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호대련> <피막> <최후의 증인> <뽕> <내시> <돌아이>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당대의 관습과 스타일을 혁신해온 이두용 감독이 지난 1월 19일, 폐암 투병 중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1981년 <피막>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화두의 원조쯤 되며(같은 해 임권택 감독이 <만다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 1983년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첫 번째 한국영화였다.

1970년대 데뷔 초의 그는 <어느 부부>(1971) 등을 통해 당대의 주류라 할 수 있었던 낡은 멜로드라마의 관습과 싸웠고, <용호대련>(1974)으로 시작된 태권도 소재 권격 액션영화의 놀라운 활력은 홍콩과 일본의 액션영화와 비교해도 감히 뒤지지 않는 독창성을 보여줬다. <초분>(1977), <최후의 증인>(1980), <장남>(1984), <내시>(1986) 등 액션, 멜로, 사극, 사회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복원판이 만들어지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이 열리며 그는 새로운 시대의 관객과 만났다. <피막>과 <최후의 증인>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음성해설 등 다채로운 스페셜 피처를 수록해 제작됐다. 특히 <최후의 증인>은 개봉 당시 158분의 원본이 검열로 인해 상당 부분 잘려나간 후 감독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졸속 편집되어 상영된 비운의 영화였다. 그 후 오랫동안 잊힌 이 영화는 박찬욱, 오승욱, 류승완 감독 등 후대 감독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한국영상자료원이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에서 제작한 154분 버전으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독자적인 4K 디지털 복원 시스템을 갖추면서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이두용 감독 회고전을 위해 새롭게 디지털 복원한 <최후의 증인> 은 베를린 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한편, 이두용 감독의 <뽕>도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한국고전영화 채널’을 통해 4K로 만나볼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1986년 수집한 35밀리 원본 네거티브 필름으로부터 이두용 감독의 감수를 거쳐 지난해 4K 해상도로 디지털화한 것. 그동안 한국영상자료원은 HD 화질로 복원한 고전영화를 꾸준히 공개해왔지만, 해상도가 더 높은 4K로 복원해서 내놓은 건 <뽕>이 처음이다. <뽕>은 앞서 같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해상도가 낮은 SD 화질로 공개한 바 있는데, 조회수가 무려 4400만 회를 넘길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관련 기사 참조)
고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을 극장에서 제때 만났더라면
<올드보이>(2003)와 <살인의 추억>(2003),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2003)를 이른(?) 나이에 영화관에서 본 친구들이 부럽다고 말한 적 있다. 왜냐하면 나의 ‘그때 그 시절’에는 한국영화를 보면서 어떤 호감을 느껴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970년대 생인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자면, 처음으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공식적으로’ 영화관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던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라는 세계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드디어 볼 수 있게 된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우리 세대는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볼 일 자체가 딱히 없었다는 얘기다. 임권택은 물론이고 이장호와 배창호, 박광수와 장선우의 당시 영화들은 등급 때문에 보지 못했고 신문 광고나 영화관 간판, 영화 포스터로나 곁눈질할 수 있었던 한국영화들은 하나같이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치는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뼈와 살이 타는 밤에 변강쇠가 마님을 찾던 토속에로물이 대부분인 ‘성인영화’들뿐이었다.

