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는 지난해부터 21세기 영상 미디어 신기술의 첨단인 ‘VR’에 주목하며 각종 포럼 행사를 개최했다. 올해는 국내 VR 산업체 ㈜바른손, 영화진흥위원회와 함께 산업 포럼 행사 및 관객 상영 프로그램으로 이뤄진 ‘VR 시네마 in BIFF’를 선보인다. 지난해에는 산업 관계자를 대상으로 포럼 행사만을 열었다면 올해는 일반 관객 대상 상영 프로그램으로까지 확장해서 VR 시네마의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국내외에서 가장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들을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이번 행사의 주요작품을 소개한다.


초급: VR Movie관

VR 영상을 처음 접해보는 관객이라면 5~15분 분량의 단편 영상을 30분 분량으로 묶어 상영하는 VR Movie관부터 찾으면 좋다. 총 7개 섹션으로 여러 작품이 묶여 있어 그 중 하나의 섹션을 선택하면 여러 영상을 연이어 관람할 수 있다.

‘묶음1’ 섹션에 소개된 <울트라맨 제로 VR>(2017)과 <간츠:오 VR> 영상은 일본의 유명 특촬물 시리즈와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작품의 특정 장면을 VR로 재현한다. ‘묶음3’의 <기억의 재구성>(2017)과 ‘묶음6’의 <동두천>(2017)은 한 편의 독립적으로 완성된 단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제작한 김영갑 감독의 <기억의 재구성>은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형사가 희생자의 뇌 속에 접속해 진범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야기다.

김진아 감독의 VR 다큐멘터리 <동두천>은 미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의 실화를 모티브 삼아 동두천이라는 기이한 공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생활하다가 사라져간 그녀의 마음을 ‘생생하게’ 위로한다. 관객은 <동두천>을 통해서 실제 그 공간에 갇힌 듯한 갑갑함을 느껴볼 텐데, 이는 VR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하나의 목적이기도 하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는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여성과 그녀를 찾아온 이상한 가정용품 외판원 사이에 벌어지는 잔혹한 범죄 미스터리 <나이브즈>(2016)는 VR 시네마의 개념을 이해시켜줄 여러 촬영기법이 등장한다.


중급: VR Movie Plus관
<미유비>

VR Movie Plus관에서는 관객이 직접 이야기에 개입해볼 수 있는 영상을 즐길 수 있다. 세계 VR 콘텐츠 시장을 선도하는 ‘필릭스 & 폴 스튜디오’의 필릭스 레쥬네스와 폴 라파엘 감독이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 <미유비>(2017)를 내놓았다. VR 콘텐츠로는 최초로 가장 긴 분량인 40여분에 달하는 이 영화는 어느 초등학생 소년이 사는 집에 도착한 생일선물 중 ‘미유비’라는 이름을 가진 장난감 로봇과 소년 사이에 벌어지는 드라마를 오직 로봇 시점에서 풀어낸 영화다. 사용자는 미유비의 시점에서 모든 사건을 지켜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체험’하게 되는데 전체 프로덕션 디자인을 1980년대 할리우드 가족 영화 속 풍경을 재현하듯 아기자기한 빈티지 소품들로 채워놨다. 관객은 시선을 돌려가면서 집안 곳곳에 숨겨진 소품 등을 찾아내며 이야기의 시대 배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얼터레이션>

제롬 블라케 감독의 <얼터레이션>(2017)은 꿈의 연구 프로젝트에 지원한 알레한드로가 꿈과 현실을 혼동하게 되는 과정을 일반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래픽 화면을 통해서 선명하지 못한 흐릿한 기억을 시각화한 18분 분량의 단편이다. <그것>(2017)의 배우 빌 스카스가드가 알레한드로를 연기한다.


고급: VR Experience Movie관
<아르덴즈 웨이크>

가만히 의자에 앉아 지시하는 대로 보는 VR 콘텐츠에서 이제는 관객이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는 기술적인 표현이 풍부해지고 있다. 일반적인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관객인 내가 위치를 옮길 수 없지만 VR 시네마는 그것이 가능하다.

올해 세계 영화제로는 처음으로 VR 단편 경쟁부문을 신설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VR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유진 정 감독의 <아르덴즈 웨이크>(2017)와 <알루메뜨>(2016)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서 보는 영화로 기획됐다. 가벼운 움직임을 통해서 관객인 나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거나 숨어 있는 영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늘에 떠있는 배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면 내부가 보이는 식으로 관객인 내가 작품 ‘속으로’ 다가갈 수 있다. 또 한 편의 단편 <알루메뜨>는 마치 인형의 집 같은 작은 세계를 거인인 관객이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유진 정 감독은 바다 한가운데 사는 부녀의 이야기(<아르덴즈 웨이크>), 구름 속 환상의 나라에 사는 소녀에게 찾아온 비극적인 사건(<알루메뜨>)을 소재로 가족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두 편 모두 VR 영상의 속성을 정확하게 꿰뚫은 프로덕션 디자인과 설계를 통해 관객이 한껏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수작이다. 리미 감독의 <드림 콜렉터>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디자인된 작품이다. 사람들의 꿈을 모으는 노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는 상투적이나 VR 영상의 특징을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다.

VR 시네마는 기존 영화의 이야기 진행 방식을 유지한 채 촬영 기법만 VR로 적용해 영화를 찍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VR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상호작용을 통한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혹은 몰입감을 살리는 이머시브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의 용어들이 생겨나는 이유다. 위에서 소개한 상영작들은 이 같은 개념을 느껴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다. 며칠 전 픽사에서 신작 <코코>를 활용한 VR 콘텐츠 티저 영상을 공개했는데 관객들이 작품 안에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소셜 VR 기능을 적용한다고 밝혔다.

이미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VR 시네마를 주도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는데 앞으로 몇 년 사이에 굉장히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콘텐츠와 상영관, 그리고 새로운 서비스가 필요한 시점이 곧 다가올 것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에서 미래의 VR 씨어터를 미리 만나보자.

▶ 10월13일부터 20일 까지 영화의전당 비프힐 1층에 마련된 ‘VR 씨어터’에서는 전세계 36편의 VR중단편 영화와 다양한 체험형 콘텐츠를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상영은 일반 관객 대상으로 하며 콘텐츠의 형태와 관람 방식에 따라 VR Movie관, VR Movie Plus관, VR Experience Movie관 등 3개관으로 나눠 운영된다. 관람은 모두 무료이며 선착순 예약 신청 후에 관람할 수 있다.


글 김현수
<씨네21>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데일리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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