잊기 힘든 잔상을 남기는 배우다. 배우 이서준은 마치 청소년기의 늑대를 보듯 개와 늑대의 시간을 오가는 묘한 매력을 지닌 배우다. 이서준이 연기한 길수는 내몰린 아이들의 무리를 장악하는 섬짓한 권력의 요체인 동시에 여전히 아이의 눈빛으로 형형한 파랗게 질린 소년이기도 하다. 분노와 고함으로 어찌할 줄 몰라 몸서리치는 길수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 뒤를 쫓게 만드는 캐릭터다. 단단한 체구와 말간 얼굴의 배우 이서준은 전형적인 악역으로 소모될 수도 있는 길수를 물기를 머금은 인물로 그려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채 배우지 못한채 훌쩍 웃자란 소년의 표정이 배우 이서준의 얼굴에 포개듯이 하나로 겹쳐졌다.


정준원
<더 테이블>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은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임수정 등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여배우들의 개성과 연기력이 진한 향기를 내뿜는 작품이다. 하나의 테이블을 앞에 두고 나누는 두 사람의 짧은 대화는 미처 영화 속에 담기지 못한 긴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더 테이블> 속 네 가지 에피소드 중 첫 번째 에피소드는 유명한 배우가 된 유진(정유미)과 전 남자친구 창석의 만남을 담고 있다. 재회의 반가움은 안타깝게도 호기심이란 무례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을 만들어낸다. 뜨거운 차 한 잔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지켜보듯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시간 안에 놓인 남자 창석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주책바가지다. 악의가 없다지만 독성이 강한 질문들과 지나간 추억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철없는 농담들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한 이는 배우 정준원이다. 신연식 감독의 <프랑스 영화처럼>, 이준익 감독의 <동주>와 <박열>에서 짧지만 인상적인 순간을 남겼던 배우 정준원은 모난 데 없이 동그란 얼굴로 무구한 입꼬리를 만드는 청년이다. 하지만 동시에 칼날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상대와 보는 이를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배우이기도 하다. 이해영 감독의 개봉 예정작 <독전>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은 배우 정준원의 다른 순간들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소진
<더 킹>

한재림 감독의 <더 킹>의 여성 캐릭터들은 기능적이고 소모적이다. 왕을 꿈꾸는 철부지 남자들의 갈팡질팡 사이에서 유독 뾰족하게 솟아오른 캐릭터가 마치 교통정리를 하듯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한강식(정우성) 사단에게 “대한민국 역사상 이 정도 쓰레기들이 있었습니까?”라며 매서운 비난과 함께 강력한 비수를 들이미는 캐릭터, 바로 안희연 검사가 그 바늘이다. 경상도 억양의 단호한 어투와 옅은 미소 속에 단단하게 상대를 꿰뚫는 눈빛 그리고 망설임 없이 스스로의 동선을 개척하는 검사 안희연은 <더 킹>의 남자 캐릭터 모두와 맞바꿀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재난 현장의 사실성을 배우의 힘으로 생생하게 전달한 기자 역할을 했던 그는 <씨 베토벤>에서는 연극의 무대에 가까운 러닝 타임을 특유의 리듬과 힘으로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간 주역이기도 했다. 최근작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이 믿음직한 배우의 위력은 대단하다. 성실한 고수만이 앉을 수 있는 왕좌가 김소진의 자리다.


전소니
<여자들>

<여자들>은 글과 그림이 주는 뉘앙스가 풍성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모든 에피소드를 여행하듯 지나가는 배우 최시형을 비롯, 첫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배우 전여빈부터 채서진, 요조, 유이든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의 배우들은 여름날의 무지개처럼 다채롭고 인상적이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에피소드 ‘오늘의 그는, 어제와 다르다.’에 출연하는 배우 전소니는 형형하다. 시형이 오키나와에서 만난 여자 ‘소니’ 역할을 맡은 배우 전소니는 깊은 밤을 닮은 눈동자와 동이 틀 무렵의 태양을 닮은 미소가 인상적인 배우다. 영화 속 소니는 태연한 동시에 조심스럽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지만 표현에는 신중한 사람이다. 배우 전소니는 소니라는 인물의 시간들을 잘게 쪼개서 선보인다. 길지 않은 시간 속에 분명하게 자신의 이미지와 매력을 각인하는 그녀는 포토제닉 이상의 매력으로 관객의 시간과 시선을 훔친다. 모래처럼 흩날리고 파도처럼 철썩이는 말의 시간 속에서 전소니는 말 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굉장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배우다. 낯선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대로 스크린에 비칠 때 관객들은 미세하게 변하는 전소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게 된다.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조용하지만 압도적인 힘. 배우 전소니가 그걸 가지고 있다.


