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수잔 서랜든, 지나 데이비스.

지난해부터 여성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이 꾸준히 개봉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캐롤> 최근 개봉한 <서프러제트> <로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여성주의 영화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영화는 어떤 작품일까. 너무 쉬운 퀴즈였다. 정답은 <델마와 루이스>다.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도 <델마와 루이스>가 등장했다. 희자(김혜자)는 친구 정아(나문희)와 <델마와 루이스>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는 봐도 봐도 재밌어. 정아야. 우리 델마와 루이스처럼 여행 가자. 이 집 팔아서.” 1991년(국내에선 1993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가 어째서 여성영화의 역사상 가장 많이 언급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자.

델마가 챙긴 저 권총으로 인해 그녀들의 여행은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1. 여자들의 버디무비
<델마와 루이스>는 제목의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가 주인공인 영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건 이 영화가 전형적인 버디무비라는 거다.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난다. 델마는 ‘폭력적인’ 남편을, 루이스는 지루한 일상을 뒤로 한 채 떠난 여행이다. 즉, 로드무비 장르에 속한다는 뜻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한 델마를 위해 루이스는 방아쇠를 당긴다. 얼떨결에 치한을 살해해버렸다. 이때부터 영화는 액션·범죄 장르에 가까워진다.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도주를 선택한 두 사람은 돈을 훔치고, 경찰을 트렁크에 감금하고, 성희롱을 하며 추근대는 남자가 모는 유조차를 폭파시켜버린다.
<델마와 루이스> 이전, 이 모든 장르의 영화는 남자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델마와 루이스>와 비견되는 버디무비 혹은 로드무비 가운데 <내일을 향해 쏴라>(1969)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가 있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내일을 향해 쏴라>는 전형적인 남성 버디무비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남성 클라이드와 여성 보니가 등장한다. 물론 운전은 클라이드가 한다. <델마와 루이스>처럼 여성이 운전하는 영화조차 과거에는 흔치 않았다.
<델마와 루이스>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캘리 쿠리는 당시 방송 드라마를 몇 편 썼던 무명의 작가였다. 그녀는 “‘두 명의 여자가 범죄의 향연을 벌인다’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후, 이 작품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 예감은 곧 현실이 됐다. 왜냐면 그전까지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마이클 매드슨, 수잔 서랜든, 리들리 스콧 감독. 뒷모습은 지나 데이비스인 듯.

2. 오직 여자만 변한다
비평가 콜렛 모드는 “<델마와 루이스>의 남자 캐릭터는 대부분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있으며 책임감이나 의리 등은 역할 뒤집기 과정을 통해 주로 여성 캐릭터에게서만 발견된다”고 썼다. 여기서 남자 캐릭터를 대표하는 인물은 델마의 남편 대릴(크리스토퍼 맥도날드)이다. 그는 가부장제의 전형이다. 델마를 어린애 취급한다. 델마는 그의 허락이 없으면 외출을 하지도 못했다. 역할 뒤집기의 대표 캐릭터는 델마다. 그녀는 소심한 성격이었다.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했다. 델마는 점점 변해간다. 영화 초반, 델마는 루이스에게 의존했지만 점점 관계가 역전된다. 두 사람의 여행이 진행될 수록 델마와 루이스의 심리적인 모녀관계가 바뀌는 걸 볼 수 있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면 루이스가 오히려 델마에게 의지하게 된다. 델마는 어리숙한 가정주부에서 독립적인 여성으로 변해간다.
이렇게 변화하는 <델마와 루이스>의 여성 캐릭터는 관객뿐만 아니라 평단에서도 주목했다. 유기적인 캐릭터의 변화를 연기한 지나 데이비스와 수잔 서랜든이 1992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시에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수상자는? <양들의 침묵>의 조디 포스터였다. 심사위원들의 표가 델마와 루이스 사이에서 갈렸기 때문이다.

브래드 피트.

3. 가슴 대신 근육
브래드 피트가 <델마와 루이스>에 고작 6000달러를 받고 출연한 것은 유명하다. 브래드 피트의 캐스팅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어떻게 캐스팅 됐을까.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J. D는 애초 윌리엄 볼드윈이 맡기로 돼 있었다. 그가 <분노의 역류>에 출연하는 바람에 공석이 됐고 브래드 피트는 400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역할을 따냈다. 당시 그와 마지막까지 경합했던 후보는 조지 클루니였다. “심사하는 사람이 우리 둘을 부르더니 윗옷을 벗어보라고 하더라. 그리곤 곧바로 피트를 뽑았지.” 클루니의 이야기가 농담만은 아니었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브래드 피트가 맡은 역할은 단순하다.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여성들의 가슴을 슬쩍 보여주는 것처럼 여성 중심의 영화에서 남성의 근육, 복근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지 클루니의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다. 영화 리뷰에서 자주 본 익숙한 표현이 있다.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브래드 피트가 “소비되는 남성 캐릭터”를 연기했다. 물론 이 역할 이후 브래드 피트는 어마어마한 스타가 되긴 했다.

<델마와 루이스>의 엔딩.

4. 엔딩, 비극 혹은 희망
*25년 묵은 스포일러 있습니다
<델마와 루이스>를 얘기할 때 엔딩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멕시코로 도주하기로 한 델마와 루이스는 경찰에 이어 FBI의 추격을 받다가 그랜드 캐넌의 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들의 선택은 “그냥 간다”였다. 1966년형 썬더버드 자동차는 그대로 절벽으로 질주하고 허공에 뜬 채로 영화는 끝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델마와 루이스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은 비극이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래의 짧은 영상을 보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죽음은 차라리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말 들어 봐. 우리 잡히지는 말자. 계속 가는 거야!”

리들리 스콧 감독은 엔딩에 대해 고민을 했다. DVD에는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아래로 떨어진 장면을 보여준 후 그녀들의 유일하게 믿어준 슬로컴브(하비 케이틀) 형사의 표정을 보여주는 버전의 엔딩도 있다. 리들리 스콧은 좀더 낙관적인 엔딩을 위해 두 여성 중 한 명을 살리는 엔딩도 고민했다고 한다. 절벽으로 떨어지기 전, 루이스가 델마를 자동차 밖으로 밀어낸다는 엔딩이 그것이다. 다른 버전의 엔딩보다 지금이 더 나아 보인다. 리들리 스콧의 최종 선택이 옳았다. <델마와 루이스>의 엔딩은 단지 여성영화뿐만 아니라 영화사에 남을 엔딩이다.


<데쓰 프루프>

5. 좀더 센 여성영화가 필요해?
<델마와 루이스>와 비슷해보이는 영화가 있다. 카챠 본 가르니에 감독의 <밴디트>(1997)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2007)다. 독일 영화 <밴디트>의 주인공은 역시 여자들이다. 감옥에서 만난 여성들은 밴드를 결성하고 파티를 준비한다. 호송 경찰의 추행을 계기로 그녀들은 탈주를 감행한다. <데쓰 프루프>는 여성을 능욕하고 다니던 스턴트맨 마이크에게 여성들이 타란티노 스타일의 통쾌한 복수를 날리는 영화다. 이 영화의 엔딩은 <델마와 루이스>와 결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 충격은 매우 유사하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