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극장
9월 20일
PM 3:30 (현지시간)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그녀의 몸이 쉬는 곳조차 알 수 없으니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그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이 그녀를 처형했다네.” - 베르톨트 브레히트

불꽃 여인으로 불렸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베를린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발아래로 저릿한 전기가 통과하는 착각에 휩싸였다. ‘마르크스 이후 가장 뛰어난 혁명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동지였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우파 집권세력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한 여인. 그녀의 넋이 곳곳에 서린 탓일까. 기이하면서도 경이로운 기운이 광장을 한가득 뒤덮고 있었다. 역사가 전하는 아우라란.

바빌론 극장

1988년 독일 현대사의 풍파를 겪어낸 베를린 예술영화 전용관 바빌론 극장(Babylon Kino)은 바로 이곳,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 옆에 위치해 있다. ‘Babylon’이라는 알파벳 영문판이 없었다면 극장인지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외관이다. 시대의 온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에는 국내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겹겹의 사연들이 서려 있다. 낭만이기도 하고, 투쟁이기도 하고, 추억이기도 한 세월의 이끼들이 충만하다.

바빌론 극장에서는 지난 8월부터 우파(UFA, Universum-Film AG)’ 100주년을 기념, 그 시절 제작된 100편의 영화가 관객을 만나고 있었다. ‘우파1920년대 성업했던 독일 영화제작사다.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마지막 사람>(1921),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 요세프 폰 슈테른베르크의 <푸른 천사>(1930) 등 독일 표현주의 걸작들이 이곳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바빌론 극장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특집전준비로도 한창 분주한 모습이었다. 세계 영화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작품을 만날 기회가 이토록 많다니, 베를린 시네필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바빌론 극장에 9월 20일 오후, 배우 정하담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 포스터가 걸렸다. 포스터 우측에 새겨진 글귀는 대한독립영화제(Korea Independent)’. 주독일 한국문화원이 주최한 한국독립영화 축제가 8일간의 일정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초청작은 <스틸 플라워>(박석영 감독), <분장>(남연우 감독), <연애담>(이현주 감독), <최악의 하루>(김종관 감독) 등 극영화 4편과, <울보 권투부>(이일하 감독), <물숨>(고희영 감독),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김소영 감독),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정윤석 감독) 등 다큐멘터리 영화 4편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날아온 독립영화 8편이 이 유서 깊은 곳에서 역사적인 영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다.

연애담

감독 이현주

출연 이상희, 류선영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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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제를 향한 베를린 관객들의 관심은 비상했는데, 여기에는 베를린 전역에 붙은 영화제 포스터가 한몫했다. 정하담이라는 개성적인 피사체가 전하는 강렬함이 독일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정하담을 가리켜 한국에서 온 비요크(Bjork)’라고 칭하기도 했다. 독일 공영방송 <3Sat>가 이번 영화제를 직접 소개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전국으로 전파를 타는 방송에 한국에서 온 독립영화들이 소개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번 영화제를 기획한 담당자 L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PM 4:00
<스틸 플라워> 박석영 감독.

개막작 <스틸 플라워>를 연출한 박석영 감독이 바빌론 극장을 찾은 건 오후 4. 개막식 참석을 위해 하루 전날 밤 베를린에 도착한 박석영 감독은 7시간 시차에도 끄떡없어 보였다. 특히 박석영 감독은 영화가 상영되는 바빌론 극장에 대한 감흥을 숨기지 못했는데, 고전 영화에 대한 지식이 방대한 그에게 88년 영화 역사를 지닌 바빌론 극장은 살아 숨쉬는 아카이브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런 멋진 곳에서 영화제가 열리는지 몰랐어요~.” 동공이 살짝살짝 흔들렸다.

스틸 플라워

감독 박석영

출연 정하담

개봉 201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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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영 감독의 시선을 멈추게 한 것은 메인 상영관 중앙에 앉아있는 동상. 주인공은 독일 표현주의 시대를 이끌다가 1920년대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긴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 1892~1947) 감독이다. 루비치 감독의 열혈 팬이었다는 바빌론 극장 초대 극장주가 그를 기념하기 위해 동상까지 제작, 메인 상영관 중앙에 떡 하니 모신 사연이 흥미로웠다. 루비치는 떠났지만 그의 영혼은 이곳에 남아 1365일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박석영 감독은 루비치 감독 동상 옆에 앉아 카메라를 보며 수줍은 미소를 드러냈다. “김치~.” (뒤늦게 바빌론 극장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루비치 감독 동상은 이곳을 찾는 영화인들의 포토존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동상 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배우와 감독 사진들이 적지 않게 발견됐다.)

