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꿈이야 생시야. 음... 안타깝지만 생시다. 열흘간의 연휴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우린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정 빽빽하게 잡기로는 전국구에 들 만한 에디터는 이번 연휴엔 그간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질펀히 늘어져 있기만 했다. 10월 7일 단 하루만 빼고. 한스 짐머와 <라라랜드>의 음악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슬로우라이프 슬로우라이브 2017'이 열린 날이었다. 낮부터 밤까지 이어졌던 가을날의 공연 후기를 전한다.


전반전 '<라라랜드> 인 콘서트'는 영화음악을 만든 저스틴 허위츠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OST 레코딩에 참여한 7명의 연주자가 모두 무대에 섰다. 무대 뒤/옆엔 영화 본편이 동시에 상영됐으니, <라라랜드>의 음악을 즐기기엔 가히 최상의 조건이었다. 허위츠의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서곡'에 이어 고속도로 인트로 신과 함께 'Another Day of Sun'이 시작됐다. 일곱 연주자와 더불어 71인조 디토 오케스트라가 합세해 빅밴드 재즈 사운드를 제대로 구현하면서, 영화에서 듣던 음악들이 한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연주됐다. 영화와 싱크로율을 맞춰야 하기에 콘서트를 위한 편곡은 없을 수밖에.

'그대로' 연주한다는 건 OST를 라이브로 들려준다는 것 그 이상의 세심함을 필요로 했다.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집에 들어와 델로니어스 몽크의 'Japanese Folk Song'을 연주하는 대목을 실수까지 재연하는 건 물론, 미아(엠마 스톤)를 처음 만나는 재즈 클럽에서 세바스찬이 못마땅히 캐롤 토막들을 연주하는 것도 영화와 똑같이 실연됐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Mia & Sebastian's Theme'이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새삼 이 자리가 세바스찬이 들려주고 듣는 모든 '재즈'들이 연주되는 콘서트라는 게 실감됐다. 미아와 두 번째 만나는 파티에서 세바스찬이 어거지로 연주하던 신스팝 'Take On Me'와 'I Ran'은 그냥 지나치는 게 당연해 보였다.

하늘이 뚫린 경기장에서 펼쳐진 공연.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미아가 남자친구를 등지고 극장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는 세바스찬에게 찾아오고, 서로 손을 머뭇거리던 두 사람이 입을 맞추려던 순간 필름이 타오르고 키스는 잠시 유예된다. 그때 하늘 위로 헬리콥터가 평화롭게 지나갔는데, 그 모습이 영화 속 뻘쭘함과 많이 닮아 혼자 웃음이 났다. 공연 현장은, 미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이 가장 행복했던 여름을 지나 그들이 점점 멀어지는 가을이 되자, 해가 기울고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으로 변했다. 음악보다는 바스라져가는 연인의 대화가 오래, 날서게 들리는 '가을' 시퀀스에서 스크린은 크고 또렷하게 보였다.

<라라랜드>를 새드엔딩이라고 생각해왔다. 각자 꿈을 이룬 그들이 마주보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없으니까. 잠시나마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겨울이 되고 공연장에 다시 재즈 음악이 활기차게 퍼지는 걸 듣고는, 문득 <라라랜드>의 마지막이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고, 지난 사랑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시 시작한다면 잘할 수 있을 텐데" 같은 무책임한 생각들이 달라붙는 건 마찬가지였다. 피날레의 음악이 경쾌하지 않았다면, 하늘로 크게 폭죽이 터지지 않았다면, 다시 옛사랑에게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미쳤지.