물론 그 나이에 볼 수 있는 한국영화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조악한 특수효과로 점철된 남기남, 심형래의 유치한 아동영화들이 대부분이었고 거기서 몇 살 더 먹었더니 이런저런 청춘스타들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열일곱 살의 쿠데타를 일으키고 열아홉 절망 끝에 사랑노래를 부르던, 별로 공감 가지 않던 학원물들이 극장가를 가득 채웠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당시 영화관에서 진심으로 ‘즐기며’ 본 한국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1990)과 곽재용 감독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1990)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랄까, 몇 년 뒤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1992)과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을 만나기까지 ‘가슴’으로 본 한국영화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른바 ‘내 인생의 영화’라고 할 만한 수많은 영화들이 어떤 ‘원체험’으로 오래도록 각인될 나이에, 정작 한국영화와의 진정한 조우는 계속 미뤄졌다. 이후 성인이 되어 앞서 얘기한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박광수, 장선우의 영화들을 챙겨보며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됐지만, 그것은 영화관의 필름의 질감이 아닌 작은 화면의 VHS 비디오로 뒤늦게 ‘학습’한 영화들이었다. 그처럼 언제나 ‘나는 왜 내 인생의 영화로 한국영화를 말하지 못할까’ 하는 것은 영화애호가로서 지닌 가장 큰 결핍 중 하나였다. 드디어 그 오랜 결핍을 해소시켜준 영화가 바로, 부끄럽게도 너무나 늦게 만난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이었다. 까맣게 모르고 살았던 이 대단한 작품을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단 말인가. <최후의 증인>을 영화관에서 제때 만났더라면, 아마도 이후 한국영화를 향한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증인>을 모르고 살았던 이유는 있다. 1980년 개봉 당시 당국의 검열로 인해 절반 가까이 삭제되어 감독 의사와 무관하게 졸속 편집·개봉했다가 불과 열흘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생사의 고백: 이두용’ 특별전이 열렸을 때,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오리지널 네가 필름을 통해 원본에 가깝게 복원한 154분 버전의 복원판을 보게 됐다. 1970년대를 마무리하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성과이면서, 보기 드문 하드보일드 걸작인 <최후의 증인>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순간이었다. 이후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는 물론 시네마테크 서울 등에서 연이어 관객들과 만나면서 이명세, 박찬욱, 오승욱, 류승완 등 수많은 후배 감독들이 애정을 고백했고, 역시 수많은 관객들이 잊고 있던 한국영화사의 한 조각을 복원하는 기쁨을 함께 누렸다.

사실 박찬욱 감독은 그보다 앞서 영화잡지 「키노」에 이두용 감독에 관한 회고의 글(‘1982년 겨울. 박찬욱 감독, 이두용 감독과 김기영 감독을 발견하다’, 2000년 5월호)을 기고한 적 있다. 그는 이두용 감독의 또 다른 걸작 <해결사>(1981)와 함께 <최후의 증인>을 영화관에서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말로 놀라운 것은 <최후의 증인>이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이 작가인 김성종의 유일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데다, 그전에 보았던 <해결사>와는 달리 감정이 풍부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세계관은 건조하고 비극적이었다. 역사의 아픔을 미스터리 장르로 풀어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멋진 탐정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을 부여잡은 탐정이 나온다는 점도 좋았다”며 “이두용 감독의 영화 중 리메이크하고 싶은 영화는 <최후의 증인>”이라고까지 말했다. 아무래도 <해결사>와 같은 권격 액션영화보다 <최후의 증인>이 자신이 선호하는 ‘미스터리 구조의 역사 이야기’여서 기회가 생긴다면 도전해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최후의 증인>은 정말 놀라웠다.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담고 있는 세계관은 건조하고 비극적이었다. 역사의 아픔을 미스터리 장르로 풀어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멋진 탐정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을 부여잡은 탐정이 나온다는 점도 좋았다. 이두용 감독의 영화 중 리메이크하고 싶은 영화는 <최후의 증인>이다. "
박찬욱 감독
이후 오승욱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얘기한 특별전이 열렸던 2006년경 영화잡지 「필름2.0」에 ‘동토(凍土)의 하드보일드’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통해, “존경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보고 싶은, 앞으로 내가 만드는 영화들이 모국어로 소통될 수 있는 누군가의 자장 안에 있고, 나 혼자 고아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영향받았다고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났다고 썼다. 또한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같은 잡지에서 ‘걸작 <최후의 증인>과 이두용의 영화세계’라는 제목의 글에서 “<최후의 증인>은 최상의 액션영화 연출자인 이두용의 재능이 서사물의 규모를 갖춘 플롯과 만나 거의 기적적으로 도달한 1970년대 한국영화 최상의 화면들이 펼쳐진다. 잊혀질 뻔한 이미지의 저주받았던 걸작의 실체를 스크린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라 상찬했다.