긴급 상황 발생은 영화제들의 운명이다. 개막식 리셉션을 앞두고 극장에 당도하기로 한 대형 포스터가 포스터 업체의 실수로 베를린이 아닌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고 발생의 순간, 위기 대처 능력은 시험에 든다. 다행히 주최 측의 빠른 대처가 빛났다. 제작 주문한 사이즈보다는 작았지만, 바빌론 극장을 환하게 밝힐 만한 크기의 포스터가 긴급하게 만들어져 극장 정중앙에 걸렸다. 예술의 도시 베를린 한복판에 걸린 정하담의 얼굴. 이 모습을 휴대폰에 담은 박석영 감독이 서울에 있는 정하담에게 메신저로 보냈다. 박석영 감독 인스타그램에 달린 정하담의 댓글. “, 너무 가고 싶어요!” 드라마 촬영 일정으로 이번 영화제 참석이 불발된 정하담만큼이나, 그녀의 부재가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PM 7:30

개막작이 상영되는 오후 8시가 가까워지자 관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미리 예매하고 찾아온 관객도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극장 앞을 지나가다가 포스터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티켓을 구매하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 둘, 개막작 상영관에 관객들이 꽉 들어찼다. 한 마디로 대성공. 독일 관객이 60% 이상의 좌석을 차지해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 극장 맨 뒤에서 관객 동향을 살피던 박석영 감독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이 교차했다.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2000년 초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 베를린 시장의 발언 이후 이 문장은 베를린의 키워드로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더 이상 가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섹시하다. 그 중심에 예술이 있다. 통일 후 베를린시는 주인 없이 버려진 공간을 아티스트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했고, 이에 세계 곳곳에서 보헤미안과 예술가가 몰려오면서 베를린은 진짜 섹시한 도시로 변모했다. 한국의 예술가들도 그런 분위기를 타고 베를린에 많이 진출해 있는데, 이날 한국 독립영화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뮤지션, 미술가, 유학생, 영화 프로듀서 등이 바빌론 극장을 찾았다.

PM 9:30

영화가 끝났다. 박수가 터졌다. ‘꽃 3부작의 마지막 편 <재꽃>(<들꽃><스틸 플라워><재꽃>은 박석영 감독 3부작으로 불린다)으로 최근 한국에서 열혈 관객과의 대화(GV)를 이어가고 있던 박석영 감독은 이날 <스틸 플라워>GV에 나섰다. 먼 타지에서 2년 전 작품을 다시 꺼낸 셈이니, 감독에겐 뭔가 시간 여행의 느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담이 끝나고 관객들에게 마이크를 던지자, 여기저기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시간이 부족해 질문을 던지지 못한 관객은 GV가 끝난 후 로비에서 박석영 감독과 2차 비공식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스틸 플라워>바빌론 극장에 꽃을 피웠다.


9월 22일

이번 대한독립영화제는 하루에 두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최악의 하루> <연애담>의 경우 평일에도 좌석을 매진시키는 인기를 보여줬다. 주말에 상영된 <물숨><분장> 역시 표가 없어 돌아가는 관객이 적지 않게 발견됐다. 기대 이상의 관객몰이에 바빌론 극장 측이 반응했다. 보다 큰 상영관을 배정하는 적극성을 보여준 것. 이곳의 프로그래밍도 국내 극장과 비슷한 면이 있었는데, 관객이 몰리는 상황에 따라 상영관 편성이 이리저리 뒤집혔다. ‘퐁당퐁당(교차상영)’은 없었지만, 보다 많은 관객들에게 좋은 영화를 보여주려는 극장 측의 레이더망은 시종 가동되고 있었다. 극장 프로그래머인 독일인 A대한독립영화제관계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후엔 이상한 독일 영화를 작은 관으로 보내고, 너희 영화를 큰 관에서 틀어줄게.”

최악의 하루

감독 김종관

출연 한예리, 이와세 료, 권율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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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영화제 3일째인 9월 23(토요일)에는 조금 흥미로운 풍경이 벌어졌다. 바빌론 극장과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있는 민중극장 폴크스뷔네(Volksbühne)’에서 100여명의 예술가-행동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인 것이다. 폴크스뷔네는 독일을 대표하는 공연장으로 독일 극작가 하이너 뮐러 등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신임 극장장과 극장 운용 방침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어난 이날 시위에서 예술가들이 내건 구호는 “DOCH KUNST!”. 직역하자면 그럼에도 예술!”이라는 뜻이다.

마침 이날 대한독립영화제상영작은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였다.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는 남한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야유하는 음악을 만들어 논란이 된 밴드 밤섬해적단의 문제적 행보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로 이명박근혜 정권을 통과하면서 이들 청춘이 느낀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한다. 뉴타운 개발부터 강정마을 사건, 국가보안법까지, 살얼음판을 걷는 현실 속에서 밤섬해적단의 음악 인생은 희극과 비극 사이를 오간다. 이들의 행보를 보고 있자면 이런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예술!”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럼에도 예술을 외치는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스크린 안팎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의 밤을 비췄다. 마침 비가 주룩주룩. 베를린이여, “DOCH KUNST!”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감독 정윤석

출연 권용만, 장성건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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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시우/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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