정가람
<시인의 사랑>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정가람은 눈부신 미소와 서슬퍼런 고함을 번갈아 관객들에게 던진다. 직구밖에 모르는 소년이 던지는 감정의 공들은 아프게 보는 이의 마음을 때린다. 시를 쓰는 일에 동력을 잃은 시인이 소년을 만나 영감을 얻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슴에 담은 비수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거칠 것 없이 세상의 순간들을 읽어내려가는 소년의 말들은 또렷하고 생생하다. 오른쪽 왼쪽이 묘하게 다른 크고 깊은 눈, 운동 선수를 연상시키는 큰 체구와 상반되는 말간 웃음은 웃자란 아이 같은 세윤의 품과 속을 연기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을 통해 눈여겨볼 신예의 등장을 알린 그는 <시인의 사랑> 속 베테랑 선배들과의 호흡 속에서 자신의 숨을 쉴 줄 아는 배우임을 입증했다. 그저 반항아라고 부르기엔, 방황하는 청춘이라고만 호명하기엔 배우 정가람이 가진 눈부신 소년성의 실체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이 배우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장인섭
<사돈의 팔촌>

<끝까지 간다>, <우는 남자>, <더 폰> 등의 영화와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 <비밀의 문>, <후아유-학교 2015> 등에 출연한 장인섭. 말랐지만 단단한 체격,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 체중의 변화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이미지까지, 그는 한 두 가지로 타입화시키기 어려운 배우다. 장현상 감독의 영화 <사돈의 팔촌>이 금기의 영역을 다루는 멜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성장 영화의 싱그러움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배우 장인섭 덕분이다. <사돈의 팔촌>에서 관객을 미소짓게 만드는 ‘8할’을 담당하고 있는 배우 장인섭은 미숙한 소년의 혈기와 해사한 청년의 온기를 함께 갖고 있는 캐릭터 태익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올해 장인섭은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에서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경찰청 팀장 천인숙(전혜진)의 동료 형사 민철 역으로 출연한 그는 한재호(설경구), 조현수(임시완)와 극한의 대립을 펼친 바 있다. 선한 인상으로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미소를 짓던 민철은 또 한 명의 ‘불한당’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평범함이라는 무기로 비범한 순간을 만들어 내는 일은 늘 반전 이상의 짜릿함을 선사해준다. 배우 장인섭의 그 무기가 위험하지 않게 반짝이고 있다.


정연주
<아이 캔 스피크>

<우리들>을 만든 윤가은 감독의 단편 <손님>으로 얼굴을 알리고 드라마 <드림 하이2>와 <마녀의 연애>, 영화 <오늘 영화>와 <앨리스: 원더랜드에서 온 소년>, 예능 <SNL코리아> 등에 출연해온 정연주는 데뷔 초부터 일본 여배우 아오이 유우의 닮은꼴로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배우다. 드라마 <드림 하이2>에서 교복을 입은 반항아 이슬 역을 맡아 아이돌들 사이에서 유독 돋보이는 날것의 존재감을 보여준 그녀는 이후 <마녀의 연애>를 통해 순백에 가까울 정도로 순박하고 해말간 은채 역으로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선보이며 연기의 스펙트럼을 증명한 바 있다. 또한 웹드라마 <대세는 백합>을 통해 그동안 국내 드라마와 영화에서 본 적 없던 캐릭터 세랑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순수한 동시에 거칠고, 유약한 듯 보이지만 강단 있는 배우 정연주의 이미지가 사랑스럽지만 괴상한 세랑 캐릭터와 맞물려 역대급 동성 키스씬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어떤 장르도, 어떤 얼굴도 시치미를 뚝 떼고 제 것으로 만드는 배우 정연주의 복합적인 매력과 남다른 행보는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여전하다. 구청공무원 아영 역을 맡아 남다른 코미디 감각을 선보이는 배우 정연주는 제 것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배우다.


진명현 /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재밌으셨나요? 내 손 안의 모바일 영화매거진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더 많은 영화 콘텐츠를 매일 받아볼 수 있어요. 설정법이 궁금하다면 아래 배너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