사실 개인적인 기대치는 한스 짐머의 공연이 훨씬 컸다. 지난 봄에 열린 미국 최대의 뮤직 페스티벌 '코첼라 2017'에서 켄드릭 라마와 레이디 가가보다 훨씬 압도적인 공연을 보여줬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다. 커리어를 대표할 만한 곡이 아닌 초기작에 해당하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Driving'으로 문을 연 짐머는 <셜록 홈즈>(2009), <마다가스카 2>(2008)의 스코어를 연달아 보여주며 가볍게 3시간에 육박하는 대장정의 기개를 자랑하는 것 같았다. <라라랜드> 세트가 영화와 함께 즐기는 콘서트였다면, 한스 짐머의 공연은 그 흔한 영화 클립 없이 온전히 음악에만 집중됐다. 스크린엔 연주자들의 모습과 음악을 시각화한 강렬한 색채의 이미지만이 비쳐졌다.

무대 위의 한스 짐머는 분주했다.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악기들을 오가면서도 세트가 끝날 때마다 밴드 멤버들을 조곤조곤 소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런 구성은 밴드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한편, 온전히 음악에 집중해야 하는 공연에 대한 길잡이 역할까지 해냈다. 1부의 세트리스트는 특정한 악기군의 소리가 두드러지는 곡들의 메들리로 구성됐는데, 짐머는 그 악기의 연주자들을 소개한 후에 그들의 소리가 돋보이는 영화음악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가령, 보컬리스트 차리나 러셀과 레보 M을 소개하고는 그들의 목소리가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했던 <글래디에이터>(2000)와 <라이온 킹>(1994)의 스코어를 연주하고,  티나 구오를 비롯한 현악기 연주자들이 소개된 후에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음악들이 휘몰아치듯 펼쳐졌다. "이것도 한스 짐머가 만든 거야?" 갸우뚱대다가도 "많은 악기들을 다양한 스타일로 활용해왔군" 새삼 놀라게 됐다. 한 아티스트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기 때문일까, 같은 영화 속 음악이 아닌데도 메들리로 엮인 곡들이 물처럼 어울리며 흘렀다.

티나 구오 / 차리나 러셀

연주자들의 소개가 충분히 이루어진 후 이어진 2부 공연은 19인조 밴드의 타이트한 합이 물씬한 세트리스트가 이어졌다. <트루 로맨스>, <크림슨 타이드>, <천사와 악마>, <씬 레드 라인> 등 명작들의 스코어가 저마다 다른 무드로 쏟아졌다. 메인테마보다는 액션이 휘몰아치는 순간을 더 강렬하게 수식하던 음악들이라 각 영화의 명성이 무색하게도 영 낯선 음악이었지만, 밴드의 출중한 연주 덕에 '익숙함'이라는 무기 없이도 자연스럽게 소리의 격랑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공연 초반엔 세트리스트를 확인하느라 프로그램북을 펼쳐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주자 개개인의 프로필을 자세히 읽게 됐다.

티나 구오의 관능적인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 <원더우먼>(2017)의 'Is She With You?'가 관객들의 집중을 한껏 끌어올린 종반에 이르러서는, 한스 짐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음악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스코어들이 정신 없이 이어지고 난 후, 배우 이병헌이 무대에 올라 '영원한 조커' 히스 레저와 놀란의 인연과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상영되던 극장에서 벌어졌던 총격 사건을 애도하는 음악 'Aurora'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콘서트는 점차 막바지에 다다랐다.

마지막 세트는 <인셉션> 메들리였다. 'Half Remembered Dream', 'Dream is Collapsing', 'Mombasa' 등 듣자마자 영화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음악들이 콘서트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달아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은 당연히 'Time'. 악기들을 옮겨 다니며 연주하느라, 밴드 멤버들 하나하나 소개하느라 바빴던 짐머는 가만히 피아노에 앉아 한음 한음 누르며 장중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독특한 비주얼이 이어지던 스크린에 건반에 내려앉는 짐머의 손이 크게 비쳐졌다. 연주를 모두 마치고 대장정을 함께한 밴드 멤버들과 교감을 나누던 짐머는 저 멀리 관객에게도 하이파이브를 던졌다. 쇼맨십마저 끝내주는 거장.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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