"존경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보고 싶은, 앞으로 내가 만드는 영화들이 모국어로 소통될 수 있는 누군가의 자장 안에 있고, 나 혼자 고아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영향받았다고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한국영화를 만났다. 바로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이다. "
오승욱 감독
김성종 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최후의 증인>은 의문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면서 6.25 한국전쟁을 전후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맞닥뜨리는 이야기다. 2001년에는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오병호 형사(하명중)는 변호사 김중엽(한지일)과 양조장 주인 양달수(이대근) 살인사건을 맡게 된다. 양달수의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던 그는 오래전 6.25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공비토벌사건과의 연관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살인 혐의로 억울하게 20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황바우(최불암)가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뒤 벌어진 살인사건임을 알게 된다. 과거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북한 공비 사령관의 딸이었던 손지혜(정윤희)는 토벌작전을 피해 한 초등학교의 교실 아래에서 숨어 지내던 중 성폭행을 당하고, 황바우(최불암) 덕에 간신히 살아난다. 자수하는 배신자는 무조건 총살이라는 맹목적인 규율 아래 배고픔과 더위와 싸우던 그들이 점점 불안과 욕망을 이기지 못하는 짐승으로 변해갔던 것. 하지만 공비들이 소탕된 뒤 손지혜는 토벌대의 청년대장 양달수의 첩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집에서마저 쫓겨난 손지혜는 술집을 전전하게 되고 다시 황바우와 만난다. 오병호는 손지혜와 황바우를 둘러싼 과거의 일들과 맞닥뜨리면서 살인사건의 진실에 접근해 간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인물과 마주하게 된다.

로드무비에다 추리물의 구조를 띤 영화는 내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오병호 형사의 뒤를 쫓는다. 그처럼 플래시백을 이용해 방대한 원작을 압축하면서도(<최후의 증인>은 1987년 MBC에서 탤런트 유인촌이 오병호를 연기한 8부작 TV드라마로 만들어진 적도 있다) 덜컥거리는 부분 없이 박력 있게 넘어간다. 그는 낡은 코트를 걸친 채 차디찬 바람과 눈발을 견디어내면서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 오병호가 걷는 길을 따라 영화에 4계절을 다 담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촬영에만 1년이 걸렸다. 그 4계절의 극적인 변화는 오병호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변화해가는 과정과 맞물린다. 그리고 억울한 피해자들에게서 고통이 대물림되는 부조리한 역사, 이념의 갈등과 가해자들의 욕망이 뒤엉켜 비극이 비극을 낳았던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와 마주한다. 그리하여 손지혜와 황바우, 그리고 오병호의 최후를 보는 느낌은 모골이 송연하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영화를 본 우리들을 ‘최후의 증인’이라는 그 자리에 올려 남겨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즈음 영화가 처음 시작하며 다소 어색하게 마주한 느낌이었던 오프닝 자막이 뒤늦게 가슴을 후벼 판다. “구악을 일소하고 새 질서를 확립하려는 1980년 이 시대에 어제의 진실이 무엇이고 가짜가 무엇이라는 것을, 한 수사관의 집념적인 인간보호를 통해 가식 없이 토론하고 싶었다. 얘기도 어두운 얘기, 화면도 어둡다. 80년대엔 이러한 어둠이 사라졌으면 한다.” 감독의 바람처럼 80년대를 지나, 영화가 만들어진지 40년도 더 지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그 어둠은 사라졌을까. 그처럼 <최후의 증인>은 제때 만나지 못했기에, 더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걸작이다. 고 이두용 감독의 명복을 빌며 조만간 이 영화를 다시 스크린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린다.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